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회퍼의 교회론
1. 들어가는 말
디트리히 본회퍼의 삶과 신학은 교회에 대한 관심을 일관성 있게 보여준다. 그의 교회에 대한 관심은 그의 전 생애를 통해 선명하게 나타난다. 그는 어려서부터 종종 죽음, 영생 등 영적인 문제들에 깊은 관심을 가졌고, 형제들 혹은 친구들과 신학적 주제를 가지고 토론하기를 매우 좋아했다. 또한 성경을 읽고 공부하는 것에 상당한 시간을 들였으며, 다른 가족들에 따르면 “내가 교회를 개혁할 거야!”라고 소리치며 신학을 공부하고 연구하는 것에 매진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신학을 공부하기로 결정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그의 형 발터의 죽음으로 알려져 있다. 발터의 죽음으로 인해 본회퍼에게 죽음은 더 이상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잔인한 현실이 되었다. 신학을 공부하겠다는 결단과 함께 그의 삶은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했다.
본회퍼의 첫 학위 논문인 「성도의 교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그는 사회 안에서의 교회의 역할에 대한 생각을 분명하게 밝힌다. 본회퍼에 따르면, 교회가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진정한 공동체가 될 때,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것은 하나님과 더불어, 그리고 교회와 더불어 교제하며 사는 것을 의미한다.” 그의 이런 생각은 1930년에 유니온 신학교에서 사회정의라는 미국인들의 개념을 접하면서 더욱 강화되었고, 그 결과 그는 나치주의에 반대하고 유대인들을 지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유니온 신학교에서의 흑인들과의 교제 역시 그가 인종차별과 반유대주의에 대해 깊이 고찰해볼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본회퍼는 신학을 공부하면 할수록 그의 마음이 교회정치로 기울어짐을 느꼈고, 결국 정치적으로 히틀러에 대항하는 길을 선택했다. 그의 마음에 히틀러와 나치정권에 저항하고 유대인들을 돕고자 함이 강하게 일어났다. 1933년 1월 히틀러 치하의 나치정권이 수립되자, 본회퍼는 히틀러와 나치주의에 반대하는 발언을 최초로 하며 교회투쟁에 앞장섰다. 그는 교회가 국가에 의해 박해받는 사람들을 도와야한다고 주창했다. 특히, 유대인들을 돕고, 필요하다면, 국가에 저항하는 행동을 하는 것이 교회가 갖는 책임이라고 주장했다. 본회퍼가 바라는 교회는 ‘그리스도교적인 교회’였다. 그는 반유대주의의 결말이 비참할 것을 선견했다. 반유대주의가 불러올 결말이 궁극적으로 한 민족과 국가를 파멸의 길로 내모는 것임을 알았던 본회퍼는, 교회는 히틀러를 지지할 수 없으며 그리스도의 교회로 남아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교회는 세상의 일에 참여해야 하며 불의와 차별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고 믿었다.
지금부터 우리는 본회퍼의 삶과 신학을 관통하는 교회에 대해서 살펴볼 것이다. 첫째로 그의 초기 저작인 「성도의 교제」를 통해 교회됨에 대한 이론적 담론을 살펴볼 것이다. 특별히 그리스도론에 정초하고 있는 ‘그리스도교적 인격’, ‘윤리적 집단인격’, ‘공동체로 존재하는 그리스도’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살펴볼 것이다. 나아가 「나를 따르라」와 「윤리학」을 중심으로 교회에 대한 이론적 담론을 실천적 담론으로 발전시켜 살펴볼 것이다. 마지막으로 본회퍼 신학의 중심 문장인 ‘타자를 위해 자유로운 존재’, ‘타자를 위한 교회’를 「창조와 타락」과 「저항과 복종」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2. 교회됨의 이론적 담론
2-1. 그리스도교적 인격
본회퍼의 교회 이해는 인격 개념에서 출발한다. 그에 의하면, ‘인격 개념’, ‘공동체 개념’, ‘하나님 개념’은 본질적으로 연관성을 갖는다. 따라서 그는 공동체 개념과 하나님 개념을 파악하기 위해 이에 속한 인격 개념에 대한 선행연구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본회퍼는 철학적 인격 개념들 -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적 구조, 스토아, 에피쿠로스 학파 그리고 관념주의에서 말하는 인격 - 로는 교의학적 교회를 설명할 수 없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사회학적으로 접근하여 교회를 이해한다. 그는 ‘사회성’의 관점에서 인격에 대한 개념을 새롭게 규정함으로써, ‘나’와 ‘너’의 관계를 주체 대 객체의 관계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뛰어 넘어 주체 대 주체로서의 관계, 즉 주체성을 가진 개별인격들 간의 만남으로 이해했다.
본회퍼에게 있어서 인격은 ‘그리스도교적 인격’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교적 인격’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나타내는 관계적 개념이자,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역동적인 관계 형성을 의미하는 구조적 개념이다. “항상 거듭 시간 속에서 생겨나고 사라지는”, “역동적인 특징을 지니는” 인격 개념이다. 본회퍼에 의하면, ‘그리스도교적 인격’의 형성은 구체적인 장소와 구체적인 시간을 전제한다. 그는 구체적인 장소와 시간에서 타자와의 역동적인 만남을 통해서 인격이 형성된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인격 이해를 토대로 본회퍼는 ‘인격 개념’을 ‘하나님 개념’, ‘공동체 개념’과 연결시켰다. “내가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 안에서 비로소 하나님의 ‘나’를 알 수 있듯이, 타자를 아는 것도 마찬가지다. […] 그리스도교적 인격이 자신의 진정한 본질을 얻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당신으로서 그와 대면할 때가 아니라 나로서 그 안으로 ‘들어올 때’라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따라서 비록 개인과 타자는 서로 분리되어 있더라도, 혹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개인은 본질적으로, 절대적으로 어떤 방식으로든 타자와 결합되어 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일대일 관계의 도식을 놓고 볼 때, 인간은 타락한 존재이다. 아담의 죄로 인해 태초에 하나님이 형성했던 하나님과 인간의 공동체적인 관계가 깨어졌다. 따라서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여전히 깨어져 있음이 마땅하다. 그러나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가 들어오심으로 깨어졌던 관계가 회복된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깨어졌던 관계를 회복한다. ‘그리스도교적 인격’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들어오심으로써 깨어진 관계가 회복되는, 이 ‘순간’에 형성되고, 인간은 하나님과 공동체적 관계를 이루게 된다.
본회퍼는 ‘그리스도교적 인격’이 형성되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회복되는 구체적인 ‘순간’이라는 현실을 ‘책임 개념’과 연결시킨다. 본회퍼에 의하면, “순간은 구체적인 시간이다. 그리고 오직 구체적인 시간 속에서만 윤리의 진정한 요구는 실행된다. 그리고 오직 책임 가운데서만 나는 내가 시간에 매여 있다는 사실을 완전히 의식한다. […] 시간 속에 있고 특수한 상황 속에 있는 구체적인 인격인 나를 이 당위성과 관련을 맺고 윤리적 책임을 짐으로써, 나는 시간의 실재 안으로 들어간다.” 인격적 관계 형성의 주체인 “하나님” 혹은 “성령”은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가 회복된 한 개인에게 ‘책임’이라는 ‘윤리적 결단’을 요청한다.
2-2. 윤리적 집단인격
‘그리스도교적 인격’은 하나님과 아담,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한 인간 사이의 깨어진 공동체적 관계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가 들어오심으로 회복된 상태다. 본회퍼는 ‘그리스도교적 인격’ 개념을 통해서, 교회는 역동적이고도 구체적인 순간 속에서 하나님과의 만남과 회복을 경험한 인간에게 ‘책임’이라는 윤리적 결단이 요청되는 곳이라고 주장한다.
아담은 전체 인류를 대표한다. 따라서 모든 개인은 아담이다. 모든 개인은 자신임과 동시에 아담이기도 한, 이중성을 갖는다. 하나님과 한 인간(아담) 사이의 관계를 ‘그리스도교적 인격’ 이해를 통해 설명한 본회퍼는 하나님과 공동체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윤리적 집단인격’을 말한다. ‘집단인격’이 그리스도교적 인격 개념에서 설명한 ‘한 개인’처럼 이해되는 것이다. 즉, 한 개인이 모여 형성된 다수가 된 공동체 속에서 개개인마다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교적 인격’들이 모여 ‘하나’의 형태가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한 개인에게 요청되는 ‘책임’이라는 윤리적 결단이 한 공동체에게도 요구되는 것이라고 본회퍼는 말하고 있다. 그리고 결국 본회퍼가 말하는 윤리적 집단인격을 가진 공동체는 교회다.
2-3. 공동체로 존재하는 그리스도
본회퍼의 교회 이해는 그리스도 이해와 나눠서 생각할 수 없다. 왜냐하면 죄로 인해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길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의 죽음은 개인들을 분리한다. […] 부활의 빛 안에서 십자가의 공동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의 공동체로서 의롭다고 인정을 받고, 거룩하게 된다. 새로운 인류는 하나의 지점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응집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의 대리 행위 안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교제를 다시 회복하듯이, 인간의 교제도 사랑 안에서 다시 실현되었다.”
본회퍼에 의하면, “교회는 ‘공동체로서 존재하는 그리스도’이다. […] 교회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부활했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교회는 목적을 위한 수단만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목적이기도 하다. 교회는 현존하는 그리스도 자신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과 ‘교회 안에 있다’는 말은 같은 말이다.”
태초의 창조 안에 담긴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의도는 인간과 올바른 공동체적 관계를 맺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는 죄를 지음으로 인해 깨어지고 말았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올바른 공동체적 관계가 훼손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과 인간의 깨어진 공동체적 관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창조의 모습대로 회복된다. 본회퍼는 이를 ‘교회의 실재화’라고 규정했다. 그는 ‘교회의 실재화’를 교회의 현실을 설명하기 위한 전제로 삼았고, 교회의 현실은 ‘그리스도교적 인격’과 ‘윤리적 집단인격’ 개념을 융합시킨 ‘공동체로 존재하는 그리스도’ 개념으로 설명한다. 다시 말하면, 본회퍼의 교회 이해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회복되는, ‘공동체로 존재하는 그리스도’로 실재함을 의미한다.
2-4. 교회의 활성화
본회퍼의 교회 이해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공동체적 관계를 회복하는 상태라고 규정되는 ‘교회의 실재화’에서 더 나아가 교회 내의 성령의 활동을 설명하며 ‘교회의 활성화’ 개념을 전개한다. ‘교회의 실재화’가 본회퍼의 교회 이해의 그리스도론적 접근이라고 한다면, ‘교회의 활성화’는 본회퍼의 교회 이해의 성령론적 접근이라고 볼 수 있다. 성령은 교회에서 세 가지 형태로 활동한다. 다시 말하면, ‘교회의 활성화’는 성령의 세 가지 사회학적 관계인 영의 다양성, 영의 교제, 영의 일치에 관한 것이다.
1) 영의 다양성
교회 공동체는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개별적인 인간들로 구성된다. 따라서 교회에서 성령이 활동하는 형태로서 영의 다양성은 하나님과 교회 성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성도들 사이의 다양한 관계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2) 영의 교제
영의 교제는 교회 안에서 하나님이 새로운 관계들을 창조하는 것을 의미한다. 본회퍼에 의하면 성령을 통해 이루어지는 영적 교제는 ‘사랑’이다. 이때 ‘사랑’은 그리스도교적 사랑으로, 성령이 인간의 마음 속에 넣어준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해된다.
“많은 인격이 서로에게 부단히 헌신함으로써 새로운 인격이 실현되며, 이와 함께 ‘새로운 인격들의 교제’가 실현된다. […] 자신의 생명을 잃기를 원하는 자는 생명을 얻을 것이다. 오직 그리함으로써 이웃을 향한 하나님의 뜻에 헌신하는 인격들의 삶은 참으로 하나님이 만든 성도들의 교제로 인도한다. 각자는 하나님의 도구로서 그 실현을 위해 봉사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교적 사랑의 교제로서 사회학적으로 독특한 구조가 생겨난다. 곧 성도들 상호 간의 사랑 속에서 ‘교제’ 자체가 목적이 된다.”
본회퍼는 교회 공동체가 성령을 통해서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교회 이해를 그리스도론적으로만 보려고 하지 않고, 성령론적 이해까지 전개하여 성도의 교제를 성령을 통해 이루어지는 사랑의 교제로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사랑의 교제의 구체적 행동양식으로 ‘공존’과 ‘대리’를 설명함으로써 기독교 윤리학적 담론으로 발전시킨다. ‘공존’은 서로 함께 있으면서 모든 것을 서로 함께 나눔을 의미한다. ‘대리’사상의 핵심은 그리스도인으로서 타자를 위한 그리스도가 되는 것으로, 타자를 위해 자기를 포기할 수 있어야 함을 강조한다.
3) 영의 일치
“우리 모두에게 몸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요, 주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과 아버지는 한 분이시다.(엡4:4ff., 고전2:13, 롬12:5) 은사는 많으나 성령은 하나요, 직무는 많으나 주도 하나요, 능력은 많으나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고전12:4ff.).
본회퍼는 영의 일치를 성령의 일치로 보며, 위로부터 아래로, 즉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교회 공동체에게 부여하는 집단인격의 일치로 본다. 그리고 그는 “교회의 인격적 일치는 공동체로 존재하는 그리스도”라고 말함으로써, 이러한 일치됨의 연속이 성령을 통해서 활성화된다고 주장한다.
3. 교회됨의 실천적 담론
본회퍼는 「성도의 교제」를 통해서 교회의 실재에 대한 이론적 토대를 설명했다. 그는 아담이 대표하는 타락한 인류, 타락한 집단인격과 대비되는 존재로 교회를 소개했다. 그리스도교적 인격을 가지고, 윤리적 집단인격을 형성하는 교회는 타락한 인류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이다. 본회퍼는 「성도의 교제」의 교회됨을 「나를 따르라」에서 제자됨으로 이어간다. 즉 본회퍼는 교회에 대한 이론적 담론을 구체적인 실천적 담론으로 발전시킨다. 나아가 「윤리학」을 통해 제자된 삶, 그리스도를 대리하는 교회의 삶을 ‘책임’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이론적 담론에서 실천적 담론으로 넘어간 교회됨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 교회가 아닌, 보이는 교회로서 역할을 감당한다. 교회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현실을 이루어가는 가시적 공동체가 된다.
3-1. 교회됨과 제자됨
본회퍼 교회론의 핵심 개념인 ‘공동체로 존재하는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의 부름에 응답하는 제자의 삶과 분리할 수 없다. 본회퍼가 말하는 ‘그리스도교적 인격’은 그리스도의 부름에 응답하는 제자의 삶으로만 증명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공동체를 이루는 ‘교회됨’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결속을 통한 진정한 ‘제자됨’을 통해 이 땅에서의 제자에게 부여된 책임, 믿음의 순종이라는 개념을 마련한다.
본회퍼는 예수의 부름에 대한 단순한 순종을 주장한다. 그것이 제자의 반응이다. “예수의 부름은 이 모든 것을 돌파했고, 순종을 이끌어냈다. 예수의 부름은 하나님 자신의 말씀이었다. 단순한 순종이 요구되었다.” 예수의 부르심 앞에 인간적인 판단과 기준은 모두 합리화를 일으킬 뿐이다. 그저 단순한 순종만이 제자의 삶을 시작할 수 있다. 순종에서부터 시작한 제자의 삶은 필연적으로 십자가와 마주한다. “그리스도가 오직 고난을 받고 버림을 받는 자로서만 그리스도이듯이, 제자도 오직 고난과 버림을 받은 자로서만, 오직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로서만 제자다.” 제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동참해야만 제자이다. 십자가는 제자들에게 ‘필연적 고난’이다. 이것을 막아서는 모든 것은 ‘악마적인 세력’이다.
제자에게 주어지는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부르심에서부터 시작된다. 즉 이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으로 제자의 고난은 시작되고 이웃의 죄악을 함께 짊어짐으로 제자의 십자가는 온전해진다. “그리스도인은 남들을 위해 죄와 잘못을 지는 자가 된다. 만약 모든 죄를 지는 자가 그리스도인을 친히 지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인은 죄 아래에서 무너질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죄를 용서함으로써 자신에게 지워진 죄를 그리스도의 고난의 힘으로 극복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와 같이 타인의 죄를 위해 고난을 받는다. 하지만 제자는 그리스도를 힘입어 모든 것을 극복한다. 왜냐하면 이미 예수가 모든 죄를 짊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즉 교회는 이웃을 짊어지고,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를 짊어진다.
김성호에 따르면 “본회퍼의 제자됨의 인식은 그가 「성도의 교제」에서 말한 ‘교회의 현실’의 구체적 양태이다. ‘그리스도와 결속’함으로써 우선 ‘그리스도교적 인격’을 형성하고, 수동적이지만 필연적인 고난을, 예수의 십자가의 수난을 은혜와 기쁨으로 이 땅위에서 대리함으로써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의미로 ‘책임’을 수행한다.” 이제 본회퍼의 제자됨은 더욱 더 구체적인 윤리적 삶으로 나아간다. 교회를 ‘윤리적 집단인격’으로 설명했던 것처럼 제자의 삶을 살아가는 교회의 모습은 윤리적 과제에 직면하게 된다.
3-2. 제자됨과 책임적 삶
본회퍼에게 교회는 하나님의 현실이 이루어지는 ‘장(場)’이었다. 즉 그가 「행위와 존재」에서 계시의 존재방식을 교회로 보았듯이, 하나님의 현실이 세상의 현실 가운데 존재하는 곳이 교회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계시성을 계승한다. 본회퍼는 윤리를 ‘하나님의 현실’로 보았다. “그리스도교 윤리의 문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 계시의 현실이 피조물 가운데서 실현되는 것이다.” 그래서 계시인 교회는 계시의 현실인 윤리를 마주한다. 이제 교회는 그리스도의 윤리적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위임(Mandat)’했기 때문이다. 교회는 가정을 향한, 정부를 향한 하나님의 현실을 모두 위임받는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과 하나님의 현실을 화해시키고 교회는 하나님의 현실을 위임받아 실천한다. 위임은 교회의 윤리적 삶에 대한 당위성이다.
교회가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윤리적 삶을 실천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인간의 참된 삶을 형성하는 것이다. 교회는 예수의 성육신과 십자가와 부활을 본받는다. 이는 예수를 닮으려고 노력함으로 가능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우리에게 작용함으로서, 즉 그리스도의 형상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우리에게 각인됨으로 가능해진다. 즉 윤리의 주체도 계시의 주체와 동일하게 위로부터 시작된다.
교회는 예수의 성육신과 같이 이 세상의 타자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공감을 갖는 존재가 된다. 즉 현실적인 인간이 된다. 나아가 십자가를 통해 교회는 매일 죄인임을 깨닫고 은혜를 구해야한다. 이 은혜는 교회에게 값비싼 선물이며 삶에 주어진 과제이다. 마지막으로 교회는 부활을 통해 ‘새로운 인간’이 된다. 오직 부활을 통해서만 새로운 존재가 된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모방하는 것이 아닌, 인간 안에서 취하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이다. 그래서 교회는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의 새로운 ‘몸’이다.
교회의 윤리적 삶은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현실이 어떻게 실현되어 가는가에 대한 질문이며 그리스도의 삶에 응답하는 대리적 삶으로 귀결된다. 본회퍼는 「성도의 교제」에서 그리스도와 인간의 현실 사이를 대리하는 공동체를 교회라고 말했다면, 이제 그리스도의 삶을 대리하는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담론을 이끌어간다. 그리스도의 대리적 삶을 살아가는 교회는 타인에 대해 책임적인 삶으로 나아간다. 본회퍼에 의하면 “모든 인간의 책임의 근원은 인간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대리하심에 있다. 책임적 행동은 대리적 행동이다” 대리와 책임의 삶은 항상 함께 간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의 모든 죄를 책임지는 존재로 성육신했기 때문이다. 교회가 대리할 그리스도의 책임의 내용은 사랑이며 그 형태는 자유이다. 이는 예수의 성육신이다. 예수는 성육신을 통해 교회가 그리스도를 대리하기 이전에 그리스도로서 참 인간을 먼저 대리해주셨다. 교회의 책임적 삶은 이런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대한 응답이다. 교회는 오늘날 현실에 적합한 삶을 날마다 그리스도께 물어보며, 나아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같이 타인의 죄책에 대한 책임적 삶을 살아간다. 이는 본회퍼의 핵심 명제 중 하나인 ‘타자를 위한 교회’를 가능케 한다.
3-3. 실천적 담론과 가시적 교회
책임적 삶을 살아가는 교회는 세상을 향해 ‘산 위의 마을’이 되어야 한다. 타자에 대한 책임적 삶은 가시적 교회의 형태로 세상에 드러날 수밖에 없다. 본회퍼에 의하면 “교회의 가시성은 성화의 결정적 표지다. 교회가 세상 안에서 공간을 요구하고 이로써 세상의 공간과 구분되는 경계선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교회가 성화의 상태 속에 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교회는 하나님이 이 땅에 친히 세우신 산위의 마을이다. 교회는 그 자체로서 봉인된 하나님의 소유다. 그러므로 교회의 ‘정치적’ 성격은 자신의 성화에 필연적으로 속해 있다. 교회의 정치윤리는 오직 성화에 근거해있다. 세상은 세상이고 교회는 교회다. 그러나 교회는 땅과 그 속에 있는 것은 주의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온 세상에 전해야한다. 이것은 교회의 정치적 성격이다.”교회의 가시성은 세상에 대한 교회의 분리를 의미한다. 본회퍼는 당시 히틀러 지배하에 있던 세상의 독재에 대항하여 교회의 분명한 분리를 강조한다.
하지만 가시적 교회는 세상과 대항하는 동시에 세상 안에 서 있다. 그렇기에 교회는 세상 안에서 세상과 분리되어 그리스도의 대리적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그래서 교회는 성소공동체이다. “교회는 세상의 삶 한 가운데로 들어가서, 그리스도를 위한 공간을 획득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은 더는 세상과 죄와 율법의 지배아래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새로워진 공동체 안에서 세상의 율법은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의 형제 사랑의 영역은 세상 아래 있지 않고, 그리스도 아래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뒤따름으로 진정한 세상과의 분리를 통해 그리스도의 몸을 세상에서 회복한다.
교회는 세상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는 가장 최전방에서 세상과 싸우기 이함이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주신 세상의 재물 때문이 아니고, 세상의 행로에 대한 책임 때문도 아니다. 인간이 된 그리스도의 몸 때문이고, 교회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 까닭은 세상을 선두에서 공격해야하기 때문이다.[…] ‘세상에 낯선존재’라는 사실을 완전히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러나 이런일은 오직 교회에 속한 지체라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만 가능하다.” 교회는 세상에서 ‘낯선존재’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세상과 전혀 다른 삶으로 아담의 타락한 인류에 대항하는 윤리적 집단인격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회퍼는 교회는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대리적 책임적 삶을 수행할 수밖에 없는 가시적 공동체임을 강조한다.
4. 타자를 위한 존재에서 타자를 위한 교회로
4-1. 타자를 위해 자유로운 존재
본회퍼는 인간이 ‘자유로운 존재’로서 하나님을 닮았다고 이해한다. 그러나 본회퍼에 의하면 “어떤 인간도 그 자체로 자유롭지 않다. […] 자유는 인간의 특질이 아니며 어떤 깊이에서 찾아낼 수 있는 능력이나 소질이나 본질에 속한 것이 아니다. […] 자유란 다만 하나의 관계일 뿐이며 그 밖의 아무것도 아니다. 다시 말하면 자유란 양자 사이의 관계이다. 자유로운 존재는 곧 ‘타자를 위해 자유로운 존재’이다. 왜냐하면 타자가 나를 자기에게 속박하였기 때문이다. 단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나는 자유로운 것이다.” 즉 인간은 그 자체로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관계에서 자유롭다. 피조물인 인간은 남자와 여자로 지음 받았다. 인간은 관계에 속박되었고 ‘타자를 향한 지향성’ 속에서 자신의 피조성을 확인한다. 본회퍼에게 자유는 스스로를 위해 스스로 만끽하는 그 어떤 것이 아니라, 타자를 위해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향유하는 것이다. 자유롭다는 것은 곧 ‘타자를 위해 자유로운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피조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자유하다. 본회퍼는 하나님의 형상을 관계의 속성으로 해석하며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유비를 ‘관계의 유비’(analogia relationis)로 해석한다. 관계는 선물이다. 하나님도 스스로 ‘인간을 위한 존재’가 되신다. 하나님은 스스로의 자유를 인간에게 속박하시고 스스로 수여하신다.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 스스로 존재함을 포기하신다. 관계의 유비는 오직 하나님이 맺어주신 관계 속에서만 유비가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맺어주신 관계만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자유함 속에서 성립되기 때문이다. “둘이 더불어 있음(Zweiheit)속에 있는 인간, 즉 남자와 여자는 하나님의 형상 속에서 붙박이의 세계와 생명체의 세계 속으로 창조되어졌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 대한 인간의 자유는 오직 타자를 위해 자유롭다는데 있다.”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시고 피조물을 다스리는 소명을 부여하신다. 인간은 피조물을 정복하고 다스린다. 인간은 피조물에 대해 다스리는 자유를 얻는다. 이것은 곧 피조물에게 결속되었음을 의미한다. 인간은 경작에서 자유 하지만 곧 경작지가 인간의 세계이다. 하나님 안에서 인간은 놀라운 축복 ‘자유’를 경험한다. 하지만 자유는 ‘하나님의 현실’에서 가능하다. 오직 하나님을 창조주라고 고백할 수 있는 피조물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타자를 위한 자유’를 경험할 수 있다. 태초의 남자와 여자는 하나님을 창조주로 경외하며 찬양하는 사랑의 공동체이다. 왜냐하면 태초의 남자와 여자같이 타자 속에서 피조물을 향한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열심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랑의 공동체는 가장 원초적인 교회의 형태일 것이다.
4-2. 타자를 위한 교회
태초의 ‘타자를 위해 자유로운 존재’는 죄로 인해 그 속성을 상실하지만 그리스도로 인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타자를 위한 존재’라는 정체성을 다시 회복한다. ‘타자를 위한 존재’는 그리스도교의 인격인 개인이다. 이것은 나아가 윤리적 집단인격 안에서 ‘타자를 위한 교회’로 발전한다.
본회퍼는 「창조와 타락」에서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살도록 돕는 타자의 능력을 절대타자의 능력이 된다고 규정했다. 이런 ‘절대타자의 능력’은 하나님이 부여한 하나님의 능력이다. 본회퍼가 옥중에서 말한 ‘타자를 위한 교회’는 절대타자의 능력을 회복한 원시 공동체의 재창조이다.
본회퍼는 옥중에서 당시 독일교회의 종교화된 모습을 비판한다. 독일교회는 기계적인 하나님을 만들어놓고 기독교의 본질을 훼손하며 하나님의 현실과는 동떨어진 모습을 보여주었다. 본회퍼는 히틀러 독재에 굴복하는 독일교회를 비판하며 위로부터 하나님이 아닌 아래로부터 하나님을 강조한다. 본회퍼는 “작업가설이라는 하나님 없이, 우리를 세상에서 살아가도록 하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항상 그의 앞에 서 있는 하나님이시지. 우리는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간다네”라고 말한다. 여기서 본회퍼가 말하는 하나님은 초월적 하나님이 아닌 고난 받는 자들과 함께 고난당하시는 하나님이다. 낮아지시고 고난당하시는 하나님은 이 땅의 교회를 살아가도록 하는 ‘힘’이다. 고난당하신 하나님은 기꺼이 타자를 위해 자신을 포기하시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사랑은 교회를 살아가게 한다.
교회는 하나님으로부터 힘을 얻어 하나님의 현실을 살아낸다. 교회는 그리스도교적 인격의 집단인격으로 살아간다. 교회는 제자로서 살아간다. 제자는 그리스도를 대리한다. 제자는 그리스도와 같이 타자를 향한 책임적 존재로 살아간다. 그렇기에 교회는 ‘타자를 위한 교회’이다. ‘나와 너’의 관계 속 타자는 그리스도로 절대타자가 된다. 절대타자를 통한 하나님의 명령에서 교회는 자신의 주체성을 발견한다. 본회퍼에 따르면 “교회는 타자를 위해 존재할 때만 진정한 교회이다. 그런 교회가 되기 위해 교회는 모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야 한다.[…] 교회는 모든 직업에 종사하는 이들에게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삶이 어떤 것이며, ‘타자를 위한 존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말해주어야 한다.” 즉, 교회는 타자를 위한 존재들의 집단인격으로서 하나님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는 계시의 기능을 수행한다.
5. 나가는 말
지금까지 우리는 본회퍼의 신학에 핵심적인 주제인 ‘교회론’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본회퍼의 교회에 대한 관심은 그의 신학사상 초기부터 말기까지 모든 사상을 관통하고 있다. 흩어진 구슬도 교회라는 단어 안에서 모두 꿰어진다. 본회퍼의 「성도의 교제」를 통해 전개된 교회의 이론적 담론은 그의 차후 저작들을 통해 더욱 풍성해진다. 본회퍼의 교회론은 「성도의 교제」에 대한 주석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성도의 교제를 통해 등장하는 ‘그리스도교적 인격’과 ‘윤리적 집단인격’은 실천적 담론을 다루고 있는 「나를 따르라」에서 제자도와 그리스도의 몸 개념에 영향을 주었으며 「윤리학」에서 대리사상과 책임사상을 통해 구체적으로 세상에 드러난다. 그러한 본회퍼의 ‘교회론’은 ‘타자를 위한 교회’일 수밖에 없다.
본회퍼의 신학은 ‘교회’라는 중심 안에서 전개된다. 교회는 그리스도에서 시작하고 윤리적인 행동으로 드러난다. ‘그리스도-교회-윤리적 삶’의 도식이 본회퍼의 신학 전반에 있다. 특별히 ‘그리스도의 몸’에 관한 그의 이론은 앞의 도식을 가장 잘 대변해준다. 나아가 종래 유비적 차원에서 다루어왔던 교회의 정체성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도록 만든다. 본회퍼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은 그가 취한 새로운 인류 자체다. 그리스도의 몸은 그의 교회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자신임과 동시에 그의 교회이기도 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오순절 이래 세상에서 그의 몸, 곧 교회의 형태 안에서 살아간다. 그의 몸, 곧 십자가에서 못 박혔고 부활한 그의 몸은 교회 안에 있고, 그가 취한 인류는 교회 안에 있다. 따라서 세례를 받는 다는 것은 교회의 지체, 곧 예수의 몸의 지체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교회 안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 그 자체이다. 어떠한 유비가 아니다. 교회는 오늘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그의 현현을 대변하고 대리한다. 그렇기에 본회퍼는 삶과 행동으로 보여지는 ‘가시적 교회’에 무게중심을 더욱 두고 있으며 이러한 ‘가시적 교회’는 ‘정치적 교회’의 모습일 수밖에 없다. 본회퍼는 교회를 통하여 세상과 대치시키며 세상과 구별시킨다. 하지만 세상 밖으로 도피하는 교회가 아닌, 세상의 중심에서, 세상 안에서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역할을 감당한다. 세상에 대한 교회 자세는 그의 저서마다 조금씩의 차이가 있다. 「나를 따르라」에서는 굉장히 공격적이라면 「윤리학」에서는 방어적이다. 하지만 세상과 교회가 구별되고 분리되어야한다는 그의 전제는 늘 일치한다.
본회퍼의 ‘교회론’은 히틀러와 나치에 대항하는 특수한 상황에 대항하는 급진적인 ‘교회론’, 특수한 ‘교회론’이라고 판단해도 충분하다. 하지만 세상에 대항하는 ‘교회론’은 날마다 히틀러와 같이 ‘하나님의 현실’을 위협하는 바벨탑과 같은 세력에 대한 교회의 자세를 가르쳐준다. 본회퍼의 ‘교회론’이 전적으로 옳을 수 없다. 하지만 그의 교회에 대한 고민과 삶이 오늘날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는 것들과 타협하는 우리의 신앙에 ‘적신호’의 경고를 주는 것은 확실하다. 우리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특별계시를 계승하는 ‘공동체로 존재 하는 그리스도’임을 기억해야한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따르며, 그리스도를 대리하며, 그리스도의 삶을 보존한다.
참고자료
-디트리히 본회퍼, 『성도의 교제』 (유석성, 이신건 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0)
-디트리히 본회퍼, 『나를 따르라』 (이신건 역, 서울: 신앙과 지성사, 2013)
-디트리히 본회퍼, 『윤리학』 (강성영 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0)
-디트리히 본회퍼, 『창조와 타락』 (강성영 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0)
-디트리히 본회퍼, 『저항과 복종』 (손규태, 정지련 역,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0)
-김성호 , 『디트리히 본회퍼의 타자를 위한 교회』 (서울: 동연, 2018)
-한국조직신학회, 『교회론』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9)
-엘리자베스 라움, 『디트리히 본회퍼 : 나를 따르라』 (길성남 역, 서울: 좋은씨앗, 2004)
-김성호, 신학과 선교 제43집 『디트리히 본회퍼의 교회론적 윤리』 (부천: 서울신학대학교출판부, 2013)
-강성영, 신학연구 65 『디트리히 본회퍼의 ‘교회의 현실성’과 타자의 윤리』 (서울: 한신대학교 한신신학연구소,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