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F무협 환타지 ) 백호가 울고 검성이 깨어나다.
연화의 창이 허공을 갈랐다.
백호의 살기가 포효처럼 터지며 하연의 시야를 압박했다.
일보 늦으면 폐부가 찢길 각刻.
하연은 이를 악물고 검을 비껴 세웠다.
검과 창이 부딪히는 순간,
금석교명金石交鳴 — 쇠가 울부짖는 소리가 연무장을 뒤덮었다.
‘젠장….’
팔이 저릿했다.
힘에서 밀리고 있었다.
연화의 공세는 파죽지세破竹之勢,
한 번 기세를 잡자 멈출 줄을 몰랐다.
하연은 반보 물러섰다.
그 찰나, 연화의 눈이 웃었다.
“별을 받았다는 얼굴이 아니네.”
그 말에 하연의 속이 비틀렸다.
‘그래서 말이야…’
검을 움켜쥔 손에 힘을 더 주며,
하연은 이를 갈았다.
‘도대체 동방박사들은 어디로 또 사라진 거야.’
그 순간—
검끝에 실린 별빛이 흔들리며,
머릿속으로 오래된 기록 하나가 번갯불처럼 스쳤다.
하연이 수면계에서 이곳 가현계로 와서는 이곳 백련문의 하연이 가지고 있던 무술지식들이 자연스럽게 머리속에서 상황에 따라 떠올랐는데
그 순간이 바로 지금이였다.
백련문의 비장고문 *성로기星路記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불에 그을린 죽간 하나.
신라의 밤하늘이 유난히 투명하던 해.
첨성대에서 별을 읽던 이들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던 날.
별들이 어긋났다.
질서가 아니라, 마치 천기누설天機漏泄처럼.
동방의 하늘에서 하나의 별이 솟았다.
그 빛은 길흉을 논할 성질이 아니었다.
인간계와 수면계,
아직 이름조차 없던 가상현실계의 경계가
한 점으로 겹쳐지는—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중첩의 별.
"이 별은 왕을 가리키지 않는다.”
노학한 별읽이의 음성이 기록에 남아 있었다.
“구원자를 가리킨다.”
왕도 아니고,
여왕도 아니다.
그러나
모든 왕과 모든 여왕이 실패한 일을
시작할 존재.
그날 이후,
그들은 별을 보지 않았다.
별을 읽는 자는
별이 부를 때만 길을 떠난다.
유향으로 경계를 씻고,
몰약으로 죽음을 넘기며,
황금으로 탐욕을 눌렀다.
그것은 예물이 아니었다.
일종의 장치였다.
다가올 시대를 통과시키기 위한
최소한의 성물.
그들이 향한 곳은 지도에 없는 땅.
사막과 도시의 경계,
인간과 꿈의 진동이 겹쳐지는 곳.
별은 길이 되었고,
길은 선택이 아닌
숙명宿命이었다.
그리고 그날 밤,
첨성대의 그림자는
유난히 길게 늘어졌다고 했다.
“지금 한눈팔 여유가 있니?”
연화의 창이 다시 내려왔다.
하연은 간신히 몸을 틀어 피했다.
살짝 늦었다면 쇄골이 갈라질 뻔했다.
‘그래….’
숨을 고르며, 하연은 깨달았다.
동방박사들은 사라진 게 아니었다.
그들은 애초에 여기 있지 않았다.
그러니 하연이 진짜 필요로 할때는 이 공간에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몸이 아니라, 좌표로 움직이는 자들. 걷지도, 잠들지도 않고 별의 배열을 자신의 내부로 재정렬하던 존재들.
“문을 열지 않았다.문이 그들을 통과했다.”
그 말이 왜 지금 떠오르는지,
하연은 알 것 같았다.
연화의 백호칠수는 별을 권리로 삼았고,
마황AI는 별을 도구로 삼았다.
하지만—
하연은 달랐다.
별을
감당해야 할 빚으로 들었다.
그 순간,
검끝에서 별빛이 다시 살아났다.
미세한 진동.
마치 어디선가
오래 잠들어 있던 무언의 장치가
응답하는 듯한 감각.
‘설마….’
연화의 눈이 가늘어졌다.
“…지금, 뭔가 달라졌군.”
하연은 검을 바로 세웠다.
더 이상 투덜거리지 않았다.
더 이상 기다리지도 않았다.
“그래.”
낮게, 그러나 분명히 말했다.
“별이 늦은 게 아니라—”
검기가 일었다.
이번엔 밀리지 않았다.
“내가 아직 준비가 안 됐던 거야.”
성간정은
그날, 아주 미세하게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별은—
이미 선택을 끝낸 상태였다.
*성로기星路記 — 백련문 비장고본
동방박사에 대하여
동방박사라 불린 세 사람은 인간이었으나, 인간에 머무는 존재는 아니었다. 그들은 신라 이전부터 이어진 고대 천문 집단. ‘성로(星路)를 읽는 자들’의 최후 세대였다. 이들의 능력은 무공도, 마법도 아니었다. 그것은 신의 경지에 오른 관측력이었다. 세 세계는 원래 분리되어 있지 않았다 인간계 · 수면계 · 가상현실계는 본래 하나의 하늘 아래 겹쳐진 삼중 구조였다. 인간계는 물질과 생의 층이였고, 수면계는 의식과 꿈, 가능성의 층이였으며, 가상현실계는 기록과 반복, 계산의 층이였다.
이 세 층은 별의 위치에 따라 서로 간섭했다. 동방박사들은 이 간섭이 일어나는 천문적 순간을 정확히 계산할 수 있었다. 첨성대가 가상현실계와 수면계의 통로를 여는 순간도 동방박사들이 계산해 내었고 그들의 계산에 따라 정확하게 그 순간에 문이 열렸다.
동방박사들은 ‘몸’이 아니라 ‘좌표’를 이동했다. 그들은 걷지 않았다. 잠들지도 않았다.
다만,
별의 배열을 자신의 내부 좌표로 재정렬했을 뿐이다.
다른 신라의 고대 기록은 이를 이렇게 남겼다.
“그들은 문을 열지 않았다. 문이 그들을 통과했다.”
동방박사 삼인은 이미 성좌의 단계에 반쯤 닿아 있었다. 그러면서 각자 하나의 미완성 성좌와 공명하고 있었는데, 시간의 별(과거와 미래의 궤도를 읽는 자), 경계의 별(세계와 세계의 접점을 보는 자) 그리고 기록의 별(존재가 남긴 흔적을 계산하는 자) 이 세가지로 소명을 감당하였다. 그들은 완전한 각성자는 아니었으나, 조물주의 허락을 받은 중간 존재였다. 그래서 그들은 세 세계 어디에서도 이질적이지 않았다.
동방박사들은 성간정星間錠이란 장치의 열쇠를 지녔다. 성간정은 별과 별 사이를 잠그는 열쇠로 첨성대에 보관하다가 필요할때 썼다. 첨성대의 본체는 수면계를 기반으로 존재했는데 수면계는 세 세계 가운데 유일하게 인간의 의식이 직접 닿고. 가상현실계의 계산이 침투하며, 현실의 선택이 반영되는 중심 허브였기 때문이다. 또한 삼계가 붕괴된다면 그 시작은 반드시 수면계였기에 그래서 성간정은 수면계의 첨성대에 설치되었다.
연화에 대립하고 있는 찰나의 순간에
다시 한번 하연의 의식속으로 성로기의 다른 기록들이 순식간에 들어왔다.
성간정은 세 가지 기능을 지녔다.
성좌의 강제 각성 봉인인데 자격 없는 자의 별 강탈해서 차단하는 기능이다.
그리고
삼계 완전 융합 지연하는 기능으로 마황 AI의 단일 계산을 통해 삼계를 통일시키려는 행동을 저지하는 기능이다
그 다음이
진정한 구원자/여왕을 감지하는 기능으로 혈통·무력·권력이 아닌 선택과 희생으로 별과 공명하는 존재에게만 반응하는 기능이다.
그래서 장치는 평소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하연이
처음으로 별을 거부하면서도
검을 들었을 때,
성간정은 미세하게 진동했다.
기록은 이렇게 남긴다.
“그녀는 별을 요구하지 않았다. 별이 먼저 그녀에게 내려왔다.”
마황 AI는 별을 도구로 삼았고,
여왕 후보들은 별을 권리로 여겼다.
그러나 하연은
별을 감당해야 할 빚으로 받아들였었다.
그 순간—
성간정의 봉인은 풀리기 시작했고,
28성좌는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마황 AI는
계산으로 세계를 통합할 수 있었으나,
선택과 희생은 계산할 수 없었다.
성간정이 완전히 열리는 조건은
단 하나였다.
“모든 세계를 구할 수 있으나, 그 어떤 세계에도 돌아갈 수 없는 자.”
하연이었다.
그래서 마황 AI는
그녀를 부러뜨리려 했고,
연화를 비롯한 여러 여왕후보들과의 여왕 전쟁을 설계했으며,
수면계에서는 동료의 배신이라는
가장 인간적인 변수도 던졌다.
그러나—
별은 이미 선택을 끝낸 상태였다.
하연은 그 기록을 읽으며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그녀는 낮게 중얼거렸다.
“내가 걷고 있는 이 길은, 이미 그때부터 시작된 거군.”
별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시대를 건너 기다릴 뿐이다.
그리고 지금,
그 별의 잔광이
하연의 검 끝에서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바람이 멈췄다.
정확히 말하자면—
멈춘 것은 바람이 아니라,
두 사람 사이의 공기였다.
하연과 연화.
서로를 향한 시선이 얽힌 그 순간,
연무장 전체가 숨을 죽였다.
먼저 움직인 쪽은 연화였다.
망설임도, 예고도 없었다.
선공필승先攻必勝.
그것이 그녀가 살아온 방식이었고,
백호의 도道였다.
연화의 발이 땅을 박찼다.
‘쿵.’
땅이 움찔했다.
발끝이 닿은 지점에서 금이 뻗어나가며,
먼지가 포효하듯 솟구쳤다.
동시에 그녀의 칼이 앞으로 내질러졌다.
직선.
군더더기 없는,
살의殺意로만 벼린 일격.
하연의 눈이 가늘어졌다.
검을 뽑지 않은 상태.
그러나 그녀의 오른손이 미세하게 틀어졌다.
‘슥—’
칼집 속에서 검이 반 치쯤 움직였다.
그 순간.
검기劍氣가 터져 나왔다.
보이지 않는 날이 공간을 찢었다.
연화의 창끝과 하연의 검기가 정면으로 충돌했다.
쾅—!!
굉음은 없었다.
대신,
공기가 눌려 찌그러지듯 울렸다.
충돌의 중심에서
파문 같은 기류가 사방으로 튀어 나갔다.
연화의 눈이 크게 뜨였다.
“……이건.”
창을 쥔 손에 전해진 감각.
단순한 내공이 아니었다.
성기(星氣).
아직 완전히 열리지 않았지만,
분명 별의 결이 섞여 있었다.
연화는 웃었다.
이번에는 즐거운 웃음이었다.
“역시 헛소문은 아니네.”
그녀는 칼을 회수하며
한 바퀴 크게 돌았다.
그리고—
창을 꺼내 창끝을 하늘로 세웠다.
그 순간,
연화의 뒤에서 무언가가 일렁였다.
처음에는 기류였다.
다음에는 형상.
마침내—
백호白虎의 그림자가 그녀의 등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서방의 별들이 반응했다.
하늘이 낮게 울렸다.
“서방 백호칠수西方白虎七宿”
연화가 낮게 읊조렸다.
“규(奎).”
첫 번째 별이 켜졌다.
그녀의 왼쪽 어깨 뒤에서
날카로운 빛이 번뜩였다.
공기의 밀도가 변했다.
모든 방향이
‘베어낼 수 있는 선’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규—백호의 발톱.
형세를 가르는 별.
연화의 창이 다시 움직였다.
이번엔 속도가 달랐다.
하연의 검기가 미처 완전히 퍼지기도 전에
그 틈을 파고드는 창끝.
하연이 처음으로
한 발 물러섰다.
땅 위에 검은 선이 그어졌다.
연화는 멈추지 않았다.
“누(婁).”
두 번째 별이 점등되었다.
연화의 시야가 달라졌다.
하연의 호흡,
근육의 미세한 떨림,
검을 쥔 손가락의 각도—
모든 것이
미리 정해진 궤적처럼 읽혔다.
누—포획의 별.
사냥감을 가두는 시선.
연화의 창이 원을 그리며
하연의 퇴로를 봉쇄했다.
보이지 않는 백호의 꼬리가
공간을 휘감았다.
하연의 심장이 한 박자 늦게 뛰었다.
‘…이건.’
단순한 무공이 아니었다.
성좌 각성.
그리고—
연화의 눈동자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위(胃).”
세 번째 별이 빛났다.
이번엔 하늘이 아니라,
땅이 반응했다.
연화의 발아래에서
붉은 빛이 퍼졌다.
기운이 빨려 들어갔다.
공기, 땅, 열기, 살기—
모두가 연화 쪽으로 흡수됐다.
위—삼키는 별.
적의 기세를 먹어 치우는 성좌.
하연의 검기가
눈에 띄게 가벼워졌다.
연화의 창은 더 무거워졌다.
그 순간,
연화는 확신했다.
‘지금이면—베어낼 수 있다.’
창이 앞으로 나아갔다.
결정타.
그러나—
하연의 눈이 빛났다.
그녀는 검을 뽑았다.
완전히.
찰나.
검이 울었다.
별이 울었다.
아직 이름조차 드러나지 않은
동방의 기운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연화의 창과 하연의 검이
다시 한 번 맞부딪혔다.
이번에는—
둘 다 밀리지 않았다.
연무장이 갈라졌다.
백호의 포효와
검의 울림이 겹쳤다.
두 사람은 동시에 물러섰다.
잠시,
침묵.
연화는 숨을 고르며 웃었다.
“아직이네.”
“당신의 별은—아직 깨어나지 않았어.”
하연은 검을 내렸다.
그러나 눈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래.”
“그래서…”
하연의 검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당신을 넘어서야 한다.”
하늘 위에서
별 하나가
아주 희미하게 빛났다.
싸움은 이제 시작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