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F 무협환타지 ) 연화
하연은 링 위에 서 있었다.
사각의 철망 너머에서 함성은 파도처럼 밀려왔다.
수천의 목소리가 하나의 이름을 외치고 있었지만, 그 소리는 이상할 만큼 멀게 들렸다.
그녀의 귀에는 오직 자신의 숨소리만이 남아 있었다.
헐떡이는 숨, 갈비뼈 안쪽에서 쿵쿵 울리는 심장,
그리고 왼손 약지가 미세하게 떨리는 감각.
‘끝내자.’
그녀는 글러브를 고쳐 쥐었다.
상대는 이미 피로가 쌓여 있었다. 호흡이 흐트러졌고, 오른쪽 어깨가 내려앉아 있었다.
하연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케이지 위의 조명이 번쩍였다.
심판의 손이 내려가자마자, 하연은 반 박자 빠르게 파고들었다.
잽.
잽.
그리고 로우킥.
상대의 균형이 무너지는 찰나,
하연은 몸을 깊게 숙이며 오른손을 꽂아 넣었다.
턱을 정확히 관통한 스트레이트.
충격은 손목을 타고 팔꿈치까지 전해졌다.
상대의 눈이 풀렸고, 무릎이 꺾였다.
관중석에서 폭발하듯 환호가 터졌다.
그 순간, 하연은 이길 수 있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케이지 바깥으로 미끄러졌다.
관중석 뒤편, VIP석 위 전광판 아래.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이가 있어야 할 자리였다.
경기가 끝난 뒤, 하연은 탈의실에서 홀로 앉아 있었다.
메디컬 스태프가 상처를 확인했지만, 그녀는 거의 느끼지 못했다.
몸의 통증보다 마음속 공백이 더 컸다.
스마트폰 화면이 켜져 있었다.
문자 메시지 하나.
양육비 미납 안내
지급 기한 초과. 추가 연체 시 법적 조치가 진행됩니다.
하연은 한참 동안 그 문자를 지워보지도 못한 채 바라보다가,
조용히 전원을 껐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오늘의 승리로 받게 될 파이트머니는
아이의 다음 달 병원비와 집세를 모두 감당하기엔 부족하다는 것을.
링 위에서는 무적의 괴물이라 불리지만,
링 밖에서는 무푼의 미혼모였다.
그것이 하연의 현실이었다.
[수면계 접속형 검객 시뮬레이션]
“수면계 플레이어 모집 중입니다.”
그 광고는 우연처럼 보였지만,
돌이켜보면 너무 정확한 순간에 나타났다.
‘가상현실 검객 RPG.’
‘실전 반응 기반 전투.’
‘고위 랭커 고액 보수.’
처음엔 웃어넘겼다.
하지만 조건을 읽을수록 웃음은 사라졌다.
— 신체 반응 동기화 98%
— 감각 전이율 최대치
— 사망 시 페널티 있음
“미쳤군.”
그녀는 그렇게 중얼거리며도,
이미 지원 버튼 위에 손가락을 올리고 있었다.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하연은 강했고,
그 강함으로 돈을 벌 수 있는 곳은 언제나 전장이었다.
어떻게 이곳 가현계의 신라시대이든
링이든,
가상이든.
수면계 접속실은 첨성대와 닮아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현실의 첨성대를 복원한 뒤 그 내부를 완전히 비틀어 놓은 공간.
돌로 쌓아 올린 27단 구조,
중앙에 뚫린 사각의 창,
그리고 그 안쪽에서 은은히 빛나는 별의 문양들.
하연은 그 앞에 서서 잠시 숨을 고른 뒤,
접속 장치를 착용했다.
“접속합니다.”
짧은 기계음과 함께,
세상이 뒤집혔다.
눈을 떴을 때, 하연은 더 이상 링 위의 파이터가 아니었다.
바람이 불고 있었다.
차가운 밤공기, 흙과 돌 냄새,
그리고 하늘을 가득 채운 별들.
그녀의 발 아래에는 검은 돌바닥이 있었다.
수면계
그러나 현실에서 보던 그것보다 훨씬 거대하고,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순간,
하연의 머릿속에 낯선 정보가 쏟아져 들어왔다.
플레이어 등록 완료
코드네임: 하연
직업: 검객(미각성)
관측 대상: 28성좌
“성좌…?”
그녀가 중얼거리는 순간,
첨성대 중앙의 사각 창에서 빛이 새어 나왔다.
은빛이었다.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실 한 가닥처럼,
빛은 하연의 발치까지 이어졌다.
본능이 말했다.
— 저 길 위로 올라가라.
하연은 주저하지 않았다.
그녀는 언제나,
두려움보다 결단이 빠른 사람이었다.
한 발.
그녀의 발이 별의 선 위에 닿는 순간,
하늘의 별 하나가 깜빡였다.
그리고—
첨성대가, 깨어났다.
“여기서도 싸워야 하는군.”
하연은 입꼬리를 아주 미세하게 올렸다.
아이의 얼굴이 스쳤다.
링 위에서 느끼던 공포와 결의가 동시에 되살아났다.
다만 이번엔,
상대가 사람이 아닐 뿐이었다.
별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늘이 갈라졌고,
수면계의 첫 밤이 열렸다.
하연은 아직 몰랐다.
이 선택이
그녀를 여왕의 길로 이끌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되돌아갈 수 없는 전쟁의 시작이였다는 것을
백련문의 연무장은 새벽에도 잠들지 않았다.
희뿌연 안개가 마당 바닥을 기어가듯 덮고 있었고,
그 위로 검과 검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일정한 간격으로 울려 퍼졌다.
쇳소리는 차가웠고, 반복될수록 연무장의 공기를 단단하게 조여 왔다.
동방박사와 헤어지고
하연은 그 연무장 가장자리에 서 있었다.
검은 이미 손에 쥐어져 있었지만,
아직 한 번도 휘두르지 않았다.
날은 숨을 죽인 채, 그녀의 호흡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검이 빠르다.”
백련문 문주의 목소리는 낮고 단정했다.
그는 흰 도포를 입고 있었으나, 바람에 흔들리는 소매 아래로 드리운 그림자는
날이 선 검처럼 바닥을 갈랐다.
“그러나,”
문주는 말을 이었다.
“너는 별보다 앞서려 한다.”
하연은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대신 검을 똑바로 세웠다.
검신 위로 새벽의 습기가 맺혔고, 그 물방울이 천천히 떨어졌다.
“별이,”
하연이 말했다.
“저를 부르고 있습니다.”
그 말은 담담했지만, 물러섬이 없었다.
문주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안개 너머에서, 마치 별의 움직임을 읽듯 오래 시선을 두었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부름에 응답한 자들이,”
“모두 여왕이 되지는 못했다.”
그 말이 끝나는 순간, 연무장의 기운이 바뀌었다.
보이지 않는 경계가 그어진 듯,
공기 속에 미세한 살기가 스며들었다.
숨결조차 날을 세운 것처럼 차갑게 느껴졌다.
백련문 내부에서도—
아직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
여왕의 자리를 둘러싼 균열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하연은 그것을 느꼈다.
이 연무장은 더 이상 수련의 장소가 아니었다.
선택의 전장이었다
정오 무렵, 경주 서문이 소란스러워졌다.
먼저 느껴진 것은 소리도, 사람도 아니었다.
공기 속에 번지는 붉은 기운—
마치 햇빛이 피로 물든 듯, 도시의 숨결이 미묘하게 변했다.
곧이어 붉은 문양을 두른 무리가 성문을 통과했다.
그들의 발걸음은 질서정연했으나, 그 규칙 속에는
전장의 냄새가 배어 있었다.
그리고 그 선두에—
한 여인이 서 있었다.
긴 창을 짚은 채,
그녀는 경주의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별의 배치를 가늠하듯, 혹은 이미 답을 알고 있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녀가 한 발 내딛는 순간,
햇빛이 그녀의 그림자를 비틀어 늘렸다.
백호의 형상이, 잠깐—
분명히 그녀의 등 뒤에서 어른거렸다.
“서방 백호칠수.”
가스파르가 낮게 중얼거렸다.
손끝에서 미세한 별빛이 흘렀다가 사라졌다.
“규·누·위.*”
*규·누·위(奎·婁·胃)란?
규·누·위는 서방 백호(白虎)에 속한 칠수(七宿) 중 일부. 동아시아 전통 천문학에서는 하늘을 사방(四象)과 28성좌(二十八宿)로 나누는데, 그중 서방(西方)의 수호성수가 백호(白虎)이다.
백호에 속한 7개의 별자리를 백호칠수라고 부르는데, 백호칠수 전체 구성 서방 백호의 7성좌는 다음과 같다.
규(奎)
누(婁)
위(胃)
묘(昴)
필(畢)
자(觜)
삼(參)
여기서 규·누·위는 백호칠수의 앞쪽 3성좌다.
“셋을 동시에 연 자.”
멜기오르가 조용히 덧붙였다.
“무식할 만큼 정직한 개방 방식*이군요.”
“아니면,”
“자신감이 지나친 쪽이거나.”
(계속)
*성좌의 의미로 아래와 같이 해석하면
규(奎)
뜻: 문장, 질서, 개시
상징: 전투의 ‘형식’, 전술, 진형
무공 해석:
→ 검과 창의 흐름을 정리하는 기초 성좌
누(婁)
뜻: 엮다, 이어붙이다
상징: 연속, 연결, 콤보
무공 해석:
→ 공격을 끊지 않고 이어가는 성좌
위(胃)
뜻: 삼키다, 소화하다
상징: 흡수, 축적, 인내
무공 해석:
→ 상대의 힘을 받아내고 되돌리는 성좌
그래서 연화에게 붙은 “규·누·위 개방자”가 의미하는 것은
백호칠수 중 3성좌를 이미 각성
공격·연계·흡수라는 서방 계열의 핵심 성좌를 선점했고 아직 전부는 아니지만 백호 계열의 ‘전투형’ 본색을 드러낸 상태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가스파르가 그걸 감지하고 바로 위험 인물로 판단한것이다.
하연과의 대비
연화 → 백호 / 정면충돌 / 전투 본능
하연 → 청룡 / 흐름 / 별의 선
“검은 흐르고, 창은 찌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