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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듯한 소리에 돌아봤다. 큰 길앞 사거리에는 빨간불 앞에서 멈춘 자동차들과 횡단 보도 앞에 선 일단의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뜨거운 더위가 걷힌 하늘은 부서질듯 파랗게 빛나고 얇게 덮인 구름이 솜사탕처럼 떠다니고 있었다. 돌아본 곳에도 나를 불러 세울 만한 사람은 없다. 잘못 들은 걸까 다시 걸어가려는데 또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귀에 익은 목소리다. 이번에는 발길을 아예 멈추고 주위를 둘러본다. 맞은 편 어떤 사람이 내 근처에 선 여자를 부르고 있는 걸 그제서야 발견했다.
'왜 친구의 목소리라고 생각했을까?' 친구가 지금 이 순간 이곳에 있을 리 없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갑자기 내 진심을 깨달아 버린 기분이 들었다.
'내가 정말 친구를 좋아하고 의지 하고 있었구나 . ' 아까부터 아프던 머리탓인지 갑자기 현기증이 났다.
아침부터 입맛이 없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매일 눈 뜨자마자 찾아 마시는 커피도 입에 썼다. 그러고 보니 지난 며칠 동안 입맛이 없기는 했다. 요 근래 계속 글이 제대로 써지지 않은 것에 대한 스트레스 때문일까. 습관적으로 커피를 내리고, 마셨다. 커피가 위에 들어가자 그만 메스꺼웠다. 뭐지? 빈속에 카페인을 너무 많이 마셨나 싶었다. 어제 비를 맞고 걸어다녀서 그랬는지 저녁에는 으슬으슬 춥고 노곤했었다. 머리가 깨질 듯 아프더니 잠을 자는 것인지 깨어 있는 것인지 모르게 밤을 보냈다. 꿈은 요란했고, 나는 꿈속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하나도 정신없는, 아무런 의미조자도 없는 꿈이었다. 새벽에 깼을 때는 온통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아침에는 늘 그렇듯 창문을 열고 청소를 했다. 이제 아침에는 제법 서늘해졌는데, 청소하다 보니 식은땀이 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아침에 청소 조금 했다고 지쳤나 보다. 기운 없이 소파 등받이에 기대앉아 있으려니 그냥 눈물이 흘렀다. 이유도 없이 그냥 가슴 한 켠이 쓸쓸하고 시렸다. 부석한 피부, 부스스한 머리카락. 며칠 전부터 계속 지끈거리는 머리로 문득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또 한 계절이 가는 구나... 나의 계절은 어디에 있을까. 오기는 왔던 걸까.' 태생이 집에만 있기를 좋아하는 집순이인 나로서는 계절의 변화가 쉽게 몸에 와 닿지는 않는다. 생각이 끊기는 순간마다 외로움이 배어 나왔다. 오전 내내 눈물처럼 땀이 흐르고, 전신에는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머리도 견딜 수 없이 아파왔다. 그래서 오후에는 병원에 다녀오기로 했다.
병원 대기실에 앉아 차례를 기다리다 보면 그렇지 않아도 아프던 몸이 더 아파오는 느낌이 든다. 아픈 몸이 더 아파오듯 누군가에 대한 그리움도 더 커져왔다. '나 병원 왔어.' 라고 누군가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서툰 표현이지만, 누군가는 나를 걱정해주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하지만, 이내 친구에게 보내려던 카톡 메시지를 지웠다. 지금 이 시각이라면 친구도 회사에서 열심히 일을 하고 있을텐데, 괜한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열이 높네요. 몸살기도 있는 것 같구요. 요새 환절기라 특히 건강 관리에 신경을 써주셔야 해요. 약은 우선 3일치 드릴테니 일단 약을 드셔보시고 경과를 지켜봅시다."
환절기... 의사 선생님의 그 말이 계속 메아리치듯 귓가에 머물렀다. 그렇구나, 환절기구나... 이제서야 비로소 계절이 바뀌었다는 실감이 났다. 집으로 돌아와 처방받은 해열제를 먹었다. 약을 먹고 한숨 푹 자고 나니 몸이 좀 개운해졌다. 열도 많이 내린 것 같았다. 여름처럼 무덥지도, 겨울처럼 매섭지도 않은 이 계절을 은근한 바람으로 흔들고 간 것은 내 진심이나 감정이 아니라 감기로 인해 잠시 고장났던 내 마음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