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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윤호 Jul 21. 2017

NL개론 2 - NL학생운동사

87년 대선까지, 11화를 듣고 안똔이 쓰다

http://www.podbbang.com/ch/13959?e=22336443


1. 들어가며-NL이란 무엇인가

“평화와 자주적 통일을” (1991. 05. 31. 부산대 전대협 5기 출범식) 박용성의 포토 에세이~!


  무언가를 정의하는 방법에는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는 논리적 방법, 둘째는 역사적 방법입니다. 다만 본문 및 팟캐스트에서 팀 이스크라가 상대적으로 주목하는 것은 NL의 역사적 측면입니다. 논리적 차원에서의 조금 더 상세한 설명을 원하신다면, 앞서 제가 쓴 글 「NL-PD 개론 1」을 참조해주시기 바랍니다. 일단 이 글에서는, 자본주의 중심부가 아닌 제3세계 사회주의 혁명의 단계론인 NLPDR(National Liberation-People‘s Democracy-Revolution)에서 남한 사회는 식민지반봉건사회에 해당하므로 지금은 반미자주, 통일촉진, 즉 민족해방(NL) 운동을 해야 하는 단계라는 노선이 NL이라고 간략하게 언급해 두겠습니다.     


2. 80년 광주, NL의 요람을 마련하다


   NL에 대한 흔한 오해는 NL이 80년대 운동권을 장악한 거대 세력이었다는 다소 불분명한 인상입니다. 이 인상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실상 NL은 86년 이후에야 등장하여 급속하게 성장한, 당시로서는 새로운 노선이었습니다.

  80년대 이전까지의 남한에는 60년대 이래 세계를 휩쓴 혁명의 불길이 사실상 전혀 접근하지 못했습니다. 박정희 정권이 조그만 불씨 하나도 국내 유입을 철저히 막았거니와, 한국인들에게 반미 정서가 큰 영향을 끼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미국은 한국전쟁에서 남한을 지켜주고 연후에도 계속 원조 물자를 지원해준 고마운 우방일 뿐만 아니라, 박정희 정권에 반대한 사람들에게조차 자유의 나라, 민주주의의 나라였거든요.     

학생을 구타하는 계엄군 (1980)Ⓒ한겨레

    

  그러나 12·12 쿠데타로 전두환이 집권하고 광주에서는 대학살이 벌어집니다. 저는 항쟁의 기억인 동시에 참극의 기억인 80년 광주가 97년 이전까지의 남한이라는 시공간을 결정지은 최대의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광주 항쟁은 이전까지 “반미의 무풍지대”라 불렸던 남한의 정치 지형을 송두리째 뒤바꿔 놓았습니다. 항쟁 당시 광주에는 한 장의 대자보가 나붙었습니다. 시민군을 지원하기 위해 부산에 미국의 항공모함이 입항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는 광주에 계엄군이 투입되더라도 대북 전선에 공백이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또한 5월 27일, 주한미군사령관 존 위컴은 신군부의 도청진압작전을 승인했습니다. 자유의 나라, 민주주의의 나라로 알려졌던 미국이 신군부의 광주 학살을 묵인했을 뿐만 아니라 사실상 조력한 셈이죠.  

  광주시의원을 지낸 전남대 84학번 김보현은 NL이 서울에서 정립되기 전부터 광주에 반미, 자주적인 NL 기류가 자생적으로 형성되어 있었다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5·18이 있었던 바로 그 해 12월 9일, 광주 미국문화원에서는 화염이 치솟습니다. 5월의 광주는 80년대를 만들어냈고, 80년대 반미투쟁의 봉화는 광주에서 첫 불이 타올랐던 것입니다.     


3. NL 탄생 이전, 학생운동권의 논쟁 및 분화


  이제 시선을 광주에서 서울의 대학가로 돌려봅시다. 주목해야 할 연도는 5·18로부터 4년이 흐른 84년입니다. 왜냐고요? 학생운동의 외부적으로는 학원자율화 조치가, 내부적으로는 NL 노선 탄생의 시발점이 된 각종 논쟁이 시작된 해이기 때문입니다.

  변화된 상황은 학생사회 속에서 앞으로 운동을 어떻게 해나가야 할지에 대한 여러 논쟁을 낳았습니다. 제가 본문에서 소개해드리고자 하는 대표적인 논쟁은 ‘C-N-P 논쟁’입니다. 물론 이 논쟁은 NL이 탄생하기 이전의 것이기에 NL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논쟁을 언급하는 것은, NL 노선의 탄생과 함께 불거진 논점들, 차후 계속해서 발생하는 학생운동에 대한 논점들이 이미 이들 속에서 초보적인 형태로 나타나고 연후까지 영향력을 발휘하는 까닭입니다.

민주화운동청년연합 현판식 (1983. 09. 30)최경환 자전 에세이

   

  흔히 CDR론-NDR론-PDR론의 대립으로 정리되는 C-N-P 논쟁은 민주변혁논쟁이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C-N-P 논쟁이 남한 사회의 민주화를 어떻게 이룰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었기 때문입니다. 세 개의 노선은 크게 미국과 한국 사회에 대한 규정, 그리고 운동의 주체와 현재 단계에 대한 진단에 따라 갈라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CDR은 Civil Democratic Revolution, 시민민주혁명의 약자입니다. CD에서 미국은 민주화 세력이고, 남한은 주변부 자본주의 사회라고 봅니다. 지금 남한에서 민주혁명의 주도 세력은 중간계급, 즉 시민입니다. 이들의 주도로 독재를 타도하고 민주정부를 수립해서, 연후에 민중의 역량을 키워야 합니다.

  NDR은 National Democratic Revolution, 민족민주혁명의 약자입니다. ND에서는 미국은 민주화 세력을 지원하는 대신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사회인 남한에 신식민지적 침탈을 하고 있습니다. 운동은 노동자, 농민, 민중과 같은 민중이 주도하고, 진보적 청년, 학생이 선도하되, 소부르주아, 자유주의자와 같은 시민과 제휴해야 합니다. 반제반파쇼투쟁을 통해 민주적이고 민족적인 범세력연합권력을 탄생시키는 것이 목표입니다.

  가장 급진적인 것은 PDR입니다. People’s Democratic Revolution, 민중민주혁명이죠. 남한을 국가독점자본주의 사회로 규정하는 PD(연후 NL-PD 대립 구도를 형성하는 PD와는 시대상, 내용상 차이가 있다는 점에 주의하셔야 합니다)는 상대적으로 미국과 관련된 언급을 하지 않습니다. 이들도 노동자, 농민, 빈민을 운동의 주체로 보지만, 중간계급과의 제휴, 연대는 불필요하며 오히려 김영삼, 김대중과 같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자”는 적대 세력이라 규정합니다. 반파쇼투쟁을 통해 군부독재를 종식한 뒤 즉각 민중권력을 수립하자는 것이 이들의 목표죠.

  C-N-P 논쟁이 중요한 이유는 이후 등장하는 CA, NL, PD 등 노선에서 등장하는 미국에 대한 태도, 한국사회 규정, 운동의 주체, 방법론 등이 맹아적 형태로 벌써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NL 노선의 탄생도 거슬러 올라가면 C-N-P 논쟁의 결과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C-N-P 논쟁에서 다수의 동의를 얻은 것은 NDR론이었습니다. 연후 NDR론을 계승한 삼민혁명론에 입각해 각지의 대학에는 민족통일·민주쟁취·민중해방 투쟁위원회(삼민투)가 꾸려지죠. 그리고 NL은 삼민혁명론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며 화려하게 등장, 학생운동의 역사를 쓰게 됩니다.     


4. NL의 탄생과 성장


  삼민투가 곳곳의 대학에 꾸려진 85년으로 향해봅시다. 삼민투는 파쇼체제의 속성으로 삼반성, 즉 반민족, 반민주, 반민중을 거론합니다. 그리고 그 반향은 민족운동, 민주운동, 민중운동이라는 결과죠. 이때의 민족운동이 곧 반미운동입니다. 삼민혁명론에서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투쟁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며, 운동 역량은 “반파쇼 민주전선”으로 집결해야 합니다.

  이 시기 두 사건이 일어납니다. 삼민투의 미문화원 점거 농성과 IMF, IBRD 총회의 서울 개최입니다. 미문화원 점거 농성에서, 삼민투는 "미국이 우리에게 진정한 우방과 자유세계의 수호자로 인식되기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는 다소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이며 “우리는 반미가 아니”라고 선언한 뒤 농성을 해제합니다. 또한 IMF, IBRD 총회는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금융자본주의의 수뇌 회의와 같은 행사인데, 이 중대한 시기에 제국주의를 타격하는 투쟁을 삼민투가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는 지적이 시작됩니다.     

“반전반핵 양키고홈”, “미제의 용병교육 전방입소 반대”를 외치며 분신한 김세진, 이재호 열사의 2주기 추모식 및 자주통일범국민결의대회가 진행중인 서울대 아크로폴리스 광장 (1988. 04. 28)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86년 3월 18일, 서울대에서는 성조기로 감싼 허수아비의 화형식이 거행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역사적인 구호 ‘양키고홈’이 등장하죠. 이때 결성된 반전반핵투쟁위원회는 반미 자주화 반파쇼 민주화 투쟁위원회로 이어집니다. 이른바 자민투입니다.

  자민투는 삼민혁명론을 반대하며 한국사회의 혁명론은 NLPDR이라 주장합니다. NL의 탄생입니다. 그들은 남한이 식민지반봉건 사회라고 규정합니다. 전두환의 파쇼 체제는 미제국주의의 대리통치에 불과하며, 민중은 반제자주화투쟁의 반미구국통일전선으로 나서야 합니다. 이때 NL이 내세웠던 또 하나의 현안은 조국통일촉진투쟁입니다. 분단은 미제 강점에 의해 한국 민중의 민족자립 요구가 짓밟힌 결과인 까닭입니다. 위에서 썼듯이, 타 노선과 차별화되는 NL의 인식은 무엇보다 지금은 미제의 식민 지배 현실을 폭로하고 이에 저항할 때라는 것입니다.

  NL 노선의 자민투가 NDR 노선과 삼민투를 공격하며 탄생했다면, 삼민투를 이어받은 것은 반제 반파쇼 민족민주투쟁위원회(민민투)입니다. 물론 민민투라고 삼민투의 노선을 그대로 계승한 것은 아닙니다. 기존 NDR 노선의 한계를 보완할 필요를 느끼며 등장한 세력이라고 할 수 있겠죠. 단, 똑같이 삼민투의 한계를 지적하며 나타났다 하더라도 민민투는 자민투에 비해 계보, 이론, 실천 차원에서 삼민투와의 연계성이 더 두드러집니다. 이를 아래의 내용에서 비교해보시기 바랍니다.

  민민투의 노선은 CA입니다. CA의 남한 규정은 예속적 국가독점자본주의 사회입니다. 그들은 파쇼 체제가 제국주의에 의존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어느 정도 독립성이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제국주의를 우선적으로 직접 타격해야 한다는 NL 노선의 이른바 반제직투론은 오히려 반파쇼민주화투쟁의 발목을 잡는다고 반박하죠. CA는 Constitutional Assembly, 제헌 의회의 약자입니다. 그들의 전술은 아예 새로 헌법을 제정할 의회를 소집하자는 것, 그리고 새로운 헌법을 매개로 민주적 권리들을 쟁취하자는 것입니다.

  이때 NL은 당면 과제를 수행할 민중의 범위를 넓게 잡았습니다. 민중에는 노동자, 농민뿐만 아니라 소부르주아, 민족부르주아, 애국적 군인들까지 포함되었죠. 뿐만 아니라 신민당, 민주화추진협의회 등 보수파와도 제휴해야 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반면 CA는 노동자 계급이 헤게모니를 쥐어야 함을 강조하고, 오히려 보수파의 계급적 본질을 폭로해야 한다며 반박했습니다. 이어지는 CA에 대한 NL의 비판은 대중성이 떨어진다는 것이었죠.

  어쨌든 자민투의 비판은 굉장히 유효하게 작용했습니다. 각 대학에 있었던 삼민투 혹은 민민투의 상당수가 자민투로 전환했습니다. 심지어 몇 캠퍼스의 경우 이름만 민민투이고 실상은 자민투의 노선을 따르는 일도 비일비재했습니다. NL은 삽시간에 삼민투계의 헤게모니를 무너뜨리고 학생운동을 장악하기 시작했습니다. 김영환의 『강철서신』, 김정일의 「주체사상에 대하여」가 유포되며 주체사상이 유입된 것도 이 시기였습니다.    

 

백골단의 투입으로 엉망이 된 건국대 행정관 옥상 (1986)Ⓒ건대신문


  이즈음 10월 28일, 건대 항쟁 사건이 일어납니다. 2000명의 학생들은 자민투와 민민투로 나뉜 학생운동을 통일하자는 취지에서 설립된 전국반외세반독재애국학생투쟁연합(애학투련) 결성식을 건국대에서 진행한 뒤 귀가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평상시와 달리 대학가에서는 검문조차 없었죠. 그 순간, 경찰의 토끼몰이식 진압이 시작됩니다. 학생들은 경찰에 쫓겨 캠퍼스 건물로 들어가고 안전 귀가 보장시 자진해산하겠다고 했지만 경찰은 자수를 요구합니다. 이후 이 사건은 정부에 의해 ‘공산혁명분자 건국대 점거난동사건’이라 발표됩니다.

  여러 정황 증거를 고려할 때, 건대 항쟁은 전두환 정권이 기획한 공안몰이 사건입니다. 그리고 건대 항쟁을 거친 NL 내부에서는 대중적, 전국적 투쟁 조직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강화됩니다. 그들의 투쟁 구호도 최대한 선명하고 대중적인, 독재 타도와 직선제 쟁취로 집중되죠. 건대 항쟁은 NL 내부에서 운동 방법론에 대한 큰 교훈을 남긴 사건이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명동성당을 점거하고 직선개헌 쟁취, 민주정부 수립을 내건 시민들과 학생들 (1987. 06. 13)88년도 보도사진 연감

 


  그리고 마침내 87년, 6월 항쟁이 발발합니다. 학생운동권 내부 노선 투쟁의 관점에서 6월 항쟁을 정리하자면, 이는 NL의 승리와 CA의 몰락을 결정지은 사건이었습니다. 우선 NL이 내세웠던 것은 직선제 쟁취, CA가 내세웠던 것은 제헌의회였습니다. NL은 대중이 바라는 바를 정확한 슬로건으로 꽂아넣었고, 결과적으로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집니다. 반면 CA가 소망했던 제헌을 통한 전면적인 체제 변혁은 이루어지지 않았죠. 또한 차후 치러진 대선에서 NL은 김대중 비판적 지지를 선언, 절반의 성과를 가져갔던 반면, 독자 민중 후보를 고집했던 CA는 백기완 후보가 사퇴함에 따라 별다른 반향을 얻지 못했습니다. 대중과 훌륭하게 결합한, NL의 승리였다고 말할 수 있겠죠. 한편 CA는 사실상 파산하여 일부 NL 좌파와 결합, PD를 형성합니다. NL 대 PD라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구도가 형성된 것은 보통의 인상과는 다른, 89년부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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