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F 무협판타지 ) 현무의 시험
가상 현실계...경주 외곽, 첨성대 터.
폭우는 쇠냄새를 씻어내지 못한 채, 땅 위에 흘린 하연의 피를 더 붉게 번지게 만들고 있었다.
연화의 창끝이 멈춘 것은, 그녀의 의지가 멈춘 게 아니었다.
멈춘 것은 그녀의 동물적 “확신”이었다.
연화는 창을 쥔 손에 힘을 더 주었다.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그래 끝내면 된다.
—지금 여기서 끝내면, 그 다음은 다시 내 것이 된다.
그런데.
하연의 검기가,
그녀가 세시진 전, 하연을 처음 만났을때 받았던 그 “검기”가 아니었다.
하연의 검기는
한 줄기 선처럼 뻗는 것도 아니고,
폭발처럼 터지는 것도 아니었다.
맥박.
살아 있는 것처럼 뛰었다.
연화는 눈을 가늘게 뜨며 그 파동을 읽으려 했다.
백호칠수의 규·누·위가 그녀의 등 뒤에서 울었다.
살기를 끌어올려, 상대의 숨을 끊고, 길을 단절하는 힘.
그녀는 셀 수 있었다.
상대의 호흡,
상대의 체중 이동,
검끝이 흔들리는 각도.
그건 늘 가능했다.
그래서 연화는 단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
그녀는 태어날 때부터 “여왕”이라는 말의 무게를 배웠다.
땅을 밟는 법보다,
사람을 밟는 법을 먼저 배웠다.
역적으로 몰려 귀족에서 쓰레기 같은 거지로 몰락해 버린
어린 시절의 기억이
폭우 속에서 유리 조각처럼 스쳤다.
찬 겨울, 매서운 바람.
얼어붙은 연무장.
창을 놓친 아이의 손등에
스승이 창끝을 눌러 박았다.
“왕은 실수하지 않는다.”
연화의 피도 갑자기 바닥에 뚝 떨어졌다.
연화가 하연에게 준 상처보다 더 큰 상처가 몸의 피를 욕동시켰다.
“여왕은 더더욱 실수하지 않는다.”
그때 연화는 울지 않았다.
울면 버려진다는 걸 알았으니까.
울지 않는 법을 배운 대신,
웃는 법을 배웠다.
상대를 찌르기 전에 웃는 법.
죽이기 전에, 먼저 이긴 얼굴을 만드는 법.
그 웃음이 지금도 그녀의 입가에 걸려 있었다.
그러나 그 곡선이 아주 미세하게…
깨졌다.
하연이 검을 들고 서 있는데,
하연이 “별을 요구하지 않는데”,
별빛이 하연에게 내려오고 있었다.
연화는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인정할 수 없었다.
인정하는 순간, 지금까지의 자신이 부서지니까.
—아니다.
—저건 착시다.
—저건 우연이다.
—저건… 시스템의 오류다.
연화는 창을 더 불끈 쥐었다.
—다시 돌진이다
이번 한 번이면 끝이다.
살을 베고, 숨을 끊고, 그 자리에서 확정한다.
그런데 그 순간—
하연의 눈빛이, 연화를 보지 않고 어딘가를 보고 있었다.
마치 연화 너머의 하늘을.
그 시선이 연화를 찔렀다.
연화는 자신도 모르게,
아주 짧게 숨을 멈췄다.
찰나刹那였다.
그러나 그 찰나는 연화에게 치명적이었다.
그녀는 깨달았다.
하연은 자신을 “상대로” 보고 있지 않았다.
하연은 자신을 “장애물”로 보고 있었다.
여왕이 되기 위한 벽.
깨야 할 문.
그 인식이, 연화의 가슴 한가운데를 갈랐다.
연화가 지금까지 싸워온 모든 상대들은
연화를 “넘어야 할 산”으로 보았다.
두려워했고,
증오했고,
혹은 무릎을 꿇었다.
그런데 하연은 달랐다.
하연의 눈빛에는
두려움도, 경외도, 탐욕도 없었다.
오직—
의무가 있었다.
그 의무가 연화를 흔들었다.
‘…왜?’
연화는 창을 들고 있으면서도
자신에게 묻고 있었다.
‘왜 너는… 그렇게 싸우지?’
‘왜 너는… 별을 탐하지 않지?’
‘왜 너는… 여왕이 되고 싶지 않은 얼굴로 여왕의 자리로 걸어오지?’
연화는 본능적으로 반발했다.
—여왕은 욕망해야 한다.
—여왕은 빼앗아야 한다.
—여왕은 증명해야 한다.
그게 자신이 배운 전부였으니까.
그러나 폭우 속에서,
하연의 검기 맥박이 다시 한 번 뛰는 순간—
연화는 처음으로 “불길한” 감각을 느꼈다.
자신이 믿어왔던 규칙들이
하연 앞에서 무너질 수도 있다는 감각.
천지가 뒤집히는 예감.
연화의 손끝이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그 떨림을 연화는 숨기려 했다.
숨기면서 동시에, 더 강하게 내리치려 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연화는 알았다.
지금 자신이 흔들린 것은
검에 밀려서가 아니었다.
하연의 “태도”에 밀린 것이었다.
그때—
멀리서, 첨성대가 낮게 울기 시작했다.
아직 빛이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돌층 사이로…
아주 미세한 진동이 번졌다.
연화는 그 소리를 들었고,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별이… 움직인다.
연화의 입술 사이로,
자신도 모르는 말이 새어 나왔다.
“…설마.”
그 말은 두려움이 아니라고,
그녀는 스스로를 속였다.
그러나 심장 깊숙한 곳에서는
오래전부터 배운 한 문장이,
살아 있는 독처럼 다시 올라오고 있었다.
“여왕은 실수하지 않는다.”
그 문장에
처음으로 금이 갔다.
그리고 바로 그 밤—
첨성대가 다시 빛나기 시작했다.
침묵하던 돌기단이 낮게 울며 떨렸고,
쌓아 올린 돌층 사이로 은빛이 스며 나왔다.
마치 오래 잠들어 있던 거인이
숨을 고르는 듯한 소리였다.
하늘도 변했다.
제자리를 지키던 별들이
하나둘 궤도를 이탈하며 흐트러졌다.
질서가 무너진 것이 아니라,
질서 위에 덧씌워진 또 다른 명령이 내려온 듯한 움직임.
그 순간,
오래된 문장이 하연의 머릿속을 스쳤다.
“여왕쟁탈전이 도를 넘을 경우,
하늘은 침묵하지 않는다.”
— 『천문비결』
멜기오르가 그녀 앞에 섰다.
밤을 삼킨 듯한 푸른 로브.
그의 발밑에서는 그림자조차
별의 배열을 닮아 정렬되어 있었다.
“이제부터는 싸움이 아닙니다.”
낮고, 단정한 목소리.
명령도 경고도 아닌,
이미 정해진 사실을 말하는 어조였다.
하연은 검을 쥔 채 고개를 들었다.
-갑자기 나타나서..쌍..아니지
하연은 앳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무엇입니까?"
멜기오르는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빛이 그의 눈동자에 깊게 잠겼다.
“시험이다.”
하연은 속으로 이렇게 말하고 눈을 감고 침묵했다.
-졸라 꼴갑이네. 뭔 시험?
그가 손을 들어 올리자
허공의 별빛이 실처럼 엮이기 시작했다.
빛의 선들이 서로 교차하며
하나의 거대한 형상을 그렸다.
사성수.
하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청룡입니까.”
멜기오르의 시선이 돌아왔다.
그 눈빛은,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한 어두움이었다.
“아니다.”
잠시의 정적.
그리고—
“북방 현무다.”
그 말이 떨어지자,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시간이 개입한다는 것은
단순히 느려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죽음이 지연되고,
고통이 늘어나며,
선택의 대가는 더욱 명확해진다.
살아남는다는 것은
곧 더 오래 견딘다는 뜻이었다.
현무는 베지 않는다.
부수지도 않는다.
그저—
버티게 한다.
멜기오르가 낮게 덧붙였다.
“현무의 시험은
승패로 끝나지 않는다.”
하연의 시선이 첨성대로 향했다.
돌기단 사이로 번지는 빛이
서서히 거북의 형상을 닮아가고 있었다.
“살아 있는 동안,
얼마나 많은 것을 내려놓을 수 있는지.”
검을 쥔 손이 흔들리지 않았다.
하연은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그렇다면…”
그녀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조금도 물러섬이 없었다.
“끝까지 버텨보겠습니다.”
별들이 다시 움직였다.
하늘은 이미—
개입을 시작하고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