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막노동하는 아버지를 둔 아나운서 딸입니다> 아나운서라는 직업을 갖게 된 후 사람들은 내 직업 하나만을 보고 당연히 번듯한 집안에서 잘 자란 사람, 부모의 지원도 잘 받아 성장한 아이로 생각했다. 그 당연한 시선으로 아버지는 무슨 일을 하시냐 물어오면 "건설 쪽 일을 하시는데요"라고 운을 떼자마자 아버지는 건설사 대표나 중책을 맡은 사람이 됐고, 어느 대학을 나오셨냐 물어오면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아도 아버지는 대졸자가 됐다. 부모를 물어오는 질문 앞에서 나는 거짓과 참 그 어느 것도 아닌 대답을 할 때가 많았다(18페이지)
기준을 정해놓고 질문을 하는 사람들의 물음표도 잘못됐지만, 그 기대치에 맞춰 정확한 대답을 하지 못한 나의 마침표도 잘못됐다. 겉모습을 보고 '이럴 것이다'틀을 씌우는 생각들은 어쩌면 서로가 서로에게 범하는 가장 큰 결례가 아닐까. 보통의 무례 속에 우리는 서로에게 잘못된 질문과 답을 하며 누군가에게 부끄러운 사람들이 되어간다(18페이지)
친구들의 아버지가 맞고 내 아버지가 틀린 것이 결코 아닌데, 그들 기준에 맞춰 비교하며 나는 빨간펜을 들고 나 스스로 잘못된 채점을 했다. 그것은 애초부터 정답이 없는 문제였고, 문제도 아니었다.... 아나운서라는 직업이 대단한 일도 아니고, 막노동이 변변치 않은 직업도 절대 아님을 나도 너무나 늦게 깨달았다(19페이지)
내가 가장 싫어하는 말은 "할 일 없으면 막노동이라도 해"라며 막노동을 일의 막장으로 치부하는 누군가의 무심한 한마디였다. 그것은 아빠의 유일한 할 일이었다(36페이지)
기쁘다 슬프다 아프다는 감정 다음으로 서럽다는 마음을 일찍이 알게 됐다. 자기 이름 석 자 제대로 쓰지 못하는 그 손이, 작고 마르고 구부정한 그 몸이, 여유와 편안이 없었던 그 마음이, 나는 서러웠고 아빠는 힘겨웠다.... 어린 시절의 나는 스스로 활기찼고 때때로 우울했다. 자라는 동안 아빠를 부정했고 다 자라고 나서야 인정했다. 서러운 만큼 부정하고 나니 어른이 됐다. 시간이 많이 걸렸다(37페이지)
아빠의 노동은 나를 정직하게 키웠다. 바르게 살라는 훈계 한마디 없이 저절로 그 가르침을 배웠다. 부지런함과 성실함은 나에겐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보고 체득된 것이었다. 평생 첫 차를 타고 출근했던 아빠의 시작을 따라 나도 일찍이 학교에 등교했고 12년 내내 개근상을 받았다(37페이지)
나의 부모가 겨우 몇만 원의 돈을 불리는 방법은 '반복'밖에 없었는데 노동의 강도가 공들인 시간에 비례해 월급도 일당도 늘어났다면 그 고난은 조금이나마 줄어들었을까. 아빠의 직업과 엄마의 부업을 생각하면 이상하게 나는 자꾸만 뭘 원망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무언가를 미워하며 겨우 화를 삭였다(92페이지)
나를 키우며 일과 집안일을 엄마는 모두 성실히 해냈다. 육아와 노동 그리고 가사노동까지 세 명 몫의 일을 혼자 감당하며 엄마의 생기는 세 배씩 빠르게 소진되었을 것이다(95페이지)
나는 나만 생각했고 지금도 내가 제일 중요하다. 부모의 노동으로 자란 자식은, 부모도 노동도 아닌 자신만을 생각한다. 이 모순. 이런 이기심. 그래서 자식은 평생 부모보다 생각도 마음도 좁은 것이다(101페이지)
부모에 대한 나의 짐작은 항상 늦고 예상보다 초라하다. 나는 자라나며 한 번도 엄마가 가족들이 모두 나간 후 혼자 집에서 어떻게 밥을 먹는지 생각해 본 적이 없고, 아빠가 일터에서 어떤 시간들을 보낼지 짐작해본 적이 없다(104페이지)
엄마의 밥상을 마주했던 그날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대학 졸업 후 첫 사회생활. 매일 아침 바쁘게 나가버리는 딸을 위해 뭐라도 갈거나 섞어 먹였던 엄마... 매일 저녁 퇴근 후에는 지쳐 들어오는 딸을 위해 찌개를 끓이고 반찬은 꼭 종류별로 세 가지 넘게 만들어 내주었던 엄마.... 하루는 출근 후 몸이 좋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일찍 조퇴를 하고 집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 문을 열어보니 엄마는 찬밥에 물을 말아 김치 하나를 놓고 허공을 바라보며 씹고 있었다. 엄마의 밥상에는 찌개도 그릇도 젓가락도 없었다. 그 찬물에 만 밥마저 내가 아침에 남기고 간 것이었다. 엄마는 그렇게 평생을 남편과 자식을 위해 한가득 밥상을 차리고 자신은 그저 한 가지 반찬으로만 허기를 채웠다(105페이지)
자식은 항상 부모보다 늦다. 후회는 말 그대로 항상 뒤늦게 오는 감정이어서, 도저히 앞으로 오는 법이 없어서. 너무나 늦게 부모의 일상을 알아차리며 뉘우칠 뿐이다(107페이지)
결국 나는 엄마 아빠의 학력을 고졸로 고쳐 쓰고 아빠의 직업을 회사원이라 써서 다시 제출해야 했다. 흔적을 남긴 공적 거짓말. 그럴 수도 있는데 그럴 수 없다고 말하는 어른들의 말속에서 어린 나는 지우개를 꺼내야 했다. 그때부터 철이 들기 시작했다. 내 부모의 배경을 인지하면서부터. 배움에는 두 가지 효능이 있는데 나도 그렇게 되어야지 하는 것과 나는 그렇게 되지 말아야지 하는 것. 나는 후자였다. 나는 초등학교 졸업을 하며 중학교가 아닌 대학교에 꼭 가야지 결심했다. 초등학교 6학년 나의 장래희망은 '대졸 회사원'이었다. 어린아이가 일찍 철이 들면 많은 것들을 생략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많이 그리고 자주 알아서 했다(127페이지)
한때의 결핍은 강한 욕구가 되어 나를 살게 했다(129페이지)
나는 삶이 슬픈 게 아니라 서러웠다. 여유가 없는 형편이 서러웠고, 무지한 부모가 애통했고, 철이 너무 일찍 들어버린 내가 서글펐다. 눈치가 빨라 어리광조차 부리지 못하는 아이, 갖고 싶은 것이 생겨도 사달라 부모에게 말하면 안 된다고 스스로 입을 틀어막은 아이, '해줘'가 아니라 '내가 할게'라고 더 많이 말하는 아이, 어린 날의 나는 많이도 서러웠다(131페이지)
사실 나는 삶이 재미있는 게 아니라 재미있어야 했다(131페이지)
내가 서러운 것은 부모님 때문이기도 했지만, 내가 명랑 쾌활한 것도 부모님 덕분이었다. 충분히 사랑받으면 결핍이 없어진다 했던가. 나는 나의 결여가 부모의 사랑으로 채워졌음을 이제야 알겠다.... 그런데 지나온 나는 '지금의 나를 만든 건 부모가 아니라 나'라고 이기적으로 생각하며 자랐다. 혼자 크고 혼자 이뤘다 느꼈다(132페이지)
나는 이제 내 삶이 서럽지 않다. 그렇다. 충분히 사랑받으면 결핍은 없어진다.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이 없거나 모자란 줄 알았던 지난 내 삶은 알고 보니 부모의 사랑으로 차고 넘치는 날들이었다(134페이지)
대학생 때는 학자금 대출을 받았는데, 부모님은 나의 한 학기 등록금이 얼마인지 내가 얼마의 대출을 받았고 얼마의 이자를 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내가 말하지 않았고 부모가 묻지 않았다. 서로가 서로에게 미안했기에(137페이지)
생각해보면 삶의 서프라이즈 같은 인연들이 있었다. 상담 요청을 할 때마다 내 얘기를 깊게 들어준 사람들이 있었고, 아무런 조건 없이 나를 믿고 도움을 주었던 분들이 있었기에 나는 순간순간 동력을 얻었다. 내 꿈은 은행에 빚진 것이 아니라 고마운 인연에게 마음으로 빚졌다. 그 빚을 꼭 갚아 빛나는 내 모습으로 보답하고 싶었다(139페이지)
자라오며 항상 돈은 나에게 지긋지긋하게도 따라붙는 풀지 못한 숙제 같은 것이었다. 꿈을 좇다가도 돈 때문에 그 방향을 우회하거나 틀기도 했다.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그 일 자체보다, 그 일을 하려면 얼마의 돈이 필요한지 계산부터 해야 했다. 나에게 용돈은 받는 게 아니라 버는 것이었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것도 아니었지만, 영화 <8마일> 에미넴의 대사처럼 '꿈은 높은데 현실은 시궁창'처럼 느껴졌다(144페이지)
나와 비슷한 누군가가 나처럼 아등바등 악다물며 빠릿빠릿 야무져지고 있다면 말리고 싶다. 마음을 고백해 오는 누군가 다가온다면 발그레 사랑도 누려보고, 시소와 미끄럼틀 말고 누군가와 나란히 앉아 여유롭게 그네도 타며 놀아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돌아갈 수 있다면 신나게 걱정 없이 한번 놀아보고 싶다. 놀라고 만들어놓은 터에서조차 지긋지긋한 돈과 미래에 대한 걱정과 씨름하느라 즐기지 못한 것이 많이 아쉽다.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다름 아닌 나였다(146페이지)
사실 부모의 마음은 통역이 필요 없다. 내가 어른이 되니 저절로 이해가 된다. 시간이 통역사다. 앞으로의 나의 시간들은 부모를 이해하는 날들만 남아 있다(160페이지)
엄마가 평생 해낸 집안일과 엄마가 평생 만든 음식들은 한 끼의 식사가 끝나거나 하루가 끝나고 나면 다 잊혀졌다. 그것은 자식이 한 가장 큰 망각이자 잘못이었다(189페이지)
시간이 지날수록 난 부모 앞에서 건너뛰는 단어와 문장들이 점점 많아졌다. 상대방이 많이 모른다고 생각되면 말의 생략이 생긴다. 설명도 어느 정도 알고 있을 때 할 수 있는 것이다... 엄마는 대화의 주제도 의, 식, 주로 제한적이었다... 그래서 엄마와의 대화가 길어지면 종종 마음이 울적해졌다. 나는 너무나 많은 설명이 필요했고, 부모는 너무나 많은 이해가 필요했기에 굳이 말하지 않기로 스스로 결론 내렸다. 엄마가 무언가를 물어오면 나는 자주 이렇게 답하곤 했다.
"응, 그런 게 있어 엄마."
엄마도 그런 게 무엇인지 한 번 더 묻지 않았다(201페이지)
엄마가 나에게 길게 이야기해줄 수 있는 분야는 오늘의 반찬과 내일의 날씨, 집 근처 시장물가라서 이제 결혼을 한 나는 엄마와 좀 더 신나게 대화를 할 수 있는 영역을 찾았다. "엄마, 오늘 저녁엔 뭐 해 먹을 거야?" "생태 한 마리 사 왔지. 찌개 해 먹을라고. 참나물 사다 들기름 넣고 무쳐먹고, 연근 사다 간장 넣고 졸여서 반찬 했어" "나도 생태찌개 해 먹어야겠다. 엄마 생태찌개에는 뭐 넣어?" 그렇게 엄마와 그 영역에서 오래오래 대화하기로 한다(202페이지)
'최고의 고수는 가장 유연한 자이다'라고 황현산 작가는 썼다(225페이지)
왜 나의 부모는 할 줄 아는 게 없는지... 뭉개져 비뚤어진 마음을 움켜쥐고 원망하며 한숨만 쉬다 잠이 들었다. 나는 나를 생각하는 마음이 커져 부모를 들여놓을 자리가 좁았다... 지금의 나는 결혼을 해 더 이상 부모와 같이 살지 않는다. 사실 평생을 같이 살 것도 아니었는데, 그깟 종이 하나 기계 하나 중요한 것이 아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의 나는 참 날카로웠다. 엄마와 아빠는 딸과 함께 살며 얼마나 따가우셨을까. 서른세 살의 나는 바늘 같은 딸이었다(233페이지)
'나는 그랬다'라고 꺼낸 한마디가 '나도 그랬는데'로 돌아오는 선순환임을 잘 안다. 너무 깊어 꺼내기 힘들었지만 팔을 뻗어 어딘가에 내놓았을 때, 박수 쳐주고 독려해 주는 독자들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나는 오늘도 열심히 부모님의 이야기를 쓴다(246페이지)
<아빠의 직업이 부끄러웠습니다> : 아빠의 노동을 부끄러워했던 딸의 참회록 나는 오랫동안 아빠의 직업을 부끄러워하며 살았다. 아빠는 그저 평생 누구보다 성실히 노동을 했을 뿐인데 못난 딸은 그 노동을 창피해하며 자랐다. 사람들은 그 노동 앞에 '막'이라는 단어를 붙여 불렀다. 막노동. 나는 그 단어가 너무 싫었다. 아빠는 노동을 막 하지 않았는데, 하루하루 목숨을 걸고 하셨는데, 왜 그 일은 막노동이라고 불리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취업준비생 시절 수백 장의 이력서를 쓰며 나는 자기소개서의 수십 줄을 채우는 것보다 가족 관계란의 아빠의 직업 한 칸을 채우는 일이 가장 어려웠다. 뭐라고 써야 할까?(259페이지)
창피한 건 아빠의 직업이 아니라 나였다. 그래서 나는 아빠의 노동을 글로 쓴다. 50년 치 밀려 있던 인정과 존중을 늦게나마 채우기 위해서 아빠의 일을 그리고 삶을 기록한다. 나의 글은 아빠의 이력서가 된다.. 그것이 내가 아빠의 평생 직업인 막노동 앞에 붙은 '막'이라는 한 글자를 지울 수 있는 방법이다. 나는 앞으로 오랫동안 아빠의 직업을 자랑스러워하며 살아갈 것이다(262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