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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원한 이방인 Jul 12. 2015

지금이 내 인생의 출발점!

Let's start!

지금 나는 내 생애 가장 거센 소용돌이에 맞부딛혀 있다.  

그 충격에 나를 제외한 내 주변의 모든 것들을 원망했다.

예기치 못한 현실과 마주서자 나는 절대적인 피해자이고자 했다.

누군가에게라도 그 책임을 떠안겨야 내가 덜 초라해보일 것 같았던 모양이다.

내 탓이라 인정하기엔 내 됨됨이가 한참 모자랐던 탓이다.

원망도 잠깐. 충격과 분노, 절망은 나를 조금씩 내려놓게 했고, 실컷 앓고 나서야 깨달아졌다.

그 누구 탓도 아닌 원인은 바로 나에게 있었음을...


적어도 체감하는 무게로만 보자면 내가 철들기도 전 감수성 여린 열일곱 나이에 어린 동생과 단 둘이 말 한 마디 안 통하는 독일로 건너왔던 그 이후 당면한 최대위기라고 할 수 있다.

그때는 어려서 괜찮았다. 위기로 받아들일만큼 철이 들지도 않은 나이였다.

막연한 두려움은 있었지만...

그리고 그때는 어린 나이에 과감한 도전을 꿈꾼 나 자신에게 지금도 큰 박수를 쳐주고 싶은 내 인생 최고의 순간이었다.  어느새 나의 현주소는 중년에 다달았고, 성적이 내 인생을 좌우할 거라고 믿었기에 무조건 닥치는 상황에 부딛히며 이 악물었던 외국에서의 학창시절을 마감한 후로는 지금 이 자리까지 그냥저냥 주어진 여건과 타협하며 익숙한대로만 살아온 모양이다. 내 인생의 사전 속 '노력', '변화', '도전'... 이런 성격의 단어들이 형태를 알아 볼 수 없을 만큼 빛바래 있는 것을 보니... 새로운 시도를 해볼까 망설임도 없었음이 분명하다.


내 마흔 넘은 인생에도 높은 파도와 거친 폭풍의 흔적이 수 차례 남아 있다. 그 사실을 망각한 채 살았구나.

다행히 40대 접어들면서 거칠었던 바다는 잠잠해졌지만 순탄해진 삶은 지나친 안도감을 뿌리내렸다.

현재에 감사하는 자세는 아름답지만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이 영원히 내 몫이라는 위험한 착각에 빠져 있었다.

잊고 지냈던 세상의 이치란 늘 그랬던 것 같다.

노력하는 대로 성취할 수 있는 게 있는가 하면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상황은 특정인의 몫이 아니라 누구에게라도 불시에 닥칠 수 있는 법...

도사리고 있던 위기가 지금에서야 찾아왔음은 어찌 보면 나에게는 무척 감사한 일이다.

그동안 평안과 여유가 동행해주는 삶을 누릴  있었으니 말이다.

어쩌면 나와 마주선 이 현실은 급변하는 사회라면 누구나 흔히 접할 수 있는 매우 익숙한 상황일 수도 있겠다.

단지 내가 속해 있는 이 사회가 다소 변화에 더디기 때문에 내가 그 대상이 되리라 생각을 못 하며 살아 온 탓에 그 충격이 상대적으로 크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 경쟁이 치열하고, 삶 자체가 각박한 한국에서는 이런 상황과 쉼없이 대치한 채 하루하루를 절박하게 살아가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독일에서의 삶은 딱히 도전 없이도 평탄하게 매우 안정된 패턴을 유지할 수 있음이 사실이다.

하지만 어느 곳이던 변하기 마련이다, 단지 그 속도의 차이가 있을 뿐.

독일은 한국과 비교하자면 변화속이 매우 더디다.

난 이 점을 이 나라의 최대매력으로 꼽는다.

어쨋거나 많이 더디어도 변해 가는게 세상 이치다.

그런데 나는 이 배려깊은(?!?) 더딘 변화속에도 보폭을 맞추지 못하고, 대응할 준비에 소홀했다.

삶의 터전은 그 어느 곳보다 유리한 조건을 제시하고 있으나, 내 마음밭이 비와 해를 갈망하지 않았기에 씨앗을 뿌릴 수조차 없는 황무지 상태로 방치돼 있었다.


온실 속 화초는 강하지 못하다더니 몇 년 되지도 않은 안정기 탓일까? 내 인생 최대 전환점에 직면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란 고작 두려움, 불안에 떨고, 후회와 자괴감, 자책감 등으로 뒤엉킨 억한 감정 속에 밤을 하얗게 새는 날수만 늘리는 거였다. 나의 뇌 속 모든 요소들이 붉은 신호를 보내며 부정적인 목소리를 냈다 '넌 별 수 없어', '넌 결코 달라지지 않을 거야', '넌 곧 포기하겠지?'...

그 순간 나는 내 삶에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거센' 한 방을 제대로 맞고, 엎어져 한참을 쓰러져 있었다.

KO 당한 권투선수가 링 위에 쓰러진 채 패배를 맞이하는 순간의 느낌이 이런 걸까...

눈 앞이 깜깜해지는 한 방의 맛을 보고나서야 나는 내가 살아온 길과 마주서보는 용기를 내어본다.

결단력 빵점, 새로운 시도? 도전? 그게 뭔데? 마흔 넘어 뭘 굳이...

지금도 불편함 없는데 자기계발? 시간 없어. 나중에 하지 뭐...

그냥 편하게 살아. 지금 나쁘지 않잖아?  

패배란 꼭 승리를 내어준 자에게만 사용되는 단어가 아님을 이제서야 알았다.

지난치게 안일한 태도로 무책임, 무방비한 삶을 살아간다는 것 그 자체가 패배자보다 못한 포기자의 모습이 아닐까? 만족하며 살자는 긍정적 마인드가 왜곡되고, 마냥 지금 이대로 일거라는 배부른 착각에 나는 헤이해져 있었다. '잘못하는 게 없으면 잘하고 있는 거다'라는 근거 없는 안도감에 빠져 내게 닥칠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미래에 대한 예비는 뒷전시했다.


한 달 이상 자책만 하며 못난 패배자로 지내노라니 서서히 지친다.

잠시 절망의 나락까지 갔었지만 갑자기 내 삶의 패턴에 큰 변화를 기대하기도 무리인 것은 사실이다.  

작은 흔들림만 허용했을 뿐 내 삶을 대하는 자세 또한 쉬이 바뀌진 않을 것이다.

자타가 인정하는 '트리플 A형'답게 나는 매우 소심한 성격을 가졌다.

그래서 미리 겁부터 먹고 변화와 새로운 시도에 폐쇄적으로 살아왔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살아온 세월의 길이를 무시할 수 없는 만큼 아무리 시급한 상황에 처했을 지라도 순식간의 변화를 꾀하기엔 역부족인 게 또한 현실이었다. 나를 변화시킬 시간이 너무 짧았으니 실망하기에 또한 이르다고 나는 나 스스로를 독려해본다. 아직 기회는 있다고.


일단 싫고 좋고를 떠나 인정할 것은 쿨하게 인정하고 나니 속이 홀가분해진다.

내게 닥친 시련은 결코 시련으로 끝나지 않을 거라는 최면을 건다.

깨달음 속에 나는 조금씩 변해갈 것라는 믿음을 심어 본다.

이런 상황의 번복 속에서 더 절박한 이들이 세상엔 훨씬 많을 것이라고 자위한다.

살아온 날수보다 살아갈 날들이 더 짧아져 가는 만큼 더 이상의 시간낭비는 허용할 수 없다는 자각을 깨운다.

내 삶에 조금 더 적극적이 되어야 진정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될 수 있지 않겠냐고 큰소리쳐 본다.

내 지금까지의 삶이 실패였다면 앞으로 걸어갈 내 인생은 대단한 성공까지는 아니래도 중간 성적 정도는 이루고 싶은 욕심도 내어본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 안에 잠재해 있는 용기와 대면했다는 것이다.

내가 변한다고 모든 상황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정리된다는 보장은 물론 없다.

하지만 스스로 개척할 수 있는 부분은 분명 없지 않을 것이다.

방관함이 이끄는 자만한 자세보다 적극적으로 헤쳐가는 삶의 끝에는 후회보다 나를 향한 칭찬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조금 먼 훗 날 나는 내 어깨를 토닥여주며 '수고했노라'고 칭찬해주고 싶다.  

갑작스런 변화를 꾀해 부작용을 낳느니 심호흡을 한 번 내쉬고 천천히 돌아서 착실히 가보자!

아직 갈 길은 멀다. 장거리 달리기를 하려면 순발력보다 지구력이 더 필요할 것이다.


그 첫 걸음으로 수년 동안 갈구하면서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는 핑계로 미뤄왔던 걸 배워보기로 했다.

말로 하기도 창피할 만큼 한해 두해… 그렇게 10년 넘게 미뤄왔던 것을.

간절함이 깃드니 한 순간 출발점을 넘었고, 매일 작게나마 노력하려는 생경한 내 모습과 만난다.

나쁘지 않다. 그 느낌도 괜찮다!

작은 용기를 내고, 미약하나마 첫 시도를 꾀하려니 가슴 떨리는 기회도 찾아왔다.

내 평생 가장 큰 꿈이라고 하기엔 가진 재주가 너무 미약해 거창하게 들리지만 어려서부터 품어 온 작은 소망을 향해 살짝 다가설 수 있는 기회가 한 지인을 통해 불현듯 찾아왔다.

전혀 예기치 못한 일이기에 잠시 망설임이 있었던 것도 사실.

어쩌면 지금 내가 당면한 현실 속 위기감과 압박감이 없었다면 용기내지도 못하고, 시작도 못한 채 포기했을 것이 틀림없다. 그게 나였으니까. 오랜 세월 포기하는 안일한 삶에 익숙해진...

그런데 고민도 잠시. 오래 망설이다간 평생 못 할 것 같다는 불안감이 깃들었다.

덥석 물어보자는 결단을 내렸다. ‘포기’는 나중에 해도 괜찮을 법 하다.

그렇다고 무책임한 도전을 꾀하려는 건 결코 아니다.

도전에 늘 성공이 따르리라 생각지 말고, 도전은 그저 도전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고, 아름답다는 것을 되뇌여보고자 한다. 이렇게 나의 꿈을 향해 나아가기 프로젝트는 '브런치'와 함께 첫 발을 내딛게 되었다!

그렇게 브런치는 내게 희망의 메시지로 다가왔다.


아직 내 앞길은 캄캄하다. 자욱한 안개가 언제 걷힐 지 알 수 없다.

이 상황이 순식간 뒤바뀔 수도, 공중부양 상태로 땅 위에 두 발 디딜 날을 고대해야 하는 장기전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얼마의 시간을 거쳐 그 해답에 닿게 되던 감사함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아마도 나는 지난 수 주동안 절망 속 바로 '이 만큼' 성숙한 모양이다.

장기전이 된다면 스스로 변화를 꾀할 수 있는 시간을 좀더 허락받는다는 의미이고, 당장 내가 가야할 방향이 제시된다면 어떤 쪽이건 지금까지 걸어온 방향과는 전혀 다른 곳을 향할 것이기에 절박함 속에서 현실과 부딛히며 더 빠른 변화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감히 자신해본다.

분명한 것은 '달라져야 한다'.

지금 바로 이 시간 뒤에 놓여진 문을 열면 그 안의 세상은 어떤 모습의 나를 요구할 지 알 수 없다.

절망의 어둠 속에서, 시련의 아픔을 안고 나는 깨달았다,

아직 포기하기는 이르다,

나는 아직 꿈을 꾸고 싶다,

이루지 못할 지라도 그 꿈에 한 걸음씩 가까이 다가가고 싶다는 것을…

나의 소망은 소박하다.

하지만 소박한 꿈도 스스로 지킬 줄 알아야 진정한 승자가 될 수 있다.  

                          

Nicht den Tod sollte man fürchten,                                sondern dass man nie beginnen wird, zu leben.

죽음이 아니라 당신의 인생이 시작조차 하지 않을 수 있음을 두려워하라

- Marcus Aurelius -


그렇다 나는 아직 인생의 출발점도 제대로 넘지 못했던 거다.

지금이라도, 내 생애 중 가장 젊은 바로 지금 이 순간, 내 삶의 막을 힘껏 열어봐야겠다.

내 소박한 꿈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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