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아이의 교과서를 포장한다. 아빠한테 배운 대로...새 학기에는 교과서를 포장해야지!
반짝이 1학년 2학기 개학 전날이다.
교과서를 포장하려고 새벽 일찍 일어났다. 새벽 4시, 밖이 어스름하다.
미리 해두면 좋았을 텐데 미루고 미루다 등교하는 날에 닥쳐야 한다(미루는 병은 불치병인가 보다)
문구점에서 사 온 투명 비닐을 벗겼다. 교과서는 총 5권.
대단한 의식을 치르듯 천천히 포장을 시작한다. 세상 참 편해졌네. 교과서에 딱 맞는 크기의 포장지라니... 자를 필요도 없고 간편해졌구먼. 교과서에 포장지를 두르고 테이프로 붙이기만 하면 된다.
교과서를 포장하는 이 장면, 매우 낯이 익은데...
아빠는 흰 달력으로 교과서를 포장해 주셨지
3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거실 한가운데 초등학교 1학년 여자아이가 앉아있다. 아빠는 아이 옆에서 교과서 포장을 준비 중이다.
우선 교과서를 가지런히 쌓는다. 흰 달력을 교과서 크기에 맞게 자른다. 그다음은 스카치테이프 차례.
아빠는 새 학기가 되면 내 교과서들을 정성스럽게 포장해 주셨다.
"교과서 포장은 역시 흰 달력이지. 빳빳해서 참 좋아"
포장이 끝나면 교과서를 손에 들고 촥촥 높이를 맞추고는 나한테 건네주셨다. 35년 전 그 시절 교과서를 포장하시던 아빠의 손놀림이 지금도 생생히 기억이 난다.
어릴 적 교과서 포장지는 흰 달력이었다
다들 교과서 포장하는 거 아니었나요?
어느 집이나 우리 집과 같은 줄로만 알았다.
새 학기가 되면 부모님이 아이들 교과서를 포장해 주시는 것 말이다.
그런데 반짝이 교과서를 포장하는 날 보고는 남편이 한마디 한다.
"그걸 왜 싸는 거야?"
이 느낌 뭐지? 이질감이 느껴진다.
당연한 걸 묻는 남편이 신기하기까지 하다.
"책이 더러워지니까 싸는 거지. 특히 남자애들은 책이 많이 찢어진다더라고."
"어차피 더러워지는데 왜 싸?
"자기는 어릴 때 부모님이 교과서 포장 안 해주셨어?"
"어. 한적 없는데?"
"아, 그래?!"
남자아이들 부모님은 책 포장을 안 해주셨나?
딸만 둘인 우리 아빠가 특별히 다정하셔서 교과서를 포장해 주셨던 걸까? 이제 와서 내 친구들 교과서가 포장되어 있었는지 알 길이 없다.
회사에 출근하면 7080 세대 남자 동료들한테 물어봐야겠다.
부모를 보고 자란다
'초등시절 아빠가 내 교과서를 포장해 주시지 않았더라면?'
나 역시 교과서를 포장하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새 학기에는 당연히 교과서 포장을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설날에 떡국을 먹는 의식처럼 말이다.
문득 반짝이가 보는 앞에서 교과서를 포장했어야 하는데...라는 아쉬운 마음이 든다. 그래야 반짝이도 나중에 아이들 교과서 포장을 해줄 텐데...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젓는다. 반짝이 아들딸 세대는 종이책이 없을지도 모르지. 교과서가 든 책가방을 메고 학교에 가는 모습을 못 볼 수도 있겠지? 어디서든 컴퓨터만 켜면 공부할 수 있는 학교로 바뀌는 그런 세대일 테니까?...
내 모습을 사진처럼 기억하는 아이들, 나를 되돌아보게 한다
어른이 된 지금, 내가 어릴 적 부모님을 답습하고 있다는 걸 자각할 때가 있다.
어느 날, 행복한 신혼생활을 만끽 중인 회사 후배가 자기 아내의 청소법을 들려주었다.
아내가 화장실 바닥을 청소기로 돌리는 모습을 보고 적잖이 놀랐다고 이야기해줬다. 물어보니 아내 친정집은 그렇게 청소를 한다고 하더란다.
듣는 나도 놀랐다. 우리 집에서 엄마가 화장실 바닥을 청소기로 돌리는 모습은 한 번도 못 봤기에...
우리 아이들도 나한테서 교과서 포장만 배우는 건 아니겠지?
나도 모르게 하는 행동을 아이는 다 지켜보고 있다. 그대로 보고 따라 한다. 싱크로율 100%라 놀랄 때도 많다. 어른이 되어서도 나와 같이 행동하겠지.
갑자기 어젯밤 자기 전에 별것 아닌 일로 반짝이, 귀요미한테 화를 낸 게 떠올랐다.
내 모습을 사진처럼 기억하는 아이들.
아이들을 위해 바른 행동, 예쁜 말을 써야겠다고 다시 한번 다짐해 본다.
* 저희 가족을 소개합니다 *
▷엄마(63세): 바쁜 딸을 대신해 8세, 6세 손자를 키우는 할머니.매일 새벽기도를 가고 매일 운동을 하십니다.
▷나,이쩡(42세):15년 차 회사원. 바쁜 워킹맘.14년째 주말부부. 새로운 걸 배우기를 좋아합니다.
▷반짝이(8세):시험관 시술을 통해 찾아온 첫째 아들.엄마와 할머니를 배려하는 아이.하지만 아직 아기입니다.
▷귀요미(6세):자연임신으로 찾아온 둘째 아들.손이 많이 가지만 귀엽습니다. 에너지가 매우 많습니다.
▷남편(42세):주말에만 만납니다. 과묵하지만 재미를 추구합니다. 반짝이,귀요미한테 인기가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