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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영인 May 26. 2018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편린  22

초등학교에 다닐 때  난데없이  학교 수영부로  뽑혔다.   새로 오신  수영부 선생님께서  복도에  지나가는  나를  지목하신 것이다.   운동도  잘 못하고   몸치인 내가  학교 수영부에  뽑혔던  불가사의한  일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난데없이' 수영부에  끼워 넣으신  선생님은  다행스럽게도  곧  내게는  재능이 없음을  간파하신 모양이었다.   재능은  없지만  성실한  노력파이므로   자유형,  배영,  평영 까지는  열심히  배웠다.   그러나  접영을  배운 지  이틀쯤  되었을 때  선생님께서  나를   따로  부르셨다.


"수영보다는  다이빙을  해보면 어떠니?"


다이빙이  뭔지도  모를 때였다.    선생님께서  따로  부르셨던  친구들과  함께  줄을 서서  한 명씩  다이빙을  했다.   처음에는  수영장에서  그냥 했는데  그  높이가  조금씩  높아졌다.    어느 정도  높아지자   공포가 엄습했다.   내게  고소공포증이 있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다이빙을  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다이빙 보드 끝 부분에  서 있는 것 자체가  공포였다.   


중학생이  되자  체육선생님은  펜싱부에  들어가라며  압력을 넣으셨다.   미국에서  살 때는   탱고나  살사를  배워보지 않겠느냐는  권유를  많이 받았다.   몸치에  가까운  내가   극구  사양하면   사람들은  수줍음이 많아서  그런 줄  아는 모양이다.    최근에  친구도  그런 말을 했었다.


"겉으로  말이야,  그니까  네가  걷는 모습만 보면   배드민턴 10년은  한  프로 선수같이  보여."


그 말에  나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배드민턴은커녕  운동에는  영 재능 없는  내가  그렇게  보인다는 게  재미있어서다.   그러고  보니   아침마다  가는  헬스장에서   오늘도   아주머니 한 분이  나에게 물어보셨다.


"헬스  오래 하셨어?   여기 강사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본질적으로는  몸치에  운동과  거리가 먼  내가  자주  '운동 잘하는'  사람으로  오해받을 때마다    떠오르는  말이 있다.


“Everything we see hides another thing, we always want to see what is hidden by what we see, but it is impossible.

우리가 보는 모든 것들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
우리는 항상 우리가 보는 것이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알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하다."

  
  ―    René Magritte


    내가  직접  내 입으로  운동을 잘 한다고 한 적이  없으니  내 잘못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런 오해를 받을 때마다  몸 둘 바를  모르겠다.   그때마다  아니라고  설명하기도  어렵고  마치  내가  거짓말이라도  한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도  많았기  때문이다.    나와  오래 알고 지낸 사람들은  지금도  내 첫인상은 '운동 소녀'였다고  놀린다.   자전거도  못 타는 내가   오토바이도 타는 줄 알았다는  고등학교 동창부터   태권도 유단자인 줄  알았다는  대학 때  친구까지,   함께  수많은  운동을 할 줄 알았다는  친구의  아쉬운  탄식도  웃음으로  마무리된다.   운동에  영 재능 없는  내  주위에는  꽤  운동한다는  친구들만  있는  이유도  아마  내 겉모습이  주는 인상 때문이  아닐까  싶다.  운동을  잘 못하는데도  계속할 수 있는 것도   주위 사람들이  주는  좋은 영향 덕분이다.   그리고  나를 아는 모든 사람들은  웃으며  꼭 하는 말이 있다.


"사람은  보이는 것으로  판단해서는 안 되는  존재인 거야."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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