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덟번째 여름 01
녀석과 나는 이 여행을 마음으로 동의했고
꼭 가겠다는 약속의 의미로 한 달 전 숙소를 예약했다
작년 여름휴가에 아저씨와 동행했던 것이
싫지 않았던 결과라 믿으며
나는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세 번째 동행을 준비하고 있었다
영화 촬영 준비로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이 고단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행은 녀석에게도 나에게도
모든 일을 다 뒤로하는 최우선 순위가 되어있었다
나는 매일매일 스케줄러를 수정하며
열심히 보충수업을 잡아 일을 했고
녀석은 대본 리딩과 로케이션을 최대한 조정해서
진행하고 있었다
여행 이틀 전,
아침부터 10시간의 보충수업 스케줄을 잡아놓은 나는
첫 수업 학생이 몸이 아파 병원에 가야 한다는 전화를 받고
여유 있게 아침시간을 시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눈을 뜬 지 30분이 되지 않아 배가 아프기 시작했고
조금 더 지나서는 장염과 비슷한 증상이 느껴졌다
종종 장염으로 고생을 하는 편이라
약부터 찾아서 먹은 후 두 번째 학생에게
수업을 연기하겠다는 문자를 보냈다
조금 나아지면 남은 수업을 꼭 하겠다는 의지로
화장실을 왔다 갔다 하며
최대한 빨리 진정되기를 바랐지만
통증은 점점 더해가는데 변을 볼 수가 없는 상황이 지속되었다
너무 진을 뺀 나머지 나는 나도 모르게 잠깐 동안
잠이 들었고 다시 눈을 뜨자마자 극심한 통증이 시작되었다
그러기를 여러 차례 나는 결국 남은 수업을 모두 취소했고
저녁까지 버티다가 열이 오르기 시작해서야
어쩔 수 없이 일을 하고 있던 남자 친구를 불러 순천향병원 응급실로 달려갔다
응급실에서 하는 몇 가지 검사들도 기다리기 힘들 만큼 통증이 심해지고 진통제부터 놔달라는 요구를 수차례
지금껏 어찌 참은 건지 나 자신도 이해가 되질 않았다
한 시간이 지나서야 진통제를 처방받고
나는 꼬박 열두 시간의 싸움을 끝낸 듯
겨우 진정이 되어 잠이 들었다
한두 시간 잠을 자고 깨니
의사가 장염이 급속도로 심해져서
장폐색 증상까지 보인다고 얘기했다
입원을 했다가 월요일에 교수 진료를 받는 게
좋겠다고 하는데 나는 약 처방만 받고 퇴원하겠다고 했다
남자 친구는 어처구니없어했고 의사도 의아해했다
그 순간 떠오른 생각은 녀석과의 약속뿐이었다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당연했지만
나는 약 꼬박꼬박 먹고 음식도 최대한 조심하고
절대 무리하지 않게 그리고 조금이라도 안 좋으면
다시 병원에 오겠다는 약속을 한 뒤 병원을 나섰다
나는 돌아와서 진통제와 치료제를 먹고
속을 달래며 여행가방을 꾸렸다
미련한 딸바보라 사람들은 이해 못하겠지만
여름방학 중 녀석과 함께 보낼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을
절대 병원에서 보낼 수는 없었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엄마의 버킷리스트를 실행하듯
나는 잠시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생각되는 순간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우리는 드디어 여행길에 올랐다
경주로 가는 길은 화창하기 그지없었다
파란 하늘마다 커다란 구름들이 그림처럼 펼쳐졌고
덕분에 컨디션도 다 회복된 듯 느껴질 정도였다
경주의 숙소는 북카페 겸 게스트하우스인
북홈을 선택했다
주변 경관과 건물에 비해 내부는 깜짝 놀랄 만큼
깨끗하고 예뻤다
특히 화장실과 샤워시설이 잘 되어 있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북카페라서 라면과 간단한 식사,
카페 음료까지 가능했다
점심을 많이 못 먹고 기운이 달린 나는
일단 짐을 풀고 잠을 청했다
녀석은 만화책 삼매경에 빠졌고
각자 오랜만에 편안한 휴식 시간을 가졌다
이런 곳이면 녀석과 나는 족히 3일은 뒹굴거릴 수
있을 듯했다
일단 세 사람 모두 취향저격이니 숙소 선택은 성공인셈이다
해가 질 무렵의 첨성대를 찍으려던 계획은
나의 늦잠으로 일단 실패~^^;;;
녀석에게 특별한 사진을 찍게 해 주려는 듯
아저씨는 삼각대에 렌턴까지 짊어지고 나선다
삼륜 오토바이를 한대 빌려서 짐도 싣고 사람도 싣고
첨성대를 보러 안으로 달렸다
컬러풀한 첨성대 조명 아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해 질 녘의 첨성대는 다음 기회로 미루고
알록달록 첨성대를 담아본다
렌턴을 사용하니 재미있는 불빛과 함께
인물도 함께 찍을 수 있었다
녀석은 이날의 기억이 좋았었는지
이후 부산여행에서 핑크 첨성대 브로치를 사서
우리만의 추억이라며 내 생일선물로 주었고
이 작은 선물이 나는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오토바이 타고 한참을 놀다가 반납을 하고 가느라
안압지에 도착한 시간이 너무 늦어지는 바람에
열심히 찍어봤으나 지붕들을 다 날리고 말았다
숙소로 돌아와 치킨이랑 라면으로 속을 채우고
하루를 마쳤다 (물론 나는 또 죽을 먹었지만ㅜㅜ)
오길 잘한 거야
스스로 다독이며 잠을 청했다
오늘은 포항으로 이동 예정
경주를 그냥 떠나기가 아쉬워서
가기 전에 핫하다는 황리단길에 잠시 들러 보았다
하늘도 예쁘고 동네도 예뻤으나
너무 뜨거워서 오래 걸어 다니기는 무리였다
다행히 볼거리가 많거나 엄청 넓거나 하진 않았다
한껏 신경쓴 녀석이 너무 귀여워
카메라 두 대의 셔터는 쉴틈이 없었고
결국 그 짧은 시간에 건진 사진들이
이번여행 베스트 컷이 되었다
빠른 걸음으로 휘리릭 돌아보다
음료수 하나 사들고
'지나가다'라는 가게에 들렀다
녀석은 이것저것 구석구석 살펴보다가
맘에 드는 책 한 권을 골랐다
우리는 딱 그 정도로 만족하고
서둘러 포항으로 향했다
※사진은 퍼가지 말아주세요!!!
글ㆍ kossam
사진ㆍAri & koss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