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떽쥐베리의 '야간비행' 그리고 와인
벌써 10월이 코 앞에 와있건만 아직도 한낮엔 햇볕이 피부를 파고들듯 내리쬐는군요. 하지만 아침저녁에 불어오는 서늘한 느낌은 성큼 내 곁에 다가오는 가을을 깨닫게 합니다. 역시 선선한 바람이 귓가를 스치고 낙엽이 뒹굴면 마음을 풍요로운 곳간으로 채워줄 수 있는 좋은 책을 가까이 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평소 일과 관련된 전문서적 보기에도 바쁜 제게도 가을이 되니 왠지 서정적인 글귀로 채워진 책들이 눈에 들어오는군요. 그래서 이번에는 가을에 너무나 잘 어울리는 문학가와 관련된 와인을 하나 소개할까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마도 한 번쯤은 읽어봤을 법한 책.
가을이 되면 왠지 다시 한 번 읽고 싶어지는 책.
바로 생떽쥐베리의 '어린 왕자'입니다.
생떽쥐베리는 문학에 관심이 그다지 없는 사람들에게도 익숙한 이름이라 할 수 있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문학가 중 한 명입니다. 그러나 생떽쥐베리가 유명한 프랑스의 보르도 지방의 그랑크뤼를 생산하는 유명한 와인 가문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아시는지요? 프랑스 보르도에 위치하고 있는 마고 지방의 와이너리 샤또 말레스코 생떽쥐베리는 그랑크뤼 클라세 3등급 와이너리입니다.
생떽쥐베리는 1900년 6월 29일 이 와이너리를 소유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행복한 유년시절을 보냈다고 합니다. 미국의 한 저택에 침입한 강도가 저택의 주인이 권한 샤또 말레스코 생떽쥐베리 와인 한 잔을 마시고는 감복하여 주인에게 포옹까지 하고 그냥 떠나갔다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감동을 선사하는 와인을 생산하는 곳. 이 와이너리는 와인뿐만 아니라 가문의 후손인 생떽쥐베리의 명성 덕분에 와이너리 투어의 필수코스로 꼽힌다고 하는데요. 아마도 생떽쥐베리는 그가 가진 특유의 방랑벽 때문에 이 와이너리에서 생산하는 정말 감동적인 와인을 제대로 맛보지 못했을 거라 생각됩니다. 만약 이 와인을 제대로 맛보았다면 분명 그렇게 와이너리를 떠나버릴 수는 없었을 테니까요.
생떽쥐베리는 비행을 너무나도 사랑했던 사람으로 비행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우상과 같은 존재이기도 합니다. 또한, 그는 행동주의 문학가로서 상상력을 전제로 하는 문학을 당연시 여겼던 그 당시 분위기에서 상상력을 담보하지 않고 자기의 생각과 이념대로 행동한 경험과 실화를 바탕으로 한 저서들을 집필하였습니다. 그는 매년 한 권씩 책을 내었는데, 집필한 책들은 모두 비행기에 관련된 작품입니다. 그는 북서 아프리카 남대서양, 남아메리카 항공로의 개척자이며 야간비행의 선구자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1918년 한 용감한 비행사가 프랑스에서 바르셀로나까지 첫 번째 항공우편을 비행기로 실어 운송한 뒤로 북아프리카에서 남미까지 항공우편 역사가 시작되었고, 생떽쥐베리는 이 야간우편 비행을 하면서 '야간비행'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남프랑스의 작은 마을인 브뤼가이홀르(Brugalrolles)에는 마을의 상징이었던 'Moscous Tree'라는 거대한 소나무가 있었습니다. 이 나무는 항공우편 비행을 하던 비행사들의 좌표의 역할을 했고 생떽쥐베리는 비행을 할 때마다 이 거대한 나무를 보면서 많은 영감을 얻었다고 합니다. 이 때의 비행기간 경험을 담아 쓴 책이 바로 '야간비행'입니다. 이 거대한 소나무는 20년 전 번개에 맞아 불에 타서 사라졌지만, 이후 이 지방의 실험적이고 도전적인 젊은 와이너리인 도멘 게이다(Domaine Gayda)는 이 나무와 용감한 비행사들을 기리며, 프랑스의 새로운 지역의 와인을 전 세계로 전파한다는 도전 정신의 철학을 담아 '플라잉 솔로(Flying Solo)라는 와인을 탄생시켰습니다. 플라잉 솔로의 레이블을 보면 마치 오래된 흑백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인데요. 마치 생떽쥐베리의 야간비행을 영화로 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합니다.
비록 그랑크뤼 3등급의 샤또 말레스코 생떽쥐베리와는 비교할 수 없는 테이블 와인이지만 편안하고 부드러운 탄닌에 풍부한 과실의 향과 경쾌한 피니쉬는 가격을 의심케 하는 퀄리티를 보여줍니다. 만약 생떽쥐베리가 살아서 이 와인을 맛보았다면, 비행을 마치고 돌아와 반드시 이 와인을 한 잔 놓고 등불 아래서 지난 비행을 추억하며 작품을 썼을 것 같은 생각이 드네요.
그의 저서 '야간비행'에서 비행 중의 육지풍경을 마치 글 읽는 이가 직접 보는 것처럼 펼쳐놓는 문장을 읽으면서 '플라잉 솔로' 한 잔을 함께한다면 마치 생떽쥐베리가 내 곁에서 소근소근 이야기를 들려주는 아련한 느낌이 들 것만 같습니다.
올 가을은 '어린 왕자' 대신 생떽쥐베리의 '야간비행'을 다시 한 번 읽으며 그의 와인과 함께 지나간 시간들을 추억해보아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