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풍경 소리

무화과 예찬론

23

by 영인

내 마음속에는 꼭꼭 닫힌 비밀 상자 같은 것들이 있다. 상자를 잘 닫아 마음속에 감춰두고, 힘들 때 열어보고 싶은 것들, 상자를 열 때마다 기분 좋아지는 것들, 정말 좋아하는 사람에게만 알려주고 싶은 나만의 힐링 레시피 같은 것들 말이다. 예를 들면 비 오는 날 창 밖을 바라보며 마시는 뜨거운 커피 한잔과 곁들어 즐기는 치즈 한 조각, 몸이 으슬으슬 아플 때면 찾게 되는 쌀국수 한 그릇 같은 것들처럼 , 평범하고 밋밋한 아이스크림에 마지막 장식으로 올리는 휘핑크림처럼 지루한 일상에 상큼함을 더하는 작은 것들이 있다.


8월부터 제철인 무화과는 과일이 아니라 사실은 꽃이다. 열매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꽃인 것처럼 무화과는 나만의 비밀 상자에 담아두기에 더없이 완벽한 반전을 갖고 있다. 얇고 딱딱한 껍질은 사실은 꽃받침이라는 걸, 짙은 붉은색 열매는 사실 꽃이라는 걸, 과일처럼 달지만 그 단맛이 곧 무뎌질 만큼 채소 맛이 강하다는 걸, 무화과를 먹을 때마다 떠올린다. 설탕을 넣고 졸여 피자와 함께 먹어도 그럴듯하다. 과일인 듯 과일이 아닌, 여름인 듯 혹은 가을인듯한 무화과의 애매함이 매력적이다.

붉게 달궈진 여름 더위에 지쳐갈 때쯤 무화과가 등장한다. 그건 가을이 곧 온다는 의미다. 무화과 한 입을 베어 물면 아직도 뜨거운 여름 반조각과 슬슬 시작된 가을 반조각으로 입 안이 가득 찬다. 입 안에 꽃 한 조각을 넣고 우물거리며 지난여름을 정리하고 가을을 맞는다. 어릴 때는 무화과를 먹으며 '이젠 여름 방학이 거의 끝났구나' 생각했었다. 갓 태어난 가을을 먹는 기분으로 무화과를 먹고는 했었다.

유난히 뜨거웠던 올해 여름, 피부와 마음에도 화상 같은 상처가 남았다. 그렇게 따끔거리는 것들을 치료하는 데는 무화과 몇 개가 최고다. 무화과 향에 취해 몇 개월을 지내다 보면 더위로 망가진 것들이 다 치유될 거라는 걸, 뜨겁고 괴롭던 여름 한철도 낡은 책 한 페이지를 넘기듯 지나갈 거라는 걸. 그렇게 가을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1534773080110.jpg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그대가 훅 들어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