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비 쏟아진 날들 사이에 모처럼 하늘이 맑은 밤, 가로등이 환하게 밝았다. 여름이지만 저녁 공기는 선선했다. 근처 도서관 앞을 지나 편의점에 들렀다. 걸어서 오분 도 안 걸리는 길가에서 열 명 넘는 사람들과 마주쳤다. 그중 두어 명은 언뜻 봐도 심하게 술에 취해 있었다. 제대로 서 있지 못해 곁에 있는 사람이 부축해 준다. 큰 소리로 울거나 하소연하고 있는 걸 보면 속상한 일이 있었던 모양이구나 짐작한다. 그 사람들을 본체만 체하며 빨리 지나치는 나머지 사람들은 대부분 귀가하는 학생이나 직장인들처럼 보였다. 길에 떠도는 약간의 술냄새는 어딘지 쓸쓸한 가로등 불빛을 따라 퍼졌다.
시야에 들어온 검은 그림자가 순식간에 내 옆을 스쳐 저만큼 달려간다. 나도 모르게 발길이 머뭇거렸다. 아니겠지 하면서도 시선이 따라갔다. 가슴이 덜컥 내려 앉았다.
이 곳에 있을 리 없는 사람의 흔적이었다. 있을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마주칠까봐 내심 걱정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어둠 속에서 매우 불친절하던 미소와 상처받은 기억들이 와르르 쏟아져 뒹굴었다. 항상 친절한 사람인 줄만 알았다가 언뜻 보인 냉정함에 손이 데었다. 이제는 만나지 않게 되어 다행이다. 더 상처받기 전에 이별이 와서 다행이다. 그나마 기억해내도 아프지 않아 다행이다. 밤이 깊어질 대로 깊어진 곳에는 짙은 후회와 안도가 찰랑인다. 그럴 수밖에 없었을 거라고 애써 이해하려 노력할 때도 있었다. 미워하고 미워하던 때도 있었다. 검은 하늘에는 점점 말라 가는 달이 비스듬히 걸려있다. 낮에는 태양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태양이 떠난 자리 나 지키면서 매일 모양까지 변해야 살아남는 차가운 돌덩이가 내려다본다. 술냄새 나는 사람들의 눈물을, 후회를, 분노를, 초조를, 불안을, 이별을. LED보다 창백한 빛이 가로등 불빛도 이기지 못한다.
몇 달 전쯤 비슷한 시간에 같은 길을 지나갔던 적이 있었다. 한 걸음 디딜 때마다 후회와 우울로 점점 빠져들어가던 길이었다. 봄이라고 해도 추웠고 손끝이 시린 밤이었다.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을 때 무심한 달과 눈이 마주쳤었다. 그만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나 너무 힘들어......"
조금 더 울어도 괜찮겠냐고 달에게 물었다. 내가 우는 것을 못 본 척해달라는 말이었다.
"그래, 너는 할 만큼 했어."
작게 작게 귀를 울리는 달빛이 나에게 그런 말을 했었다.
'이젠 괜찮아. 다 지난 일이야. 너는 최선을 다했어. 그 순간에는 어쩔 수 없었잖아. 잘 했어. 너는 열심히 살았고 착하게 살려고 노력했으니까 그걸로 된 거야.'
지나간 순간들마다 나름 최선을 다 했었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그런 나에게 "너는 할 만큼 했어."라고 속삭여 주기가 왜 그토록 어려운 것인지. 그 모든 일들이 다 지나고서도 한참 동안이나 시간이 흘러 이제야 그 순간이 제대로 보이고 그때 깨닫지 못하는 것을 깨달아 가는 게 얼마나 아쉬운 일인지... 심지어 내일 일어날 일들도 짐작 못할 만큼 불안했던 나날들. 술에 취해 두려움을 삼켜버리지 않으려고, 맨 정신으로 헤쳐 나가 보려고 무진장 애쓰던 순간들. 그런데 그 순간 모든 긴장이 아이스크림처럼 풀려버렸다.
"괜찮아."
달빛의 위로 덕분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내 이름을 불러주는 순간처럼 가슴이 따뜻해졌다. 눈물이 흘러내렸지만 더 이상 슬프지 않았다. 나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 냈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발 끝에 와 닿는 달빛과 함께 걸었다.
"어때, 좀 나아졌니?"
달빛은 매번 나에게 물었다.
"그럭저럭... 조금씩 나아지고 있어."
나도 작게 대답했다. 말로 하고 나면 정말 행복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슬프거나 후회스럽지 않게 된 이후부터 웃음을 되찾았다. 나는 달과 눈을 마주치고 빙긋 웃는다.
"행복해 보이니 좋아."
달빛이 작게 속삭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행복해도 되는 거라고, 이제는 안심해도 되는 거라고, 앞을 향해 걸어가기만 하면 되는 거라고 달빛이 또 속삭인다. 달빛의 위로 덕분인지 불안과 불행이 걷혀간다. 달빛을 한 손으로 붙잡고 함께 걸어가면 부쩍 용기가 생긴다. 여태껏 그럭 저럭이라도 잘 지내온 내 삶에게 오늘 밤은 왠지 이렇게 얘기해주고 싶다.
"지금까지 고마웠어. 그리고 앞으로도 잘 부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