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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영인 May 16. 2018

숙취

편린 21

알람 소리는  아침 6시에  울린다.    시끄럽게  울리기 때문에  아무래도  잠에서  깨어날 수밖에 없었다.   평소 같으면   눈을 뜨자마자  '커피 마시자!'  혼잣말을  하며  벌떡 일어났을 텐데   오늘 아침에는  그게 안되었다.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파왔다.    더 잘까?  생각하면서도  겨우 일어나 앉았다.   머리가 이리저리  흔들리는  대로  세상도  흔들거리는 느낌이다.   멀미라도  하는 듯  속이  울렁거렸다.    


알람은  직접 끄지 않으면  오분 마다  울리게 되어있는 모양이었다.   핸드폰에서  또 한 번 시끄럽게  알람이 울렸다.    알람을  끄고  들여다보니   지난밤에  친구로부터 카톡이 와 있다.   그것도  새벽 한시쯤에  말이다.

"끊어졌어."

뭐가  끊어졌다는 것인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모르겠다.    침대에서  내려와  커피머신까지 가는데  어질어질하다.   습관적으로  커피를 내리며  카톡에  답장을 했다.

"뭐가?"


식탁 위에   종이봉투가  있어  열어보니   초콜릿이  잔뜩  든  머핀이었다.    그제야   어젯밤   친구와   재즈 공연을  보러 갔었다는 게  기억났다.   공연장에서  파는  맥주 한 병씩을  마시고   공연 내내 신나게  춤을  추고 나서   공연  끝날 때  아쉽다며   술을  더 마시러  갔었다.   소주를  약간  더 마셨고  집으로  돌아올 때 까지는 멀쩡했었는데  그다음에  일이  도통  기억나지 않는다.  


"전화가 끊겼었잖아."


친구가  대답으로  보낸 카톡이다.    전화?   전화를  했었나?   새벽 한 시에  내가  친구에게  전화를 해서 무슨 소리를  지껄였을까?     엇박으로   비껴갔던  첫사랑에  대한 걸  털어놓았을까?   혼자 사는 고단함을  떠벌였을까?   아니면   나 자신도  모르는 비밀 따위를   털어놓은 것은 아닐까?


"내가  전화했었어?"


바보같이  물어보고 말았다.   친구는  너  필름 끊겼던 거야?  하며  기막히다는  반응을  보인다.   그랬나 봐  대답하는데  머리가  아파온다.    아침에는  출근하느라  바쁠 친구를  방해하는 대신   울렁거리는 속을  달래줄  뭔가를  찾기 시작했다.   미국 친구들처럼  치즈버거를  먹어야 하는 것일까?  생각하면서도  따뜻한  국물 생각이  간절하다,     왜  사람들이  이런 날 아침에 해장국을  먹으러 가는지  알 것 같다.    


평소처럼  바나나 한 개와  커피,  계란 프라이를  해서  아침으로  먹었다.  가뿐하지 않은  걸음으로  운동하러  나갔지만  어지러운 것은  여전하다.   평소보다  운동을  덜 했어도   훨씬  지쳐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예전에는  무관심하게  스쳐갔던   식당들이  눈에 들어온다.   순대국밥집,  황태해장국집,   매운 짬뽕 전문점마다  손님들이  앉아  식사 중이다.   그랬구나.   아침부터  해장국을  먹으러  온 사람들의   기분을  이제야  이해한다.    집으로  돌아와  청소하는 것도  느릿느릿이다.   행동이  평소보다  두배로  느려졌으니  시간은  두배로  빨리 지나가는 느낌이다.  맥주 한 병을  마셨을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그다음  한잔 마신  소주가  문제였구나  싶다.    집까지 제정신으로  돌아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역시  나는 운이 좋아   혼자  만족해한다.    그러나  다음에도  운이 좋으라는 법은  없으니까   앞으로는  술을  마시지 말아야겠구나  깨닫는다.     뜨끈한  국물을  내어   점심밥을 먹는다.    겨우  속이  풀린 것도  같다.


가장  좋아하는 시를  꼽으라면  주저 없이  이백의  월하 독작(月下獨酌)을  골랐었다.    달빛 아래 혼자 술을 마셨다는  시를  읽으면   오늘처럼  늦은 봄날  꽃 향기 진한  나무 아래 앉아   홀로  술잔을  기울이는  천재 시인을  상상할 수 있다.   술을  한 동이 나  마시는 동안   달빛과  교감하고   그림자와  춤을 춘다는  것을  생각하면  시인의  고독이  안쓰러워   아련하게  눈물짓고는 했다.   어젯밤에도   친구와  소주잔을 나눌 때  이  시를  떠 올렸다.    마치  이백 시인이  된 것처럼   술 한잔에  낭만을 가득  담아 마셨던 것이다.


월하독작(月下獨酌) 1 -이백(李白;701-762)

달빛 아래서 혼자 술을 마셨소

花間一壺酒(화간일호주), ;꽃나무 사이에서, 한 동이 술을
獨酌無相親(독작무상친). ;친구 없이, 혼자 술을 마신다.
擧杯邀明月(거배요명월), ;잔 들어 밝은 달을 맞고
對影成三人(대영성삼인). ;그림자를 마주하니 셋이 친구 되었네
月旣不解飮(월기부해음), ;달은 술을 아예 마시지 못하니
影徒隨我身(영도수아신). ;그림자만 부질없이 나를 따라 다니네
暫伴月將影(잠반월장영), ;잠시 달을 친구하고 그림자 거느리고
行樂須及春(항낙수급춘). ;즐거움을 누리는 이 일 봄에야 가능하리
我歌月徘徊(아가월배회), ;내가 노래하면 달도 따라다니고
我舞影零亂(아무영령난). ;내가 춤추면 그림자도 덩실덩실 춤을 춘다
醒時同交歡(성시동교환), ;깨어서는 함께 서로 기뻐하고
醉后各分散(취후각분산). ;취한 뒤에는 각자 나누어 흩어진다.
永結無情游(영결무정유), ;정에 얽매이지 않는 사귐을 영원히 맺어
相期邈雲漢(상기막운한). ;저 멀리 은하수에서 만나기를 서로 기약하자.


 



출처: http://kydong77.tistory.com/15133 [김영동 교수의 고전& life]


이상과 현실은  태평양의  넓이만큼  다른 것을  깨닫는다.   달 아래  그림자와  덩실덩실 춤을 추던  시인만큼  낭만적이  되기에  내  주량은  형편없다.   술을  마시고  멋진 시를  지어내는 대신   나는  소주 한잔때문에   생긴 후유증에  하루 종일  시달리고 있으니 말이다.


"오늘은  비가 많이 내리네."

친구는  평소와  다름없는 내용으로  카톡을  보냈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친구의  평범한  카톡에도  나는 깜짝 놀랐다.   가만있자....  친구에게 전화해서  뭐라고 했었지?      아주 중요한  내용은  아니었겠지  위로해 본다.   아니면   친구도  나처럼  술에 취해  우리의  대화 내용을  기억하지 못했으면  한다.    지난밤  술에 취해  보낸  몇 시간은  이대로  망각의  늪에 빠뜨려 버려도  되었으면  한다.  하룻밤의  일탈은  어젯밤  달빛으로  슬쩍  덮어버리면  그만이다.    이런  즐거움을  누리는 일은  봄에야  가능하다고   이백 시인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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