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무게는 자유의 범위와 반드시 비례하지는 않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무한히 열린 공간이지만 누구에게나 열린 세상 속 저마다 생활하는 공간은 아닌 듯 범위의 한계가 있을 것이다.
어떤 이는 홈 오피스를 하며 집 밖을 나서야 할 필요성조차 못 느끼며 살아가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내 생활공간이 어디인가 착각이 들 정도로 '역마살' 낀 생을 살아가기도 한다.
하지만 여행을 자주 떠나는 이라 할지라도 이는 일탈의 일부일 뿐, 잠시 맛보는 세상은 본인이 살아가는 세상과는 또 다른 공간이다. 평생을 나그네로 살아가는 삶이 아닌 이상, 모두가 스스로 금 그어놓은 자신만의 영역을 소유하고, 그 안에서 모든 것들이 이루어지는 삶을 살고 있는 것처럼 비추인다.
어려서 누구나 한 번쯤은 해보았을 땅따먹기 놀이처럼 자신의 영역을 조금씩 확장해갈 수도, 잃어갈 수도 있겠지만 결국 '내 세상'은 자신이 정의 지어놓은 범주 안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닌지.
소수의 우주인을 제외한 인간의 주 활동공간이 지구로 국한되어 있고, 세상의 모든 생명체가 살아가는 환경의 범위 역시 정해져 있으며, 우리에게 살아갈 환경을 제공하는 유일한 땅 '지구'의 공간도 유한하지 않던가?
그러하다면 이 지구를 품고 있는 미지의 우주도 아직 인류에게 발견되지 않은 또 다른 우주가 품고 있는 제한된 공간은 아닐까? 현존하는 것 중 무한한 공간이 과연 있을까라는 의문에 달하면서 세상사람들이 저마다 면적과 개념의 개인차가 있을 뿐, 각자 '나만의 세상'을 형성해 그 속에 '나'를 가두고, 갇혔다는 사실을 잊은 채, 그 제한된 공간 속에서 자유를 추구하고, 자유와 대면하며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신생아들의 세상은 아담한 요람에 국한되고, 환자들의 세상은 삭막한 병원으로 제한된다.
학생들은 대학입학을 삶의 최고목표로 살며, 직장인들의 삶은 목표와 성과에 치중돼있다.
저마다의 본분과 위치에 따라 살아가는 환경은 바뀌지만 공간의 제약은 피할 수 없음이 현실일 것이다.
다행히도 '닫힌 세계', "갇힌 세상"을 산다고 불행하진 않다.
그 세상이, 나의 세계가 열려 있다는 믿음을 품고 있는 이상 갑갑하게 느껴짐도 없다. 제한된 공간 속에서도 언제던 열리는 문 하나쯤 소유하고 있다면 필요에 따라 하시라도 너른 또는 자신이 모르는 미지의 세계로 외출은 가능한 법이니까. 세상이 넓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내가 사는 동네조차 벗어나지 못하며 살아가는 이들도 많을 것이고, 이 지구 상에 본인이 밟고 있는 땅 외의 세상이 존재함을 모르는 이들도 없지 않을 것이다. 세상이 엄청나게 넓다고 해도 호기심을 품지 못하면 디디고 있는 땅을 벗어날 생각에조차 미치지 못한다.
어렴풋이 초등학교 적 기억이 떠오른다.
우리 식구는 아빠의 일자리 따라 두 번에 걸쳐 사우디아라비아에 약 일 년씩 체류를 한 적이 있다. 도로에 택시도 별로 안 다니던 시대에 비행기를 탄다는 게 그저 신기하고, 위인집으로만 접한 라이트 형제의 공로로 내가 하늘을 날 수 있다는 사실 만으로 놀랍기만 했던 70년대 말.
그러나 그저 들떠있던 소녀에게 펼쳐진 세상의 현실은 그리 달콤하지 않았다. 이 나라는 지금도 아랍국 중에서도 보수적인 국가로 꼽힌다. 여성들은 내외국인 무관하게 활동이 극히 제한된 환경 속에 갇혀 산다. 어린 외국인의 눈에는 그 곳 여성들의 삶이 마치 새장 속 잡힌 새와 같은 처지로 비추였다. 하지만 그들도 그렇게 느끼며 살까? 아니 그렇지 않을 것이다. 우리 눈에 극히 국한된 자유, 남녀 불평등이라는 불리한 조건 속에서도 그들은 그 삶을 자유하며 즐기지 못한다고 누가 감히 자신있게 주장할 수 있을까? 그것이 그들의 문화이고, 전통이라면 존중해주어야 함이 옳겠지만 어린 나이에 목을 조여오는 공간의 제약이 너무도 갑갑했기에 왜 그들은 그렇게 살아가는지를 모두 이해하기에 역부족이었다.
여자아이라는 이유로 집 대문 밖을 나서는 외출이라곤 어른들이 동행하지 않으면 불가능했다. 친구들과 어울려 동네 놀이터에서 실컷 뛰놀 나이에 우리 속에 갇힌 격이 되었다. 등하교도, 장을 보러 갈 때도, 외식이나 나들이도 아빠나, 우리를 지켜줄 건장한 성인 남자가 함께이지 않으면 마치 법을 어기는 것처럼 타부시 됐다. 한국에서도 물론 남녀 동일한 기회가 제공된 것은 아니다. 초등학교 때 반장은 무조건 남자여야 했었으니까. 성적이 더 우수해도 여자는 부반장으로 만족했어야 했던 현실이 그때 당시 좀 억울하긴 했어도, 그러려니 받아들인 것 같다. 어려서였겠지?내게 가해진 불공평한 대우도 순순히 받아들였는데, 자유로이 세상을 활보할 수 없을 만큼 불공평한 대우를 받는다 하여 그 나라 여성들의 실정에 화가 치밀지는 않았다. 그보다 그 제약이 내 자유까지도 얶매운다는 현실이 속이 더 상했을 뿐.
그 나라에서는 히잡을 쓴 여인을 보기가 어렵다. 히잡은 아랍국 여인들의 의복 중에서도 비교적 개방적이기 때문이다. 당시 사우디아라비아 여인들은 남녀노소할 것 없이 두 큰 눈만 빼곰하게 내놓고, 전신을 검은 부르카로 뒤집어쓴 모습이었다. 눈은 또 왜 그리도 하나같이 부리부리크고, 쌍가풀은 짙게 든 것인지 두 눈동자의 카리스마에 압도당했고, 검은 베일 뒤 숨어있는 모습은 어떠한지도 모르면서 저승사자를 연상케 할 정도의 두려움으로 다가섰다. 더불어 그녀들은 과연 행복할까?라는 의문이 생겼다. 아직 여자이기 전의 소녀임에도 그들의 모습이 안타깝게 비춰졌으니까. 하지만 나는 다른 세상에서 다른 것을 경험했기에 그런 생각에 미쳤는지도 모르겠다. 그 문화에 익숙하고, 그 전통을 존경하며, 자신들의 종교에 순종하는 이들에게는 그것이 삶의 전부일런지도 모른다.
요즘 독일을 비롯, 여러 유럽국에서는 부르카의 착용 금지를 추진 중이다. 이문화로의 통합을 방해하는 주요인으로 떠올라 이 나라 저 나라 할 것 없이 뜨거운 감자가 되어있다. 외관상 적잖이 형성되는 혐오감도 부정할 수는 없다. 하면 그들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서양인 또는 동양인들이 아랍국에 가서 생활할 경우, 그네들의 전통을 따라주는 것이 맞으려나? 종교를 떠나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자신을 지키는 방법의 하나일 수는 있겠다. 그러나, 달걀을 깨는 즉시 아스팔트 길에서 바로 익어버리는 찌는 사막 더위 아래 시커먼 복장을 두 눈만 빼꼼 내놓고 둘러쓴다는 것은 고문 그 자체와 같아 보였다. 안쓰러워 보이는 그들을 흉내 내봐야 할 이유조차 찾을 수 없었다. 부르카라는 장치 뒤에 숨어 외국소녀라는 존재를 숨기고, 보호받아 보자는 생각은 찌는 사막더위에 가려져 상상조차 해볼 수 없었다.
그 갇힌 세상 속 우리 세 자매가 자유로이 행동할 수 있는 공간은 집 안 그리고 그다지 넓지도 않은 집 마당이 전부였고, 아주 가끔 그 감옥 아닌 감옥이 갑갑할 때 엄마가 큰 맘먹고 데려가던 동네 햄버거 집과 청과시장이 두려움 반, 설렘 반에 쿵쾅쿵쾅대는 가슴을 끌어안고 떠나는 유일한 모험지였다.
지금 생각해도 엄마는 무척 대범하셨다.
아니 무지했다는 말이 더 적합할 것이다.
너무도 생소한 나라, 여자들끼리 다니다가는 언제 어디서 납치될지 모른다는, 말로만 들은 것 외에는 그 사회 속에서 진정 어떤 위험요소를 안은 채 살고 있는지 실감하기에는 현실감이 너무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 안에서 살아가면서도 극복할 수 없는 이질감. 막연한 두려움에 겁은 나지만 [설마]란 근거 없는 믿음을 갖게 했을 법도 하다. 누가 봐도 그 나라 사람과는 다른 외모, 눈에 틔는 옷차림으로 어린 여자애 셋을 데리고 그런 외출을 시도했다는 것은 그만큼 갇힌 세상이 주는 억압의 무게 때문이 아니었을까라고 나는 엄마의 편에 서본다.
누구나 열망하는 자유를, 허락되지 않은 곳에서조차 잠시나마 누리고픈 무모함. 진정한 자유를 누려봤다면 갑자기 억압된 세상에 갇혔을 때 누구나 시도해볼 행동이 아닐까?
아빠는 우리의 이러한 갑갑함을 헤아려주셨기에 바쁘신 중에도 틈만 나면 우리를 데리고 사막으로, 별똥별이 떨어져 형성된 어마어마한 구덩이로, 야시장으로, 시내로, 교외 바닷가 등지로 데리고 나가 우리를 우리가 갇혀 사는 세상으로부터 잠시나마 해방시켜주곤 하셨다. 그 날만큼은 나에게도 '이것이 자유로구나!'라는 느낌이 스며들었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보니 정작 크게 다를 것은 없었다. 방문지, 거리와 풍경의 차이일 뿐, 아빠가 동행해도 그 손을 놓고 저만치 먼저 앞서갈 수도, 동생들만 데리고 내가 대장질 하며 화장실을 가는 것도 항상 허용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 나라에서는 엄마의 동행 없이 화장실에 가는 것도 쉽잖았고, 아빠는 항상 여자화장실 문 바로 앞에서 꼼짝 않고 우리를 기다리며 대기하고 계셨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떠올리고 보니 왠지 싸하다.
이동 중엔 차 안에, 등교 후엔 학교 안에, 그리곤 집...
외출시에는 부모님과 단 몇 보의 간격을 넘어서 앞서거나 뒤쳐져 걸어도 안 되었고, 두 분의 손 하나는 반드시 꼭 잡고 놓치면 안 된다는 두려움에 갇혀 살았던 날들. 그러고보니 현대화의 진행 속에 우리네 세상이 차츰차츰 좁혀져가는 듯하다.
세상의 정이 메말라갈수록, 사회가 이기주의로 변하며 험해질수록 현대인의 세상은 좁혀지고, 미지의 세계를 향한 동경은 비례해 커갈 것이다. 위험요소가 곳곳에 장치된 세상에서 생소한 길보다는 익숙한 길이 안전하다 느껴질 것이며, 삶의 무게에 치여 매일마다 같은 동선을 밟으며 살아가는 인생이 대다수이기 때문이리라.
참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하지만 그 자유를 잃고 살았던 그 날들을 되돌아보며 삶의 묘한 맛을 적나라하게 실감한다. 파브르의 곤충기를 읽고 그와 같은 곤충학자가 되고팠던 시절. 집 앞 놀이터와 수풀 속을 뒤집고 다니며 곤충들을 즐겨 관찰하던 내게 그 나라는 말 그대로 사막이었다. 우리나라 것들은 애교스럽다 느껴질 만큼 어마어마한 체구의 바퀴벌레가 당시 내 생활권에서 가장 많이 목격되는 곤충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성한 두 다리가 있음에도 활동공간이 극히 국한되었던 시절. 이 이유 때문 만으로라도 딱히 흐뭇한 추억이 아닐 그 시절이, 그때 나를 둘러싸고 있던 그 험한 세상이 나쁜 기억이기 보다는 지금도 "무척" 그리운 시절이다. 어둠 속 축복인 양 과대 포장되었거나, 잘못된 기억으로 남은 부분이 있다해도 무슨 상관있나? 내 기억이 웃고 있다면 그것으로 그 세상은 내게 기쁨이었을 것이다. 인생의 고달픔, 학업 또는 직장 등의 스트레스를 알기 전이었던 어린 나이도 한몫했겠고, 당시 한국에서는 수입상에서도 구하기 힘들던 바나나가 너무도 흔해 집 방마다 한 송이씩 부채꼴로 걸려 있을 만큼 무엇이던 풍요로왔던 환경 덕이기도 하다.
아파트 생활만 해봤던 내가 꿈꾸던 화단과 나무드리운 마당이 아닌 한 움큼 풀조차 없는 돌바닥으로 만들어진 삭막한 마당이었지만 그 덕에 매일 오후 동생들과 땀범벅이 되도록 롤러스케이트를 타며 신명 났던 시간들. 그 시간 속 깔깔대며 넓지도 않던 마당에서 한껏 자유를 누리던 세 소녀의 낭랑한 웃음소리는 아직도 내 귓전을 맴돈다. 그 넓지도 않은 집 돌마당에서 오후 한 때 누렸던 세 아이의 자유는 그 무엇과도 견줄 수 없을 만큼 값지고, 행복했던 추억으로 남았으니까.
또한, 그 때만큼 내 평생 아빠와 온 식구가 함께 등장하는 청사진이 많이 남은 시기는 그 후로 지금까지 난무하니 억압된 자유 속 행복했던 날들임이 분명하다.
비록 자유를 만끽할 범위가 좁아졌어도 누릴 자유를 모조리 빼앗기지 않은 이상, 행복은 그 안에서도 움이 트고, 먼 훗날인 지금까지 지우고 싶지 않은 기억으로 자리하게 만든다.
그렇다. 내 삶에 있어서 그 시절만큼 활동의 제약을 받으며 살아본 적도 없건만 그때가 내 어린 시절 중 가장 행복했던 순간 중 하나로 남아 있음은 갇혀 있어도, 메어 있어도, 내 안에 자유가 있고, 기쁨이 있다면 그곳이 천국임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이처럼 나의 세상은 내가 정의하기에 따라 그 이미지가 바뀌어 간다. 오늘은 무지개, 내일은 봄비, 모레는 폭설...
모두에게 지금 살아가는 그 시간, 그 공간, 그 세상이 로또처럼 피땀 흘리지 아니하고 거머쥔 행운이기에 쉬이 물거품이 될 잠깐의 예기치 못한 기쁨이 아닌, 소소하기에 더없이 소중하고, 향기로운, 준비된 행복으로 다져져 가기를 소망해본다.
나만의 자그마한 세상, 좁다란 공간에서도 착하고, 이쁜 꿈을 꾸며 기쁜 순간을 만들어 나가보자. 내 스스로 허락한 자유 속에서 순간순간을 되돌아보며 봄같은 미소가 한 송이 꽃처럼 피어오를 행복을 만들어 가자. 그 행복의 무게는 자유의 범위와 반드시 비례하지는 않음을 잊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