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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봄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붉은색 넝쿨 장미가 담장 위에 흘러넘친다. 핏빛에 가까운 붉은색 덩굴 근처에 다다랐을 뿐인데 장미 향이 훅 끼쳐왔다. 숨을 들이마시면 그대로 녹아버리는 느낌이 들 만큼 고급진 향이다. 단것도, 신 것도 아닌 향 말이다. 장미향을 맡을때 마다 '고급 진 향'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 달콤함이 결코 시큼함을 넘지 않기 때문이다. 진한 꿀 향과도 비슷하고 붉은 루비와도 비슷한 느낌이다. 장미 꽃잎을 입에 넣고 그 맛을 음미하고 싶어 질 만큼 장미향은 독하고 부드럽다. 달콤한 향이 훨씬 진한 라일락이나 요염하게 느껴지는 아카시아의 향과 다른 향, 장미향은 고급 지다.
장미 향을 좋아하는 나는 향수도 장미 향을 자주 뿌린다. 장미처럼 우아하고 인상 깊은 사람이 되었으면 하고 바란다거나 하는 거창한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다. 내가 특별히 기억해 내지 못하는 과거의 어떤 날에 장미 향기를 맡은 적이 있고 그 향기를 좋게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덕분에 장미 향을 맡으면 기분이 좋아지고 행복해지는 증상이 생겼나 보다. 우울할 때는 장미향을 맡거나 장미차를 마신다.
일기를 읽어보다 문득 재미있는 발견을 했다. 장미향 비누나 로션을 쓰거나 차를 마셨던 날에는 내가 우울했던 거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일기에 '장미'에 관련된 물건들이 더 많이 나올수록 나는 우울했으며 슬펐던 모양이다. 우울이나 슬픔이라는 독이 전신에 퍼지기 전에 장미향이 들어있는 것들을 해독제로 사용하며 살아있기 위해 발버둥 쳤던 것이다. 나도 모르게 '장미향'이라는 해독제에 중독되어 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장미향이 나를 행복하게 해준다는 생각은 어찌 보면 유치하고 어린 발상이다. 그러나 위태위태한 삶의 한 가닥을 겨우겨우 이어가다 보면 유치하고 작은 것들에게도 위안받고 힘을 얻을 수 있다.
아주 먼 곳에서도 바람 한 점에 섞여 장미향이 불어오면 내 폐는 순식간에 행복으로 가득 찬다. 바보처럼 자꾸 웃음이 지어진다. 향수병에 갇힌 장미향이 아닌, 여기저기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장미에게서 맡을 수 있는 향기가 여기저기 가득한 요즘은 장미향에 중독된 나 같은 사람에게 천국 같은 계절이다. 봄은 이렇게 떠나고 여름이 성큼 다가오는 6월 첫째주, 행복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공기마다 섞여 있는 장미향기를 맡을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