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홍등‘은 중국의 5·4 운동이 끝난 뒤의 192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중국에 있어서 1920년대란 발달된 아니 새로운 서양문명이 들어와 기존의 전통과 갈등을 일으키는 시기로 우리 조선에 있어서 개화기와 비슷한 시기라 할 수 있다. 중국의 제5세대 감독이라 불리는 장이모 감독은 홍등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처첩제라는 전통(인습)을 통하여 이러한 혼란스러운 시대를 잘 그려내고 있다. 영화 초반부터 줄곧 나타나는 홍등의 붉은색 이미지는 주인마님과의 하룻밤을 나타내고 있지만, 과거로부터 중국에서는 붉은색이란 귀신을 내쫓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즉 서양으로부터 들어오는 새로운 민주주의적 문명을 나타내는 붉은색은 귀신 다시 말하면 그 당시 사회에서 몰아내야 할 존재인 과거로부터 이어 내려오는 봉건적 가부장적인 가치체계를 몰아내고자 했던 것이다. 이렇듯 장이모 감독은 영화 홍등을 통하여 그 당시 아니 현재에도 유용한 가치인 개인, 자유, 그리고 민주주의라는 이데올로기적 요소를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먼저 개인이란 요소는 주인공인 송리엔(공리)을 통해서 나타난다. 과거 중국에 있어서 개인의 가치란 존재하지 않았다. 소수의 지배층을 제외하면 철저한 봉건적 계급사회 속에서 개인의 존엄성이란 철저히 무시되어 왔다. 하지만 5·4 운동을 기점으로 중국 사람들에게 교육의 기회가 확대되면서 서서히 현대에 있어서의 개인의 가치를 찾아가게 된다. 주인공 송리엔도 이러한 사회분위기 속에서 비록 대학 1학년의 중태라고 할지라도 대학 교육의 기회를 접하고 이러한 개인의 가치를 깨달은 신지식인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것은 비록 그녀가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에 의해 부잣집 첩으로 들어가지만 주인공 송리엔은 기존의 3명의 처첩들과 구별되려고 하는 노력에서 알 수 있다. 하지만 송리엔은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끝내는 자신도 전통으로 대표되는 발마사지를 받고 다른 첩들과 마찬가지로 주인마님을 정점으로 한 처첩들 간의 권력투쟁에 들어감으로써 그녀는 무기력함을 나타낸다. 즉 주인공 송리엔은 중국의 무기력한 신지식인을 나타내고 주인마님의 가족체계는 과거 봉건적 중앙권력체계를 상징한다. 주인공 송리엔이 주인마님께 바가지를 긁지만 주인마님은 이러한 그녀를 버리고 다른 부인을 찾는 것처럼 중국의 신지식이 중앙관리로 진출하여 사회를 바꿔 보려 하지만 이러한 그들의 시도는 중앙에서 버림을 받음으로써 그들은 좌절하게 된다. 더 나아가 송리엔이 거짓으로 임신의 사실을 알려 자신의 권리를 유지하려고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중앙에 진출한 신지식인들은 자신들이 처한 현실 상황 속에서 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그들 자신도 과거 시스템 속에서 부패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자유는 사람들이 교육을 통해서 개인이란 가치를 인식하고 다음으로 추구하게 되는 요소이다. 하지만 이러한 자유는 영화 속에서 사합원이라 불리는 주인마님의 건물 속에서 철저히 외면된다. 즉 주인공 송리엔은 높은 벽으로 둘러싸여 외부와는 단절되어 있고 그러한 단절된 공간 속에서 과거 중국의 대가족 사회에서 지켜 내려오는 장유유서, 내외유별 그리고, 주종노비 등의 과거의 가치가 지켜지고 아니 버텨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폐쇄적인 주인의 공간과 하인들의 공간과의 구별 속에서 잘 나타나 있다. 이러한 개인의 자유가 억압된 사회 속에서 가수이었던 셋째 첩 메이산은 다른 애인을 둠으로서 억압된 사회에서 벗어나고자 하였으나 이러한 사실이 밝혀지고 그녀는 알 수 없는 죽음을 당함으로써 이러한 자유를 향한 시도는 철저히 억압받게 된다. 주인공인 송리엔도 집안의 큰 아들 페이푸를 통해서 자유의 출구를 찾으려고 하였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그에게 거절당함으로써 이러한 시도는 시도로만 끝나고 만다.
마지막으로 민주주의다. 민주주의(民主主義) 사회란 백성이 주인이 되는 사회 즉 개인이 자유를 통하여 권력을 가질 수 있는 사회를 일컫는다. 여기서의 개인이란 관직을 갖지 않은 피지배 계층 영화 속에서는 처첩들을 포함한 하인들을 의미한다.(처첩들을 관직을 갖은 중간계층으로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장이모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서 이러한 민주주의와는 반대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을 비판함으로써 새로운 민주주의의 가치를 옹호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는 주인의 모습은 의도적으로 뚜렷이 드러나지 않는다. 또한 이러한 그는 늘 검은색 전통의상을 입고 나타나며 이러한 주인마님은 그 집안 속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주인마님은 중국 내에서의 독재 권력을 나타내고 있으며 이러한 그의 모습은 잘 드러나지 않는 중국 공산주의 권력이라도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첫째 부인이 송리엔에게 밤에 기름을 아껴 쓰라고 타이르는 장면 등을 통하여 경제적으로 서서히 몰락하는 가부장적인 모습을 그림으로서 가부장적인 온건주의 속에서 찾는 안정이 민주주의와의 동일성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모습은 셋째 첩이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주인마님이 새로이 다섯째 첩을 들임으로써 이러한 체제가 쉽게 끝나지 않을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렇듯 홍등이란 영화는 지식을 갖춘 한 신여성이 부잣집에 첩으로 들어가 그 속에서 겪는 갈등을 그리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과거 중국의 신지식인들이 기존의 제도 속에서 겪게 되는 무기력과 한계를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이 신지식인들이 추구하려는 가치는 봉건적 가부장적인 가치가 아닌 바로 당시의 신문명 즉 개인, 자유, 그리고 이를 통한 민주주의라는 가치이다. 하지만 이러한 홍등이란 영화가 2000년대를 사는 우리에게 아직도 감동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우리 사회도 오랜 시간을 통하여 위에서 언급한 개인, 자유, 그리고 민주주의라는 가치를 쫓아갔지만, 우리 사회는 아직도 이들의 가치를 완벽히 잡지 못하고 아직도 이러한 이데올로기를 추구하는 과정속에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것은 영화 처음 도입 부분에서 잘 나타나는데 바로 주인공 송리엔이 시집오는 과정에서 보이는 삼거리 위에 우리 사회도 있기 때문이다. 즉 이미 어머니와 주인마님과의 계산이 마무리되었기에 돌아갈 수 없는 길과 다른 연인들의 사랑으로 가는 길 그리고, 첩으로 가는 길 중에서 주인공 송리엔은 마지막 길밖에 선택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우리 또한 과거로의 길과 유토피아적인 길이 아닌 현 사회에서 투쟁의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 있기 때문에 영화 홍등은 과거 중국의 영화가 아닌 현재 우리의 영화가 될 수 있는 것이다.
- 2000년 12월 11일 대학 '매체 비평'이라는 과목에서 제출했던 리포트를 2025년 2월 파일 정리하면서 브런치에 다시 옮겨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