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를 듣고 안똔이 쓰다.
1899년, 체호프는 썼습니다. 여자가 남자의 친구가 되는 일에는 이런 순서가 있다고요. 처음에는 지인, 그 다음에 애인, 마지막으로 친구. 체호프의 희극 「바냐 삼촌」에 나오는 한 대목입니다. 그가 21세기 한국에 살았더라면, 아마 체호프는 남녀의 관계가 가족으로 끝날 수도 있다는 선택지를 대사에 추가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낭만적인 해피엔딩을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 한국에서 수많은 혼자만의 로맨스는 친한 오빠 동생 사이로 지내자는 말 앞에서 남아메리카 슬럼에 주차된 세단의 앞유리처럼 박살이 나기 마련이니까요.
마침내 론칭된 ‘붉은 입들의 아무말 대잔치, 레드립’의 공식 1화에서는 미팅과 소개팅을 다뤘습니다. 사람에 따라 다르기야 하겠습니다만, 오늘도 대학에 갓 들어온 수없이 많은 새내기들이 미팅과 소개팅에 대한 환상을 품고 불나방처럼 달려들고 있죠. 그들 중 얼마나 많은 수가 애인은 고사하고 지인은 됐을는지, 혹은 말로만 친할 뿐 카톡 대화창에는 여전히 읽지 않은 1이라는 숫자가 떠다니고 있는 남매 관계가 되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왠지 웃음이 나는군요. 저로서는 웃음을 참을 수 없으니 오호통재라. 바라건대 미팅, 소개팅에서 트라우마가 생겨버린 청취자 여러분께서 제 유머감각이 배배 꼬인 탓이라 생각하고 관용하는 마음으로 넘어가주시길 부탁드릴 수밖에요.
어쨌든 나방도 이유가 있어서 불꽃 속으로 몸을 던지고, 대학생들도 바라는 게 있고 기대해 볼만한 것이 있어서 오늘도 목마른 사슴이 샘을 찾듯이 미팅, 소개팅 자리를 헤매며 술잔을 돌리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수없이 많은 미팅과 소개팅에서 간수치와 인간 관계를 잘 간수하며 살아남은 역전의 용사 두 분, 베지터 씨와 쥬쥬 씨를 게스트로 모시고 대화를 나눠보니 과연 그럴 법 하더군요. 잘 되든 안 되든, 미팅과 소개팅은 하다못해 팟캐스트에라도 출현해서 써먹을 재미있는 토크 소재라도 건질 수 있게 해주니까요.
저는 미팅과 소개팅뿐만이 아니라 넓은 의미에서의 연애 경험도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대단한 사람이 못 됩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개인사와 이번 팟캐스트에서 나온 이야기들을 반추해볼 때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미팅과 소개팅이든, 혹은 전반적인 연애 그 자체든간에 목숨 걸고 달려들었을 때 썩 결과가 만족스럽게 나오는 경우가 별로 없어요. 미팅에 나갔더니 내 운명의 상대가 짜자잔 나타나는 일을 기대하느니 로또를 사는 편이 차라리 생산적이겠지요. 물론 미팅에 운명의 상대가 나오지 말라는 법이 있지는 않습니다만,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초면부터 우리가 은퇴 후에 함께 손수 지어 거주할 흰색 울타리와 푸른 잔디밭을 두른 전원 주택은 강원도가 좋을지 제주도가 좋을지, 그리고 토끼 같은 손주들은 이름을 뭐라 짓는 게 좋을지 논의하기 시작하면 온 운명도 달아날 것 아니겠습니까.
어찌 보면 인연은 있다가도 없고 또 없다가도 있고, 생각 못할 때 와서 생각 못할 때 떠나는 것 같습니다. 미팅과 소개팅도 그런 인연이라는 것의 가능성이겠죠. 그러니 청취자 여러분, 원하신다면 일단 미팅이든 소개팅이든 많이 합시다. 가능성을, 확률을 키워보는 거죠. 다만 미팅, 소개팅에서 인연인가 싶은 것이 들어왔을 때에는 너무 꽉 쥐지 말아주세요. 인연이라는 게 모래 같은 면이 없잖아 있어서, 너무 꽉 쥐면 손가락 사이로 다 새어 버리기 마련이니까요.
자, 이렇게 모래를 흘려버리듯 아무말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 레드립의 1회와 안똔의 후기가 끝났습니다. 이스크라 팀, 그리고 안똔의 아무말은 2화에서 계속됩니다. 그럼 그때까지, 안녕!
추신. 그래도 제가 사랑하는 청취자 여러분은 있다가 없어지지 말아주세요 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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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입들의 아무말 대잔치, 레드립 지금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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