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241일 차

퍼스. 지겹게도 여유로운 도시.

by 백윤호

눈을 뜬다. 시간은 10시 남짓. 도시는 고요하다. 시끄러운 소리가 간간히 들린다. 독특한 시끄러움이다. 이 도시에 그런 소음은 어울리지 않는다. 금방 침묵과 고요가 시끄러움을 덮는다. 다시 도시는 평화롭다.

시드니에서 느낄 수 없던 퍼스만의 그것은 여유다. 고독 속의 여유. 시드니의 여유가 시끌벅적함 속에서의 여유였다면 이곳은 고요 속의 여유다. 사람도 차도 잘 보이지 않는다. 마치 이 도시는 침묵을 기본으로 깔고 있는 듯 하다. 이런 곳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 태양이 뉘엿뉘엿 중천을 향해가도 잠든 집은 깨질 못하고 있었다. 그 사이에 눈을 떴다.

가방을 주섬주섬 챙긴다. 잠시 샤워를 하고 나오니 친구가 깼다. 커피한 잔 하러 가자며 카페로 간다. 이 동네에는 번듯한 카페도 찾기 힘들다. 시드니에서는 발에 채이던 것이 카페였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겨우 한 곳 찾을까 말까. 그래도 KFC나 맥도날드가 들어와 있는거 보면 신기하다 못해 경이롭다. 프렌차이즈란 이런 것인가!

롱블랙을 시켰다. 그런데 웬걸. 물양이 적다. 알고보니 이곳에서 '롱블랙'을 시키는 사람이 흔치 않다고. 그들도 처음으로 만든 것(!)이란다. 다시 한번 여유에 찬사를 보낸다. 커피 한잔을 마시며 길을 걷는다. 한국에서도 이런 여유는 느껴보지 못했다. 시드니나 퍼스 같은 곳에서 여유는 이런 것이다. 커피 한잔을 들고 너무나 여유롭게 보이는 풍경과 사람들을 보는 것. 모두가 뭔가에 쫓기듯 표정과 행동과 기세를 뽐내는 걸 불편하게 지켜볼 필요가 없다. 이곳에서 여유는 어쩌면 쉽게 그리고 누구나 얻을 수 있는 곳이니까. 이들이 각종 투표와 같은 의무들에 벌금을 부과한 것도 이 때문 아닐까. 여유가 생기면 어떻게든 누리려는 습성을 잘 알기에 강제성을 부과한 것. 이런 생각도 문득 들었다.

점심과 저녁을 먹었다. 밥하기 싫은 이런 여유있는 날엔 가장 간단한 라면과 바깥에서 만든 치킨을 먹어야 한다. 그래야 덜 치우고 덜 움직이니까. 맘껏 쇼파를 침대 삼아 뒹굴고 논다. 영화를 두 편 본다. 하루를 그렇게 보내니 어느새 집으로 가는 시간이다.

비행기를 타기위해 우버를 부른다. 운 좋게도 벤츠가 걸린다. 차 때문에 3일간 고생했던걸 보답이라도 해주는 것인가. 엉뚱한 생각을 하며 친구와 인사했다.

"연말에나 보자."

친구를 뒤로하고 공항에서 수속을 밟았다. 티케팅을 하고 간단한 음료를 샀다. 딱 자기 좋은 기분. 비행기가 출발 전에 딜레이가 됐지만 그래도 잘 탈 수 있었다. 자리와 가장 최적의 자세를 확인했다. 이제 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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