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22일차

9개월 호주에 머물던 친구가 떠나간다. 그리고 혼자가 된다.

by 백윤호

지난한 노동은 계속 된다. 노동의 시간은 약속되지 않는다. 그 날의 사정에 따라 다르다. 기계의 고장은 인간의 노동을 멈춘다. 한 시간의 노동은 그렇게 멈췄다. 10불. 많은 돈은 아니다. 하지만 낯선 타국에선 아쉬운 돈. 한 푼이라도 벌어야 다음을 생각할 수 있다. 호주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은 한정돼 있다.

9개월째 호주에 있던 친구가 내일 한국으로 떠난다. 부럽다. 그는 목표했던 바를 전부 이루고 갔다. 경험과 영어. 그가 원했던 건 조용한 맨리에서 서핑을 하며 외국친구들을 사귀는 것이었다. 자연스레 영어는 늘었다. 9개월이란 시간동안 그는 한국에서 있을 때와는 다른 성장을 했다. 눈에 보였다. 9개월 후 내 모습이 저럴 수 있을까. 아직은 어두컴컴하다.

친구와 함께 1시간 일찍 시작된 휴식을 보내기로 했다. 성큼성큼 걸음을 옮긴다. 전날 태국 친구와 술이 떡이 되도록 마신 그. 땀 좀 빼자며 맨리비치까지 걸음을 옮긴다. 걸어가며 이런 저런 얘길 나눈다. 새로 주방에 들어온 직원부터 한국에 있는 친구들 얘기까지. 무슨 얘길해도 즐거워 한다.

맨리비치는 사람들이 그득하다. 화요일임에도 서핑을 즐기는 사람들, 풀밭에 누워 오수를 즐기는 사람들, 백사장에 누워 책을 읽는 사람들이 곳곳에 박혀있다.

"기왕 온 김에 아이스크림이나 먹고가자."

첫 날, 맨리에서 유명하다던 아이스크림 집이 생각나 꺼낸 말. 걸음을 옮긴다. '밴앤제리' 체인점이라고 하는데 직접 본 것은 처음이다. 초콜릿퍼지와 스위트크림앤 쿠키를 골라 와플에 담았다. 8.4불. 비싸다.

그래도 한번 쯤 경험삼아 먹을만은 하다. 양이나 맛은 돈에 비하면 아깝지는 않다.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맨리비치 길을 따라 걸으면 높은 전망대가 위치한 노던헤드로 갈 수 있다. 우리의 목표는 어느 새 그곳으로 정해졌다. 비치를 따라 이어진 길. 저택들이 즐비하다.

"이곳은 맨리에서도 가장 비싼 집값을 자랑하는 곳이지. 가끔 이 집에서 바로 바다로 뛰어드는 사람이 있다니까."

아니다 다를까. 서핑보드를 들고 바다로 향하는 남자가 눈에 띄었다.

이곳에서 바다는 일상이다. 대부분의 가게가 4시면 문을 닫는다. 4시 이후에는 사람들이 자신만의 여유를 즐긴다. 호주에서 인상이 깊었던 점은 그것이다. 여유. 야근이 없고 언제나 자신만의 취미를 즐기는 사람들. 인생을 행복하게 가꾼다고 할까.

노던헤드에 도착해 굽이굽이 산길을 올라갔다. 바위를 타고 오솔길을 지나니 어느 새 정상이다.

정상에서 바라본 맨리는 색달랐다. 푸른 빛이 찬연했다.

"내가 언젠가 호주는 파랗다고 했잖아. 봐바. 한국은 회색이지만 이곳은 자연 때문에 푸르러."

장관을 보며 감탄하고 있는 나에게 친구가 말했다.

날씨가 조금은 흐렸지만 경치를 방해할 수 없었다. 푸르른 자연이 곳곳에 묻어나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또다른 멋이다.

푸르른 바다도 한 몫했다. 드넓은 바다를 보니 기분이 뻥 뚫린다. 그가 이곳에 정착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 광경은 놓치고 싶지 않다.

"처음에 맨리 왔을 때 일 끝나면 2시간씩 바다만 바라보고 있었어. 너무 좋았거든. 언젠가 나도 강원도에 집을 짓고 살고 싶어. 이런 자연경관을 보면서 말이지."

바다 저멀리 무지개가 보였다. 자연상태의 무지개를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말로만 듣던걸 직접 경험하는 즐거움. 그 즐거움을 무엇으로 표현하랴.

바위에 걸터앉아 호주 생활에 대한 소회를 들었다.

"이곳은 백인에게는 정말 좋은 것 같아. 동양인이 살아 남기에는 글쎄... 이곳에서의 여유도 사실은 백인들에게만 적용되는 것 같아."

동양인들이 많은 시간을 일해도 저임금에 시달려야 되는 걸 말하는 듯 했다. 하긴. 같은 일을 해도 백인과 동양인 간의 페이가 차이가 나는건 엄연한 사실이다. 게다가 영어가 안되는 동양인들은 호주에 정착한 자국민 밑에서 일을 하게 되는데... 확실히 저임금이다. 심하게는 10불을 주고 부리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영어가 수월하고 가족이 있다면 이곳이 좋지. 야근없고 경쟁에 찌들리지 않아도 되고. 저녁마다 내 삶이 있고. 한국에서 다시 그런 생활을 해야된다는게 끔찍하다."

같이 집으로 돌아가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무언가를 놓치고 있는건 아닐까. 푸르른 호주를 보며 회색빛 한국이 잠시간 측은해보였다.

이들의 여유가 부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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