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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윤호 Jul 23. 2017

「NL 학생운동사」

I. NL의 탄생 배경,  안똔이 쓰다.

     


1. 들어가며-NL이란 무엇인가


  학생운동 내 NL에 대해 이야기하기에 앞서 우리가 답해야 하는 질문은, NL이란 무엇인가입니다. 무언가를 정의하는 방법에는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는 논리적 방법, 둘째는 역사적 방법입니다. 논리적 방법이 NL을 시간의 흐름으로부터 떼어놓고 그것을 규정할 수 있는 개념을 내놓는 방식이라면, 역사적 방법은 NL의 발생, 발전, 변화를 시간순으로 기술하는 방식입니다. 여기에서 한 번 더 나누자면, 정의의 방식에는 긍정적 방법과 부정적 방법이 있습니다. NL이란 무엇이다, 라는 말하기 방식에 더하여 NL이란 무엇이 아니다, 라는 말하기 방식이 합쳐진다면 우리에게 NL의 상은 더욱 선명해질 수 있겠죠.     


  결국 우리는 학생운동 NL을 NL이 아닌 다른 것과 비교, 대조하면서 그것이 어떻게 발생하고 변화해 왔는지를 추적하는 동시에 그것의 개념을 규정할 것입니다. 다만 본문 및 팟캐스트에서 팀 이스크라가 상대적으로 주목하는 것은 NL의 역사적 측면입니다. 논리적 차원에서의 조금 더 상세한 설명을 원하신다면, 앞서 제가 쓴 글 「NL-PD 개론 1」을 참조해주시기 바랍니다. 일단 이 글에서는, 자본주의 중심부가 아닌 제3세계 사회주의 혁명의 단계론인 NLPDR(National Liberation-People‘s Democracy-Revolution)에서 남한 사회는 식민지반봉건사회에 해당하므로 지금은 반미자주, 통일촉진, 즉 민족해방(NL) 운동을 해야 하는 단계라는 노선이 NL이라고 간략하게 언급해 두겠습니다.

  이하 이어질 학생운동 내 NL의 역사에 대한 서술은 엄연히 실재했던 운동가들, 운동조직들을 특정 개념, 범주로 도식화했기 때문에 지극히 일반적인 성격을 띱니다. 구체적으로는 같은 조직 내에서도 얼마든지 이견들이 공존했고, 그들의 실천 또한 언제나 논리적으로 일관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개념과 달리 현실은 머리 밖에 있는 것이니까요. 그러니 독자 여러분께서는 이 점을 읽으실 때 유의해주시고, 또 양해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2. 80년 광주, NL의 요람을 마련하다


   NL에 대한 흔한 오해는 NL이 80년대 운동권을 장악한 거대 세력이었다는 다소 불분명한 인상입니다. 이 인상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실상 NL은 86년 이후에야 등장하여 급속하게 성장한, 당시로서는 새로운 노선이었습니다.     

  우선 NL이 등장한 배경을 살펴보도록 합시다. 20세기 중반 이후 제3세계 좌익 운동의 역사는 곧 반미(反美) 운동의 역사였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호치민의 베트남, 나세르의 이집트, 카스트로의 쿠바를 비롯하여 흔히 AALA라 불리는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반미의 기치가 높이 솟아올랐죠. 또한 유럽에서는 68 혁명이 발발, 학생들이 소르본 대학에 마오쩌둥의 사진을 내거는 상징적인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반면 남한에는 60년대 세계를 휩쓴 혁명의 불길이 사실상 전혀 접근하지 못했습니다. 박정희 정권이 조그만 불씨 하나도 국내 유입을 철저히 막았거니와, 한국인들에게 반미 정서가 큰 영향을 끼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미국은 한국전쟁에서 남한을 지켜주고 연후에도 계속 원조 물자를 지원해준 고마운 우방일 뿐만 아니라, 박정희 정권에 반대한 사람들에게조차 자유의 나라, 민주주의의 나라였거든요.     

  그러나 12·12 쿠데타로 전두환이 집권하고 광주에서는 대학살이 벌어집니다. 저는 항쟁의 기억인 동시에 참극의 기억인 80년 광주가 97년 이전까지의 남한이라는 시공간을 결정지은 최대의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광주 항쟁은 이전까지 “반미의 무풍지대”라 불렸던 남한의 정치 지형을 송두리째 뒤바꿔 놓았습니다. 항쟁 당시 광주에는 한 장의 대자보가 나붙었습니다. 시민군을 지원하기 위해 부산에 미국의 항공모함이 입항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는 광주에 계엄군이 투입되더라도 대북 전선에 공백이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또한 5월 27일, 주한미군사령관 존 위컴은 신군부의 도청진압작전을 승인했습니다. 자유의 나라, 민주주의의 나라로 알려졌던 미국이 신군부의 광주 학살을 묵인했을 뿐만 아니라 사실상 조력한 셈이죠.

  이후 위컴은 한국 현지 상황에 관한 인터뷰에서 “한국인은 들쥐와 같은 민족이어서 누가 지도자가 되든 복종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한국의 국민들에게는 적합하지 않다.”라고 발언하기까지 했고, 이 발언은 외신을 통해 국내에 전해져 반미 감정을 자극했습니다. 또한 86년 한미통상협상(이때부터 소위 양담배가 시판되기 시작합니다)으로 정점에 달하는 80년대의 미국 주도 농산물 시장 개방 요구, 윤간 사건을 비롯한 주한미군의 범죄는 반미 정서에 기름을 끼얹습니다.  

  광주시의원을 지낸 전남대 84학번 김보현은 NL이 서울에서 정립되기 전부터 광주에 반미, 자주적인 NL 기류가 자생적으로 형성되어 있었다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5·18이 있었던 바로 그 해 12월 9일, 광주 미국문화원에서는 화염이 치솟습니다. 5월의 광주는 80년대를 만들어냈고, 80년대 반미투쟁의 봉화는 광주에서 첫 불이 타올랐던 것이죠.     


3. NL 탄생 이전, 학생운동권의 논쟁 및 분화


  이제 시선을 광주에서 서울의 대학가로 돌려봅시다. 주목해야 할 연도는 5·18로부터 4년이 흐른 84년입니다. 왜냐고요? 학생운동의 외부적으로는 학원자율화 조치가, 내부적으로는 NL 노선 탄생의 시발점이 된 각종 논쟁이 시작된 해이기 때문입니다.     

“총학생회 부활준비를 위한 공청회” (1984.05. 경남대)

Ⓒ 경남도민일보     

  학원자율화란 학원사태로 인해 제적된 학생들의 복귀, 캠퍼스에서의 사복경찰 철수 등을 비롯한 일련의 조치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때 학원자율화 조치의 결과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학도호국단이 사라지고 학생회가 부활한 일이었죠. 학도호국단은 명목상 학생들의 단체이지만 실질적으로 학교와 정권에 의해 관리되는 관변단체였습니다. 그렇기에 지금까지의 학생운동은 주로 소수의 학생들이 끈끈하게 뭉친 서클들에 의해 주도되어 왔죠. 하지만 학생회가 부활함에 따라, 이제는 폐쇄적인 서클이 아닌 학생 대중이 참여하는 학생회 차원의 운동이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변화된 상황은 학생사회 속에서 앞으로 운동을 어떻게 해나가야 할지에 대한 여러 논쟁을 낳았습니다. 제가 본문에서 소개해드리고자 하는 대표적인 논쟁은 ‘깃발-반깃발 논쟁’‘C-N-P 논쟁’입니다. 물론 이 두 논쟁은 NL이 탄생하기 이전의 것이기에 NL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들을 언급하는 것은, NL 노선의 탄생과 함께 불거진 논점들, 차후 계속해서 발생하는 학생운동에 대한 논점들이 이미 이들 속에서 초보적인 형태로 나타나고 연후까지 영향력을 발휘하는 까닭입니다.

  84년 상반기에 시작된 깃발-반깃발 논쟁은 「깃발」이라는 소책자를 둘러싸고 벌어졌기에 그런 이름이 붙었습니다. 또는 참여한 세력의 이름을 따와 MT-MC 논쟁이라고도 불립니다. MT 그룹은 그들이 형성한 투쟁조직 주화 쟁위원회의 앞 글자, 즉 민투를 따와 MT이고, MC 그룹은 주류(Main Current)라는 의미에서 MC입니다.

  논쟁의 대상이 된 것은 운동 내 학생회의 위상이었습니다. 학생회는 대중조직입니다. 쉽게 말해 학생회는 학생이라면 자동으로 회원이 되는 기구이지, 서클처럼 운동에 주도적인 학생들이 참여하여 이념을 학습하고 투쟁에 헌신하는 조직이 되리란 보장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 문제에 관하여 MT 그룹은 「깃발」의 주장에 찬성했고, MC 그룹은 반대했습니다.

  「깃발」의 견해를 수용한 MT 그룹은 학생회가 투쟁 여력이 충분하지 않으므로 비합법 이념서클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연후 MT 그룹은 C-N-P 논쟁에서 NDR론을 받아들이고, 이는 삼민혁명론으로 이어집니다. 반면 MC 그룹은 학생회 자체가 투쟁체이고, 외부의 지도 대신 스스로 투쟁의 방법을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즉 MT 그룹과 달리 MC 그룹은 대중성을 강조한 것이죠. MT 그룹이 결과적으로 NDR론을 받아들였다는 것, 그리고 MC 그룹은 대중성을 중시했다는 것. 이 대립 구도를 잘 기억해두시기 바랍니다.   연이어 발생한 것이 C-N-P 논쟁입니다. 흔히 CDR론-NDR론-PDR론의 대립으로 정리되는 이 논쟁은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에서 촉발되었습니다. 주의해야 할 것은, 이미 민청련 내부에 각각 CD, ND, PD라는 별개의 노선이 있어 논쟁을 시작한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애초에 CDR, NDR, PDR이란 민청련 내 세미나에서 지금까지 제기된 민주혁명론들을 세 가지로 정리하면서 만들어진 이름입니다. 이러한 분류 및 정의가 이루어진 후에야 노선의 분화가 정립되었다고 보는 정확합니다.

  C-N-P 논쟁은 민주변혁논쟁이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C-N-P 논쟁이 남한 사회의 민주화를 어떻게 이룰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었기 때문입니다. 세 개의 노선은 크게 미국과 한국 사회에 대한 규정, 그리고 운동의 주체와 현재 단계에 대한 진단에 따라 갈라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CDR은 Civil Democratic Revolution, 시민민주혁명의 약자입니다. 즉 CD 노선이란 시민민주 노선이라고 보면 되겠죠. CD에서 미국은 민주화 세력이기에 남한 군부와 상대적 갈등 관계에 놓여 있고, 남한은 주변부 자본주의 사회라고 봅니다. 단, 아직 노동자, 농민, 빈민 등 민중의 세력은 미약하므로 지금 남한에서 민주혁명의 주도 세력은 중간계급, 즉 시민입니다. 교양 있는 화이트칼라 도시인, 야당 정치인과 같은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죠. 이들의 주도로 독재를 타도하고 민주정부를 수립해서, 연후에 민중의 역량을 키워야 합니다.

  NDR은 National Democratic Revolution, 민족민주혁명의 약자입니다. 민족민주 노선, ND에서는 미국은 민주화 세력을 지원하는 대신 신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사회인 남한에 신식민지적 침탈을 하고 있습니다. 운동은 노동자, 농민, 민중과 같은 민중이 주도하고, 진보적 청년, 학생이 선도하되, 소부르주아, 자유주의자와 같은 시민과 제휴해야 합니다. 반제반파쇼투쟁을 통해 민주적이고 민족적인 범세력연합권력을 탄생시키는 것이 목표입니다.

  가장 급진적인 것은 PDR입니다. People’s Democratic Revolution, 민중민주혁명이죠. 남한을 국가독점자본주의 사회로 규정하는 PD(연후 NL-PD 대립 구도를 형성하는 PD와는 시대상, 내용상 차이가 있다는 점에 주의하셔야 합니다)는 신식민지, 주변부와 같은 규정이 별반 없다는 것에서 보이듯이 상대적으로 미국과 관련된 언급을 하지 않습니다. 이들도 노동자, 농민, 빈민을 운동의 주체로 보지만, ND와 달리 중간계급과의 제휴, 연대는 불필요하며 오히려 김영삼, 김대중과 같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자”는 적대 세력이라 규정합니다. 반파쇼투쟁을 통해 군부독재를 종식한 뒤 즉각 민중권력을 수립하자는 것이 이들의 목표죠.

  C-N-P 논쟁이 중요한 이유는 이후 등장하는 CA, NL, PD 등 노선에서 등장하는 미국에 대한 태도, 한국사회 규정, 운동의 주체, 방법론 등이 맹아적 형태로 벌써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때 나타나기 시작한 논점들은 향후 반복, 발전되었고, NL 노선의 탄생도 거슬러 올라가면 C-N-P 논쟁의 결과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C-N-P 논쟁에서 다수의 동의를 얻은 것은 NDR론이었고, 위에서 이미 MT 그룹이 이를 수용했다는 점을 말씀드렸습니다. 연후 NDR론을 계승한 삼민혁명론에 입각해 각지의 대학에는 민족통일·민주쟁취·민중해방 투쟁위원회(삼민투)가 꾸려졌습니다. 그리고 NL은 삼민혁명론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며 화려하게 등장, 학생운동의 역사를 쓰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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