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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변화했구나 느낄 때가 있다. 작년 겨울 왜 그렇게 시름시름 아팠었는지 계절 바뀐 늦봄에는 왜 행복해졌는지 잘 모르고 살아간다. 계절이 바뀌었기 때문일 거라고 , 한국 생활에 적응되어 가나보다, 고 생각한다. 행복해진 나 자신이 대견하고 안심이 된다.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거였다고, 이제야 제 자리를 찾은 거라고 생각한다. 거울 속의 나를 보며 미소 짓는다.
계절의 변화를 가장 먼저 감지하는 건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패션이다. 두꺼운 외투를 벗어던지고 반바지와 반팔을 입은 사람들을 만난다. 계절이 바뀌었으므로 예전 입었던 옷을 계속 입을 수가 없다. 겨울옷, 봄 옷을 정리하고 따로 상자에 집어넣는다. 방한용 신발을 정리하고 샌들을 새로 장만한다. 그렇게 새로운 계절을 맞는다. 지난 계절은 차곡차곡 접어 상자에 넣어 둔다. 지난 계절에 일어났던 모든 일들은 단순한 해프닝이나 추억으로 남는다.
세상이 변화했구나 느꼈었는데 이제 보니 변화한 것은 나 혼자 뿐이었구나. 나에게는 죽음처럼 고통스러웠던 순간이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행복했었다. 아팠던 것은 나 혼자 뿐이었던 거다. 그렇게 힘들었던 시간을 보냈으니 이제는 행복해져야 맞는 것이고 행복해져서 다행인 거라고.
예전에는 그랬다. 사랑이라는 걸 제대로 해보기도 전에 얼른 그만둬 버리고는 했다. 사랑에 빠진다는 것 자체가, 그래서 판단력이 흐려지고 바보 같은 짓을 저지르지 않을까 두려워서 그런 적도 있었고 내 기대와는 다른 상대의 모습이 실망스러웠던 적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감정들을 베어냈다. 그것도 자꾸 하면 아프지 않다. 점점 더 습관이 되어갔다. 그런데 변화한 나는 좀 더 이 감정을 즐길 줄 알게 된 모양이다. 나이를 먹어서인지 두려움도 무뎌진다. 그만두고 싶지 않아진다. 변화하는 나 자신이 예쁘게 느껴진다. 좋아하는 책만 읽던 내가 지금은 여러 가지 장르의 책을 읽는다. 다양한 음식을 먹어보고 이것저것 느껴보며 즐거워한다. 작고 어두운 상자 속에 갇혀 있던 새가 점점 커다란 세상을 향해 나가는 기분이 아마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계절과 계절 사이에 서 있으면 한 발은 봄에, 다른 한 발은 여름에 담그고 있는 기분이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계절은 둘 중 한 가지에 속해있지 않기 때문에 더 아름답다. 봄은 여름을 닮아가고 결국은 여름으로 변해간다. 한 계절의 변화가 없다면 다음 계절은 오지 않는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생각과 외모가 변화하기는 해도 내가 나 인 것은 변화하지 않는 것처럼 나는 나로서 살고 나로서 존재한다. 사랑하는 사람들로 인해 내 존재가 빛나고 행복해진다. 이 행복이 오래오래 내 곁에 머무르기를, 그래서 내가 날아오르기를, 그리고 궁극적으로 행복해 지기를 바란다.
변화하고 있는 나는 앞으로 어떤 계절이 될까? 새로운 계절이 왔으므로, 새로운 페이지를 넘겨 시작해본다. 그래서 지난 페이지에 적어 놓았던 것들은 얼른 잊어버리고, 새로운 페이지에 채울 것만을 생각해보기로 한다. 앞으로 어떠한 일들로 가득 채워질지 첫사랑의 추억만큼이나 설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