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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나 Nov 11. 2020

파업과 휴가, 병가 없는 엄마의 삶

자려고 누웠다가 혼자 11개월 된 아기를 키우는 어느 아빠가 생각나 아이들의 작아진 옷을 주섬주섬 상자에 담아 넣었다. 그러고 보니 ‘낙태의 비범죄화’, ‘낙태죄 전면 폐지’가 흔한 구호로 거리에 나뒹구는 시절이다. 낙태 자유화를 향한 구호는 어느 시절에나 있었다. 임신과 출산, 모유수유, 양육 줄줄이 따라오는 한 생을 길러내기 위해 헌신하는 일이 온전히 여성이 아닌 남성에게로 애당초 많이 기울었던 과업이라면, 낙태라는 말은 이미 죄의 굴레를 벗어나 자유의 옷을 입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본다. 남성의 일이었다면 진작에 국가의 일이 되었겠지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왜인지. 그러나 이 말은 누군가를 모독하고 싶은 말이 아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남녀 사이에 벌어지는 ‘임신’이 생의 축제로 받아들여지려면 축제가 되기 위한, 아니 생명이 살아남기 위해 충족해야 할 사회경제적, 개인적 기준들이 높아졌다.




흐트러진 가을 낙엽과 함께 낙엽에는 봄과 여름을 살아낸 흔적이 숨 쉬지만, 낙태는 탯줄이 잘려나간 빈 방의 이름처럼 헐겁고 가엽다. 맑은 하늘을 비춰줄 자신이 없는 여성은 엄마가 되기를 이내 포기한다. 포기가 또 다른 상처를 안기지 않으면 좋으련만 생명을 포기한 모체는 또 다른 상처를 입는다는 건 엄연한 사실이다.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수많은 세부항목과 마주해야 하는 선택의 여정이지만, 물질로 가득 찬 세상은 태아의 생명도 취할 것인지 말 것인지 선택하라고 묻는다. 수많은 선택지에서 인간은 나약하다.


미혼부에게 보낼 옷을 챙겨 넣고, 빨래를 갰다. 오늘 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낙태죄 입법안 발의도 아닌, 혼자 아이를 키우는 아빠에게 옷을 보내주는 일임을 깨달았다. 식당에서 설거지를 하며 유아 침대에 아이를 눕혀 놓고 아이를 돌보는 그 아빠의 땀방울이 헛되지 않기를 기도해주는 일이다.




  어느 뜨거운 여름, 아이들을 데리러 유치원에 가는 마을버스의 제일 뒷자리에 앉은 적이 있었다. 조금 더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차창 밖으로 한 허름한 떡볶이 집을 지나쳤다. 맛있게 익은 떡볶이를 휘젓고 있는 한 중년 여성이 보였고, 그 옆으로 작은 공간에 예닐곱 살 어린이가 보였다. 매미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던 그 더운 여름, 창이 활짝 열린 공간에서 어린 여자아이가 낮잠을 자고 있었다.  

  평생 칼국수집을 한 엄마를 보며 컸다던 소설가가 떠올랐다. 그녀는 어머니가 해주는 음식과 함께 그 재료에 난 칼자국도 함께 삼켜 몸속에는 무수한 칼자국이 새겨져 있다고 했다. 그 떡볶이 집 아이의 몸에는 무엇이 새겨져 있을까 잠시 생각했다.

  떡볶이가 익어가는 속도보다 딸을 더 빨리 키워야 했을까. 엉뚱한 생각이 떠올랐지만 떡볶이보다 딸이 더 소중하기에 딸이 떡볶이 옆에 머물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몸에는 엄마의 혈관이 흐른다. 이 말은 우리 엄마의 혈관이 왜 자식 사랑으로 뜨거운지 알았다는 말인 동시에 나도 그런 엄마가 되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자식을 먹이는 일은 무심한 반복이 되어 매일같이 사랑의 혈관을 안전하게 타고 흐른다는 것을 엄마가 되고 알았다. 밖에서는 천재지변이 일어나고, 엄마의 마음에 배신과 분노, 고통이 들끓어도 자식의 배를 굶기는 일은 없다. 엄마라는 삶에는 파업도 휴가도 병가도 없다.




  이런저런 상념에 젖어 있다가 잠들어 있는 두 아이의 모습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아이들의 이부자리를 봐주고, 땀 맺힌 이마를 부드럽게 쓸어주고, 두 아이의 귀에 대고 속삭인다.

“잘 태어났어, 우리 지성이 서진이!”


둘째 서진이는 잠들기 전에 내게 부탁했다.

“엄마, 언제 한번 김지선 선생님한테 나 좋아하는지 물어봐줘.”

“왜, 선생님이 서진이 안 좋아하는 거 같아?”

그렇다고 한다. 선생님이 너무 바쁘셔서 서진이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자주 못해주시는 거라고 둘러댔다.


오늘 간식으로 뚤떡(꿀떡)을 먹었다고 자랑한 서진이가 몸을 뒤척이며 잔다.

허벅지와 발목이 통통하고 튼실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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