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틸리히의 상징론
1. 들어가는 말
틸리히는 “계시의 지식은 직접적으로든지 또는 간접적으로든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기 때문에 계시의 지식은 유비적인 것이든지 아니면 상징적인 것이다. (중략) 단지 하나의 상징일 뿐 이라는 표현은 회피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한 비유적이며 비상징적인 지식은 유비적인 또는 상징적인 지식보다 못한 진리이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한다. 틸리히에게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가장 올바른 접근은 ‘상징’이다. 유한한 인간은 무한한 하나님께 직접적으로 도달하지 못하지만 상징을 통해 간접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질 수 있다.
그렇기에 틸리히는 상징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신에 대한 구체적인 주장은 상징적인 것이 틀림없다는 주장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구체적인 주장은 신에 대해서 어떤 것을 말하기 위해서 유한한 경험의 단편을 사용하고 있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구체적인 주장은 비록 유한한 경험의 단편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을지라도 이러한 단편의 내용을 초월하고 있다.” 상징만이 자신을 초월하여 하나님을 지시할 수 있는 방법이다.
지금부터 우리는 본 글을 통하여 틸리히가 주장하는 상징에 대해서 살펴볼 것이다. 우선적으로 상징 일반의 의미를 살펴본 후 종교적 상징의 차이점을 살펴보고, 종교적 상징의 정당성은 무엇인지 살펴볼 것이다. 다음으로는 종교적 상징이 가지는 특징을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볼 것이다. 마지막으로 틸리히의 종교적 상징의 의의를 사회, 종교, 문화로 구분하여 알아볼 것이다.
2. 종교적 상징의 의미와 정당성
2-1. 상징의 의미
틸리히에게 상징은 계시와 깊은 관계를 가진다. “계시는 우리의 궁극적인 관심의 현현이다. 계시된 신비는 우리에게 있어서 궁극적인 관심이다.”, “궁극적인 관심은 이성의 깊이와 이성의 신비를 지시하고 있는 상징과 신화를 통해서 자신을 표현하고 있다.” 틸리히에게 궁극적 관심은 오직 상징을 통해서만 알 수 있고, 상징을 통해서만 표현될 수 있는 ‘존재 자체’이다. 우리는 이 상징을 세 가지로 나누어 접근해볼 수 있다.
첫째, 상징과 기호의 관계이다. 틸리히에 따르면 “상징과 기호는 결정적인 측면에서 비슷하다. 상징과 기호는 모두 그 자체를 넘어서 그 밖의 다른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기호는 편의상 대체될 수 있지만 상징은 그럴 수 없다는 차이점이 있다. 기호는 약속에 의하여 공동사회에 주어지는 것이지만 상징은 지시하는 실재와 관계가 있다. 또한 기호는 임의로 대체되나, 상징은 불가하다. 상징을 기호나 표지들로부터 구별하는 결정적 차이는 무엇인가? 틸리히에 의하면 “기호는 그것이 지시하는 것과 필연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있지만 상징은 지시하고 있는 실재에 참여하고 있다. 기호는 편의상 요구에 따라서 임의적으로 바뀔 수 있지만 상징은 그것에 의해서 상징되는 것과 그것을 상징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사람 사이의 상관관계에 따라서 자라기도하고 죽기도 한다.”는 것이다.
둘째, 상징은 상징의 실재로부터 나온다. 예를 들면, 사자란 동물은 용맹함의 상징이다. 여기서 사자의 의미가 변하지 않는 한 용맹함의 상징은 사라지지 않는다. 용맹함의 상징은 실재로부터 나오며 실재의 의미에 따라 상징이 성장하기도 하고 죽기도 한다. 그러므로 상징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질 수 없다. 왜냐하면 상징은 그것을 어떻게 일컫든 간에, 오늘날 ‘집단적 무의식’ 또는 ‘집합적인 무의식’이라고 부르는 모태로부터 나온다. 틸리히는 상징이란 마음대로 만들고 싶다고 해서 임의적으로 고안해 내거나 폐기 처분할 수 없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설혹 의도적으로 상징을 만들거나 고안해 냈더라도 그 상징이 통용되는 사회 집단의 무의식 속에서 상징으로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아무 힘없는 죽은 기호가 될 뿐이다. 인간의 삶처럼 상징은 성장하고 죽는다. 상징은 받아들이는 인간의 상황과의 상응관계 속에서 ‘탄생-소멸-재탄생’의 생명과정을 밟는다. 이것은 오랜 역사를 거쳐 오면서 거부당하지 않고 문화내적으로 자리 잡고 있다.
셋째로 상징은 ‘상징 실재’와 ‘상징을 대하는 자’에게 다른 차원을 보여준다. 상징은 마치 예술작품이(예술 작품과 상징을 동일시하기에는 이르지만) 실재세계와는 다른 감정과 차원의 세계를 열어주듯이, 감추어져 있고 다른 방식으로 포착될 수 없는 실재의 차원의 개방에 이르게 된다. 반면에, 연극의 주인공을 통해서 지금 나의 존재 깊은 곳을 성찰할 수 있듯이, 상징은 나의 존재의 감추어진 곳을 볼 수 있도록 해준다. 다시 정리하면, 상징이 필요한 이유는 “실재를 개방하며 동시에 그것은 영혼을 개방한다.” 생명의 깊이 있는 차원과 보다 고차원적인 실재의 구조적 특성을 체험하고 거기에 참여하는 것이다. 나아가 이것으로 인해 우리의 삶이 보다 풍요롭고, 성숙하며, 창조적 아름다움을 맛보아서 개인의 자아를 온전히 자아실현을 하려고 함에 있다. 상징은 실재의 여러 차원을 열어 보이고 실재의 양태와 세계의 구조틀을 계시하는 기능을 감당한다. 틸리히는 이 기능을 상징의 대리기능이라고 불렀다. 상징은 상징하려는 실재의 힘과 의미에 부분적으로 관여하면서 실재의 힘과 의미를 대표한다. 우리가 상징의 의미에 깊이 들어가면 갈수록 상징이란 실재의 차원을 열어 보이는 기술로서의 기능이 주된 기능임을 알 수 있다.
2-2. 종교적 상징의 정당성
틸리히는 상징에 대한 깊은 연구 없이 종교에 대한 연구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왜냐하면 현실재는 참으로 궁극적인 것을 직접적으로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신앙의 언어는 상징의 언어일 수밖에 없으며, 신앙의 대상을 표현하는 것에 상징보다 더 나은 것은 없다. 틸리히는 종교적 상징을 세 가지로 구분한다. 첫째 인간의 궁극적 관심에 대한 근본적인 상징은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상징 언어와 상징대상으로 구분된다. 전자는 일상경험에서 비롯되며 후자는 궁극적 관심의 대상이 된다. 둘째, 하나님의 본질에 대하여 말하는 상징들이 있다. 이것들은 하나님의 행위사실을 묘사하기보다 인간이 가진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행위들과 경험들을 통해 얻은 하나님에 대한 추측이다. 셋째로 신적표현들이다. 이것은 사물, 사건, 예전 등을 의미한다. 이것들은 상징의 보물이다. 거룩한 것은 단지 그 자체로서 거룩성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를 뛰어 넘어 궁극적 관심의 대상인 ‘거룩의 원천’을 보여준다.
종교적 상징이 정당성을 얻기 위해서는 두 가지 기준이 있다. 첫째로 생동하는 종교적 경험을 제공하는가의 ‘신뢰성’문제이다. 이는 상징을 통해서 경험하는 내용이 무엇이냐라는 문제가 검토되어야 한다. 틸리히는 한마디로 상징을 통해서 “거룩”을 경험하는가를 묻는다. 종교적 상징의 기능은 궁극적으로는 궁극적 실재의 신비,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힘과 의미의 지반 혹은 근거, 존재 자체의 심연, 존재의 궁극적 힘, 위 모든 표현들을 한 마디로 총괄하여 “거룩”을 드러내 보인다. 궁극적 실재의 깊이의 차원은 신성한, 거룩한 그 무엇이다. 그러므로 모든 종교적 상징은 ‘거룩의 상징’이다.
둘째로 상징이 의도하는 내용을 정당히 표현하고 있는가의 ‘적합성’문제이다. 이것은 상징이 궁극적인 것을 지시하는가에 대한 문제이다. 만약 상징이 궁극적인 것을 지시하지 못한다면 그 상징은 ‘우상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진정한 종교적 상징이 되기 위하여 종교적 상징들은 자기부인의 기준에 부합되어야 한다. 종교적 상징들이 ‘존재자체’를 매개하고, 그것에 참여하고 있는 한 그것들은 계시의 표현이자 거룩함의 상징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거룩한 것이 아니기에 참여가 곧 일치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종교적 상징은 ‘자기부정’이 가능해야한다. ‘자기부정’이 불가능한 종교적 상징은 그 자체가 우상이 된다. 이러한 가능성은 모든 종교에 현존해 있는 위험성이다. 틸리히는 마성화라고 부르는 종교적 상징들의 자기높임의 경향들을 종교 내의 모든 성례전적인 행위들, 모든 거룩한 대상들, 거룩한 책들, 거룩한 교리들, 그리고 거룩한 종교의식들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는 상징을 절대화해서는 안 된다. 오직 종교적 상징은 표면적인 상징 표현을 부정하고 존재와 의미의 원천적인 힘인 “거룩 자체”를 지시함으로써 결정적인 자리를 확보하게 된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사건으로 대표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의 자기 부정인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자신의 실체를 드러낸다.
2-3. 종교적 상징과 신화
종교적 상징들은 신화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신화의 주인공들은 늘 성육신을 통해 인간의 종교적 숭배 대상이 된다. 인간의 궁극적 관심이 신적 인물이나 행위를 통해서 상징적으로 표현된다. 그러므로 신화란 신과 인간의 만남을 말해주는 이야기에 포함되어 있는 종교적 상징이다. 결국 종교의 내용은 신화적이며, 신화의 언어는 상징이다. 그러므로 상징만이 종교의 내용을 전달할 수 있다.
신화는 다신론신화와 일신론신화로 구분할 수 있다. 다신론은 다양한 신속에서 하나의 진리를 추구해야하기 때문에 일신론을 직면하고, 일신론은 ‘비신화화’의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틸리히는 ‘비신화화’에 대하여 신화를 신화로서 본다는 면에서 수용하지만 신화를 제거하는 측면에서는 거부한다. 틸리히에게 신화는 현존하는 인간의 의식의 형태이기 때문에 제거 될 수 없는 것이다.
틸리히는 ‘깨진 신화’와 ‘깨지지 않은 신화’를 구별한다. ‘깨진 신화’란 신화는 신화일 뿐이라는 것이다. 지시하고자하는 궁극적인 것을 표현하는 것 이상이어서는 안 된다. 그 선을 넘어 궁극성을 띠게 될 때, 그것은 ‘깨지지 않은 신화’가 된다. 이에 대한 단적인 예는 ‘문자주의’이다. 성경의 사건을 실재적 그대로 이해하는 문자주의적 신앙은 “우상적이 되고 만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궁극 이전의 것을 궁극적인 무엇으로 부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서의 사건은 신화이면서 동시에 사건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틸리히는 문자주의를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입장에서 문자주의를 ‘자연적 단계’와 ‘반동적 단계’로 구분한다. ‘자연적 단계’는 신비적인 것과 문자적인 것의 구별이 되지 않는 단계이다. 즉 신화가 자연적이고 그 속에서 신비적인 것을 경험하는 단계이다. 그러나 신화적 환상이 자연적이지 않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때가 온다. 이때 신화는 ‘깨진 신화’로서 궁극적인 것을 지시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반동적 단계’는 신화를 문자적으로 받아들일 것을 강조하는 단계이다. 이때 성서는 우상이 되고 신화는 ‘깨지지 않은 신화’가 된다. 틸리히는 성서자체가 우상이 되는 것을 거부한다. 상징이나 신화는 그대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상징은 유일하게 자기부정을 통해 궁극적인 것을 지시하고, 궁극적 관심을 표현해 줄 수 있는 수단이다.
3. 종교적 상징의 특징
3-1. 상징의 변증법
종교적 상징의 첫 번째 특징은 ‘상징의 변증법’이다. 틸리히는 말한다. “신에 대한 구체적인 주장의 매체가 되고 있는 유한한 실재의 단편은 긍정되면서 동시에 부정되고 있다. 이것은 하나의 상징이 된다. 왜냐하면 상징적인 표현이란 그것의 문자적인 의미가 그것이 지시하고 있는 것에 의해서 부정되고 있는 표현을 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징적인 표현은 또한 그것이 지시하고 있는 것에 의해서 긍정된다. 그리고 이러한 긍정은 상징적인 표현에 자신을 넘어서 있는 것을 지시할 수 있는 적당한 토대를 부여하고 있다.” 여기에서 종교적 상징은 상징 실재와 상징대상 사이에서 자기부정성과 자기긍정성의 변증법적 상관관계를 특징적으로 보여준다. 틸리히의 상징이론은 그의 존재론과 같은 맥락에서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틸리히 존재론은 존재의 구성요소를 양극성으로 설명한다. 양극성은 개별화와 참여, 역동성와 형식, 자유와 운명이다. 이러한 양극성은 서로를 긍정하는 동시에 부정하면서 존재론의 변증법적 성격을 형성한다.
나아가 종교개념의 ‘역설성’을 통해서도 상징의 변증법적 구조를 생각해볼 수 있다. 종교개념의 ‘역설성’에 근거한 긍정과 부정의 변증법적 논리를 살펴보면, 무한정자는 한정자를 통한 객관화를 통하지 않고서는 알려질 수 없다. 여기서 무한정자를 담아내는 한정자에 대한 긍정과 부정은 불가피하며 이러한 역설적 개념은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에서 극히 제한적으로 나타난다. 상징은 이러한 역설의 개념을 수용한다. 그래서 상징은 역설과 같이 지시하는 내용에 의하여 상징 실재는 부정되지만, 상징은 일차적으로 지시하는 내용과 유사성을 견지하기에 긍정된다. 예를 들면 ‘인격적 하나님’을 상징으로서 받아들일 때 이해 과정에서 궁극적 관심의 대상인 그는 인격체여야 한다는 점에서 ‘긍정’되어야 하고, 그 인격체란 한정적인 것이기 때문에 ‘부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3-2. 상징의 참여성
종교적 상징의 두 번째 특징은 ‘상징의 참여성’이다. 틸리히는 “모든 인간과 모든 것은 존재 그 자체에, 즉 존재의 의미와 근원에 참여하고 있다. 이러한 참여 없이는 그것들은 존재의 힘을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 실체의 어떤 형태든지 어디에선가 계시의 매개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의 이유라 할 수 있다.” 라고 주장한다. 또한 “참여의 개념은 많은 기능을 가지고 있다. 하나의 상징은 그것이 상징하는 실재에 참여하고 있다.”라고 주장한다. ‘참여’라는 말 자체는 모든 존재들이 존재하기 위해서 ‘존재자체’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나아가 모든 사물은 ‘존재 자체’에 참여하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 없기에, 그들은 모두 ‘존재자체’의 상징이 될 수 있다. 특별히 “종교적인 상징, 즉 신적인 것을 지시하고 있는 상징은 단지 상징이 지시하고 있는 신적인 것의 힘에 이 상징이 참여하고 있을 때만 참된 상징이 될 수 있다.” 그런데 하나의 상징이 상징이 되기 위해서는 그가 지시하려는 상징대상과의 본래적 ‘유사성’이 있어야 한다. 앞서 ‘상징의 의미(2-1)’에서 살펴보았듯이, 상징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질 수 없으며, 상징의 실재와 상징의 대상이 본래적으로 유사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상징의 참여성’은 앞의 변증법적 특징과도 밀접하다. 상징은 상징대상의 유사성 때문에 긍정되지만 문자적으로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부정된다. 즉 상징은 상징대상의 대리적 성격을 강하게 가지고 있다. 그래서 상징은 철저히 대리자로서 상징대상의 현실에 참여한다고 일반화시켜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가질 수 있다. 유사성과 대리성은 근본적으로 상징대상에 대한 지식이 전제될 때에만 가능하다. 그리고 그것이 ‘집단적 무의식’에 의하여 만들어지고 사라진다. 종교적 상징의 유사성과 대리성을 논하기 위해서는 ‘존재자체’인 상징대상에 대한 지식은 어떻게 인식가능한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무한정자인 궁극적 실재, ‘존재자체’가 스스로를 드러내 보여주지 않는 한, 상징창조의 주체가 집단의 무의식이라 하더라도 상징창조는 불가능한 일이다. 종교적 상징은 무한정자의 자기 계시와 이에 대한 인간의 계시경험에 의거하여, 또 이를 경험한 다수집단의 ‘무의식’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집단의 계시경험이 상징을 잉태시키고, 집단 무의식이 낳아 기르는 것이다. 종교적인 상징은 계시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종교적 상징은 어떠한 경우에도 의식적으로 만들어지거나 창조될 수 없다.
이러한 측면에서 상징은 그 지시하는 대상에 참여하는 동시에 상징대상은 상징에 참여함으로써 상징이 죽지 않고 대리의 역할을 감당하도록 한다. 틸리히는 “종교적인 상징은 ‘양날의 칼’이다. 종교적인 상징은 그것이 상징하는 무한한 것에 우리의 주의를 향하게 하면서 동시에 그것이 무한한 것을 상징할 때 사용하고 있는 유한한 것에 우리의 주의를 향하게 하고 있다. 종교적인 상징은 무한한 것을 유한성의 자리로 끌어내리고 있고 유한한 것을 무한성의 자리로 끌어올리고 있다. 종교적인 상징은 신적인 것을 인간적인 것을 향해 개방해주고 인간적인 것을 신적으로 개방해준다.”라고 주장한다. 즉 상징과 상징대상은 서로에게 개방되고 참여한다.
매개체인 상징은 ‘존재자체’를 드러내는 역할이 가능하도록, 동시에 ‘상징대상’이 상징에 참여하도록 자기부정을 한다. 틸리히에 따르면 “만일 어떤 계시가 자신을 상실하지 않고 자신을 부정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궁극적인 계시이다. 이러한 역설은 모든 계시가 매개체에 의해서 조건 지워져 있다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모든 계시는 매개체 안에서 그리고 이 매개체를 통해서 나타날 수 있다.(중략) 곧 계시의 매개체가 자신의 유한한 조건들을 희생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유한한 조건들을 극복하고 이로써 그 조건들과 함께 자신을 극복할 수 있는지의 문제이다.” 즉 매개인 상징은 완전한 투명성으로 자기를 부정함으로 지시의 대상을 드러낸다. 상징은 매개로서 상징대상에 참여하고 유지된다. 나아가 종교적 상징은 상징대상과 관계에서 인식의 도구로서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상징대상의 힘이 나타날 수 있도록 매개한다.
마지막으로 ‘상징의 참여성’을 다섯 가지로 정리해보자. 첫째로 ‘인과적 참여’이다. 이는 결과인 상징이 원인인 상징대상에 참여함으로 상징은 원인의 힘을 소유한다. 둘째로 ‘포괄적 참여’다. 상징이 포괄하는 것과 존재의 관계를 말해준다. 이는 원인이 결과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는 신이 피조물에 참여하는 것으로 적용할 수 있으므로 ‘창조적 참여’라고 할 수 있다. 셋째 ‘수용적 참여’다. 이는 상징과 상징대상관계에서 서로가 참여할 때, 참여자는 참여 대상에 늘 개방되어있음을 말한다. 넷째 ‘상황적 참여’다. 기호는 환경과 상관없이 약속에 의해 만들어지지만, 상징은 그 환경과 분리할 수 없다. 인간은 상징에 의미를 부여하는 환경에 참여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개별자가 된다. 마지막으로 ‘본질적 참여’다. 본질적 참여는 상징이 상징대상과의 본래적 유사성을 지닌다는 사실에 대한 근거를 마련해준다. 상황적 참여가 상징이 지니는 언어 외적인 의미를 설명해준다면, 본질적 참여는 상징이 지니는 본래적 유사성을 말해줄 수 있다.
3-3. 상징의 힘
상징의 힘은 존재론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왜냐하면 존재론적 문제점을 극복해가 하는 것이 ‘상징의 힘’이기 때문이다. 틸리히의 존재론의 출발점은 형이상학적 충격, 곧 비존재의 가능성에 대한 충격의 경험이다. 그는 자신의 존재론을 네 가지 차원으로 전개한다. 첫째 존재의 근본구조이다. 이는 주체와 객체를 이루는 자아와 세계의 구조이다. 둘째 존재의 구성이다. 존재는 개체화와 참여, 역동성과 형식, 자유와 운명으로 대별되는 양극구조이다. 셋째 존재의 실존상태이다. 이는 자유와 운명, 존재와 비존재, 본질과 실존의 혼합구조이다. 넷째 무엇이 존재와 사유를 규정하는가? 바로 틸리히는 칸트의 범주 개념을 빌려서 시간, 공간, 인과율, 그리고 실체로 파악한다.
인간은 유한성에 갇혀서 존재에 대해 탐구하기에 무한한 ‘존재자체’가 무엇인지 물을 수밖에 없다. 틸리히는 ‘존재자체’에 대한 물음을 가능케 하는데 세 가지 요인이 있다고 본다. 첫째는 존재의 유한한 구조 내에 이미 무한정적인 요소가 현존하기 때문이다. 둘째로 비존재가 위협하기 때문이고 마지막으로 양극적 존재구조가 대립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존재자체’에 대한 질문은 가능하더라도, 인식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존재자체’는 상징을 통해서만 인식할 수 있다.
‘존재자체’에 대한 상징적 인식은 ‘존재자체’의 힘에 대한 경험이다. 상징의 전제는 오직 ‘존재자체’의 힘에 대한 경험에서 비롯된다. 틸리히에 따르면 “종교적 상징은 모든 다른 차원과 모든 다른 심층의 기반이 되는 차원이며, 따라서 다른 차원 곁에 있는 한 차원이 아니라 근본적인 차원, 모든 다른 차원보다 깊은 곳에 있는 차원, 존재 자체의 차원, 또는 궁극적인 존재의 힘이다. 종교적 상징들은 인간 영혼 속에 있는 이러한 심층 차원의 경험을 개방한다.” 대표적인 예가 ‘용기’이다. 존재의 갈등구조를 극복하는 용기는 ‘존재자체’에 의하여 부여되는 ‘힘’이다. 종교적 상징은 ‘참여’를 통해 부여되는 상징의 힘을 통해서 존재할 수 있다. 나아가 종교적 상징은 ‘존재자체’에 의한 힘을 전달한다. 종교적 상징이 의식 될 때에는 ‘존재자체’의 힘을 경험하고 ‘용기’를 갖게 되는 순간이다. 이로써 종교적 상징은 존재의 양극구조를 초월하는 종교적 능력을 가능케 한다.
4. 종교적 상징의 의의
4-1. 사회적 의의(통합과 희망)
틸리히의 종교적 상징론의 신학적 의의를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하여 볼 수 있다. 첫째로 사회적 의의이다. 틸리히의 상징론은 종교적 영역과 문화적 영역의 이원화를 막고 통합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며, 현대사회의 희망을 매개하는 역할을 한다. 틸리히는 요한계시록에 근거하여 “하늘의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없는데 그 까닭은 하나님이 모든 것 안에 모든 것으로 계시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세속적인 영역과 종교적인 영역이 같은 범주에 속해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이 둘은 넓은 의미의 종교에서, 같은 궁극적인 관심의 체험에 뿌리박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적 상징은 종교적 영역뿐만 아니라, 사회적, 문화적 영역과 관련이 있다. 실례로 틸리히는 독재자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사회주의의 결단”이란 글을 쓴 것이 있다. 이 때,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를 대항하기 위한 전제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상징’이다. 상징이 아니고서는 사회주의 운동이 대중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힘이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상징은 종교적 영역을 넘어 문화적 영역에 영향을 미치므로 두 영역의 통합을 이룰 수 있게 된다.
또한 폴 틸리히의 종교 이해는 기회주의와 이상주의로 인해 진통을 겪는 서구의 현대사회에 대안을 제시한다. 기회주의는 영원한 의미를 현실화시키는 수평성에 치우쳐 있으며, 이상주의는 영원한 의미 자체를 지칭하는 수직성에 치우쳐 있다. 이 때, 지배계층은 기회주의에 영향을 받고, 소외계층은 이상주의에 영향을 받는다. 이러한 영향은 결국 민주사회 안에서 독재자의 출현을 야기한다. 독재자의 출현에 저항할 수 있는 대안이 종교이다. 왜냐하면 종교는 이상주의의 유토피아 사상을 거부하지만, 희망을 파괴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기회주의의 수평성과 이상주의의 수직성을 통합하도록 매개하는 것이 바로 상징인 것이다. 이렇게 상징은 희망을 매개함으로서 대립되는 존재 양태를 한 쪽으로 일원화하지 않으며, 역설적으로 통합시키고 통전적으로 이해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즉, 종교적 상징이 희망을 매개함으로 서구의 현대사회가 바른 민주사회로 가는 길을 제시하는 문화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일례로 틸리히에 따르면 “하나님 나라는 완전한 통일성 속에 있는 궁극적 계시와 궁극적인 구원에 대한 상징이다.”
4-2. 종교적 의의(세속화와 우상화 극복)
두 번째 의의로 종교적 의의이다. 틸리히의 종교적 상징론은 종교 안의 우상화와 세속화를 극복하는 대안이 된다. 성서를 우상화하는 것을 살펴보면, 먼저 성서를 사건과 언어로 보는 것이 있다. 그러나 성서를 상징으로 보지 않고, 사건과 언어로 보는 것은 열광주의에 빠지게 만들며, 종교적 체험을 불가능하게 한다. 성서는 존재 자체인 하나님의 무한정성을 드러내는 책이기에, 유한한 존재의 구조가 아닌 상징을 통해서만 전달이 가능한 것이다. 또 개신교 정통주의 안에서 “문자주의”에 입각한 성서해석이 있다. 이 또한 “타율성”에 의한 문자 그대로의 이해로 인해 우상화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배타적 환원주의의 문제가 있다. 이는 타종교의 독특성을 이해하지 않고, 개별 종교의 전통과 교리를 기준으로 타종교를 비판하는 것이다. 이 역시 종교 현상 자체를 우상화하는 일이 발생하게 된다.
반면에 개신교 인문주의 안에서 “비신화화”를 통해 성서를 해석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자율성”을 주장하며 성서의 초월적 특성을 제거하여 세속화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세속적 환원주의라는 문제가 있다. 세속적 환원주의는 종교를 사회학, 심리학, 및 제 사회과학의 방법으로 세속화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세속화는 종교와 현실을 뗄 수 없다는 장점이 있으나, 종교가 이데올로기나 황홀체험 등으로 간주되어 종교의 초자연적인 요소를 잃게 된다. 이처럼 종교 안의 우상화와 세속화에 대한 많은 문제들이 있다.
이 때, ‘상징’은 성서를 사실이나 언어자체로 보지 않게 하며, 정통주의와 보편주의의 자율성과 타율성 사이에서 신율적이라는 특징을 갖게 된다. 이를 통해 개신교 정통주의와 인문주의의 갈등을 극복하고 ‘개신교 보편주의’의 길을 열 수 있다. 또 상징은 종교를 사회학문과 동일한 것으로 보지 않게 하되, 개별 종교의 정통과 교리로 타종교를 제단하지 않도록 그 역할을 할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상징은 우상화와 세속화를 극복하는 대안이다.
4-3. 문화적 의의(현대와 소통/ 타문화와 소통)
틸리히의 종교적 상징론의 세 번째 의의는 문화적 의의이다. 상징은 현대 그리고 타문화와 소통을 할 수 있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현대를 하나의 수단이나 하나의 언어로 파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양한 수단과 언어를 통해 현대를 파악할 수 있다. 논리실증주의자들, 상징적 논리자들, 논리학자들의 수고가 현대의 소통에 기여하고 있으나, 문제는 그 틀이 너무 좁다는 점이다. 이러한 틀로써는 삶의 근원적인 깊이를 수용할 수 없다. 즉, 현대는 분명한 하나의 언어의 틀을 갖고 있지 않다. 또한 현대 문화뿐만 아니라 타문화와의 소통의 문제가 있다. 오늘날의 신학은 서구전통의 관념과 합리적 언어에 기초한 신학이다. 그러나 여러 지역과 민족들의 문화는 서구전통의 문호와 같지 않다. 이러한 문화의 차이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 있는가? 이에 대한 질문에 ‘상징’이 응답할 수 있다.
다양한 언어와 수단 중 어떠한 것을 선택하여 사용하더라도, 현대 신학계의 신학적 의도를 설명하는 데는 여전히 부족함이 있다. 반면에 종교적 상징은 단의적이지 않고, 다의적 표현 기능을 갖고 있다. 의미표현의 다원성은 상징이 기능하는 특유한 성질로서, 여러 가지 다양한 의미 그러나 그 의미들이 내적 의미면에서 서로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 통하고 일관성을 지닌 연속성 및 동시성의 의미표현 기능을 갖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래적 의도를 전하는 것과, 그리고 다양한 의미를 표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상징’은 현대문화에서 효과적인 소통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타문화에서도 상징은 그 역할을 한다. 여러 지역과 민족들은 “집단적 무의식”에 의한 상징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그 지역 사람들의 삶을 규정하는 규범이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상징이 생명력을 갖고 있다면, 상징 자체는 다른 외부의 힘에 의해 제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지역의 상징체계를 받아들인 다는 것은, 그 지역사회의 자율적 문화를 받아들인 것이다. 이를 통해 상징은 타문화의 상징체계와 적극적으로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그러나 상징 자체가 스스로를 부정하지 못해, 지시하는 바를 드러내지 못한다면, 예언자적 비판으로 상징을 대해야한다.
5. 나가는 말
지금까지 우리는 틸리히의 종교적 상징의 의미와 정당성, 특징, 의의에 관하여 살펴보았다. 틸리히는 인간이 유한한 구조 안에서 무한한 ‘존재 자체’를 인식하는 유일한 방법으로 ‘상징’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존재 자체’로부터 발생한 상징은 감추어진 실재의 차원을 개방하는 역할을 한다. 변증법적 상관관계를 가진 상징은 상징대상을 표현한 다는 점에서, 상징대상에 의해 긍정되지만, 그 문자적 의미는 상징대상에 의해 부정되는 양극성을 가진다. 그러므로 상징은 자기부정성을 가지고 상징대상을 가리킬 때 상징으로서 기능하며, 상징이 지시하는 실재에 참여(의지)함으로 참된 상징이 된다. 상징대상 또한 상징에 참여하는데, 이러한 상호 참여는 무한한 것이 유한한 것을 개방함과 동시에 유한한 것이 무한한 것을 개방함을 뜻한다. 이 과정에서 상징이 실재에 참여하는 ‘존재 자체’의 힘에 대한 경험으로부터 상징대상의 힘을 매개하는데, 이러한 상징의 힘은 존재론적 문제점을 극복하게 한다. 그러므로 종교적 상징은 존재의 힘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상징은 ‘존재 자체’에 대한 이해에 높은 기여를 하며,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갈등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 된다. 상징은 종교와 문화의 이원화를 막고 희망을 매개하는 사회적 역할, 종교의 우상화와 세속화의 극단으로 치우치지 않고, 보편주의의 길을 만드는 종교적 역할, 의미표현의 다원성을 활용하여 현대 문화와의 소통을 하고, 타문화의 상징체계를 받아들이므로 타문화와 소통을 하는 문화적 역할을 하게 된다. 신화뿐만 아니라 모든 영역에서 사용된 상징에 관한 정확한 이해와 활용은 궁극적 관심인 ‘존재 자체’를 가장 잘 인식하게 할 뿐만 아니라, 상징에 대한 오해와 적절한 답안을 찾지 못해 답답함을 겪는 영역에 도움을 줄 것이다.
참고자료
-폴 틸리히, 『조직신학Ⅰ』, (유장환 역, 서울: 한들출판사, 2001)
-폴 틸리히, 『조직신학Ⅱ』, (유장환 역, 서울: 한들출판사, 2001)
-폴 틸리히, 『믿음의 역동성』, (최규택 역, 서울: 그루터기하우스, 2005)
-폴 틸리히, 『문화의 신학』, (남정우 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6)
-최인식, 『틸리히의 상징론』, 신학사상(제90집), (한국신학연구소, 1995)
-황민효, 『폴 틸리히의 신학Ⅰ』,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2008)
-김경재, 『폴 틸리히 신학연구』, (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2009)
-윤동철, 『폴 틸리히의 종교 사회주의와 프로테스탄트 원리』, 신학논문총서 조직신학 22, (서울: 학술정보자료사,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