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풍경 소리

그걸로 충분해

04

by 영인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 사랑에 빠지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상대가 누구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을 만큼 피폐해지기 전에 그를 만난 것이 정말 다행이었다. 우리는 우연히 마주쳤다. 말 그대로 우연히 마주친 것이다. 그날 아침 유난히 화장이 예쁘게 되었었다. 피부도 반짝였고 대충 칠한 아이섀도도 은근한 음영이 생겼다. 거기에 속눈썹이 바짝 올라갔다. 내 얼굴이 거리 유리창에 비칠 때마다 즐거운 기분이 들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게 아쉽다는 생각이 든 것은 그 이유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와 마주쳤다.

그는 미술관 한쪽 벽을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곁에 잠시 멈춰 서서 같은 작품을 응시했다. 그 작품은 처음 보는 것이었고 나는 그런 작품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다음 옆으로 한 걸음 더 가려는 걸 붙잡은 건 그의 음성이었다.


"우리 술 한 잔 할래요?"


그가 나를 데리고 간 곳은 분위기 좋은 한 작은 술집이었다. 그는 맥주 한 병을 시키고 마치 나이 많은 어른처럼 그걸 마시면서 아까 하던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림과 글, 음악까지 대화는 막힘없이 흘러갔다. 밤 열 한시가 지났는데도 대화가 끝나지 않았다.


"아쉽네요. 저 이제 집에 가봐야 해서요."


내가 먼저 그렇게 말한 것은 거의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쉽다는 말은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네.. 혹시 괜찮으시다면 우리 전화번호 교환할래요?"


그는 선뜻 일어서며 말했다. 그리고 나에게 전화번호를 주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우리는 다시 만났다. 두 번째 만나던 날, 그가 물었다.


"우리, 연애할래요?"


사귀다, 만나다, 혹은 연애한다는 말은 애매모호하고 시큼 달큼한 맛을 느끼게 한다. 연애하는 동안 우리는 서로에게 부끄럼이 없어진다. 그에게서 내가 원하는 건 몇 가지뿐이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대화와 그 사이를 채우는 '사랑해'라는 말들. 은근한 미소와 다정한 손길, 마음이 통하는 느낌들, 그걸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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