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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은 쉬워지기 전에는 어렵다.
- 괴테
바람에서 여름 냄새가 났다. 빗물 머금은 느긋한 향기, 마구 마구 튀어나가고 싶지만 그 열기가 오히려 짐이 되는, 맡으면 게을러지고 싶은 냄새 말이다. 나무 둥치를 지나 딸기 밭을 지난 바람은 나무랑 달콤한 향기까지 품고 있다. 거기에 달콤하게 고소한 팥빙수 냄새와 장마 비가 아스팔트에 떨어질 때 매캐한 냄새, 옥수수 찔때 나는 구수한 냄새와 잘 익은 수박을 칼로 자를 때 쩍 소리 나며 벌 어질 때 나는 신선한 냄새까지 죄다 섞여 여름 냄새가 된다. 사람 많은 수영장에서 나는 소독약 냄새며 다른 때 보다 더 진하게 바른 선크림 향기까지 섞인다.
매년 돌아오는 계절이지만 새로운 여름을 맞았다. 올해 유행할 예쁜 옷을 미리 입은 아름다운 사람들이 거리를 활보한다. 맨살이 많이 보이는 사람들이 이젠 어색하지 않다. 반팔, 반바지가 어색한 것은 5월쯤까지다. 그 이후부터는 노출이 많아질수록 시원하게 보인다. 지나치게 드러나지 않는다면 여자건 남자건 시원하게 입는 게 눈에 편안하다. 보는 사람의 기분도 시원해 지니까 말이다. 아직은 초여름이므로 아침저녁에는 서늘하다. 그때 입을 겉옷도 챙겨 나가야 한다. 몸이 여름 더위에 익숙해지는 시간을 주기 위해 우리는 온도와 습도를 점검하고 입을 것을 챙긴다.
계절이 변화하듯 내 인생도 변화한다. 글 쓰듯 밥을 먹고 물을 마시고 길을 걷는다. 처음으로 물을 마셨던 때가 있었던 것처럼 처음으로 떡볶이를 먹었던 날도 있었다. 처음으로 소설 비슷한 것을 쓰고 감격했던 날도 있었다. 그 처음을 섬세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물을 마시고 음식을 먹는 행위가 익숙하고 편안해졌기 때문이겠지. 여름의 더위가 지금은 어색하지만 점점 당연해지는 것처럼, 마치 단 한순간도 겨울이 없었던 것처럼 느껴지는 날들이 올 것을 아는 것처럼, 사는 것도 익숙하고 쉽게만 여겨지는 날도 하루쯤은 있기를 바라본다.
오랫동안 떠나 있던 한국에서 만나는 모든 것들이 나에게는 새롭고 찬란하게 느껴진다. 한국으로 돌아와서 각각 다른 종류의 아이스크림을 먹어보았다. 그다음에는 과자를, 그리고 떡볶이와 튀김 같은 것들도 먹어보았다. 물론 맛있었다. 한국에서 먹던 것들을 그리워하고 아쉬워하던 만큼 그 순간은 행복했고 설레었다. 지난가을에 왔으니 이 여름도 나에게는 오랜만에 만나는 설렘이다. 설레고 어색하지만 조심스럽고 그래서 가슴이 두근거리는 계절이다.
계절과 시간이 나를 스쳐가도 계속 내 곁에 남아주었으면 하는 것들도 있다. 새로 만난 친구들, 인연들, 장소들, 기억들이 그런 것 들이다. 지나치게 익숙해져서 처음 순간이 기억나지 않을 때까지 내 곁에서 계속 있어주었으면, 지나치게 익숙해져서 그 들의 고마움을 잊어버리는 순간이 올 때까지 함께 달려가 주었으면 한다. 그때쯤엔 나를 스쳐가는 바람에서도 그들의 냄새가 나지 않을까, 그들의 냄새와 내 체취가 한데 섞여 '나'로 완성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