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덜어 내기'
'더 멀리 도망치기'
'덜 사랑하기'
노력해야 할 것들을 하나씩 적어놓은 메모장은 이내 빼곡해졌다. 감정이 많은 사람은 언제나 약자의 자리에 있다. 감정보다 목적이 우선인 사람, 인생 뭐 될 대로 되겠지식의 강한 심장을 가진 사람들이 성공하는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나같이 어리석은 사람에게는 연습이 필요하다.
때때로 악몽을 꾸었다.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행진하는 꿈, 그러다 작고 아름다운 오솔길을 만나는 꿈이었다. 큰길을 가득 메운 기나긴 행진 대열에서 방금 발견한 오솔길로 나만 쏙 빠져나오고 싶어 지는 꿈. 이 꿈을 악몽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매번 오솔길로 빠져나오지 못하고 고민만 하다가 결국 사람들에게 떠밀려 나 역시 똑같은 길로 향하게 된다는 결론 때문이었다. 항상 저 멀리 도망치고 싶었지만, 결국 제자리로 돌아와 오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의 발걸음에 뒤처지지 않으려고 뛰듯이 걸어야 했던 지난날의 꿈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도망치기'가 '더 멀리 도망치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가진 것들에 대한 '덜어내기'와 내가 사랑하는 것들에 대한 '덜 사랑하기'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최근에 꾼 꿈에서는 조금 달랐다. 정신을 차려보니 작은 오솔길 앞까지 와 있었다. 오솔길 위에는 몇 명인가의 발자국이 나 있어 이미 누군가는 이 길을 나보다 앞서 지나간 것이 틀림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이 아니어서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이번에는 제대로 행렬에서 벗어나 오솔길을 따라 쭉 멀리 걸어가고 있었다. 누군가가 나를 발견할까 봐, 혹은 무서워서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갈까 봐 어찌나 심장이 두근두근 뛰던지...
오솔길은 매우 한적했다. 어느 정도 걸었을까... 이제 두려움도, 미칠듯한 떨림도 아까에 비하면 많이 줄어들었다. 더 이상 나를 막아설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윽고, 나는 오솔길 중간에 들어섰다. 사실 길의 끝을 알 수 없어 여기가 어디쯤인지 정확하지는 않다. 그렇지만, 이제야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여기에는 "빨리 너의 자리로 돌아가라"라고 명령하는 사람도, 야단치는 사람도 없다. 큰길에 서 있던 누군가가 나를 찾아낼 수 있는 범위에서 이미 벗어났는데도 나는 더욱더 멀리 도망가고 있었다.
타인의 의지가 아닌 자의에 의해 선택한 오솔길을 지금도 나는 조금씩, 천천히, 그렇지만 꾸준히 걸어가고 있다. 그 길의 끝에는 또 다른 내가 나를 반갑게 맞이해주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