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권영인 Feb 11. 2019

그 남자, 보헤미안

존재한다

     


2월의 어느 날이었다.  영하 십 도보다 한참 춥다던 아침부터 전시회와 카페, 헌책방과  공연을 헤집고 다니던 그는 가벼운 저녁 식사를 하고서야  카페 한 곳을 찾아들었다.  큰길에서  한참 떨어져 조용하고  손님도 많지 않은 예쁜 카페에.


“아, 춥다.”

그는 하루 종일 목걸이처럼,  네임태그처럼  걸고 있던 카메라를 카페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다.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  아침 일찍 출근했다가  저녁에 퇴근하는 일상을 가진 그는 주말이면 카메라를  챙겨 들고 길을 나선다.  세수를 포함한 샤워를 시작하고 끝내는 시간은 10분을 넘지 않지만 매주 한 번씩 카메라를 청소하고 고장 난 데가 있는지 살펴보는 시간은 한 시간을 훌쩍 넘긴다.  

     

항상 들고 나오던 검고 큰 카메라는 얼마 전부터 집에 고이 모셔두고 있다.  대신 가볍고 하얀 카메라를 자주 들고 나온다.  몇 달 전에 큰 카메라에 고장이 생겼고  고치는 과정에서 어떤 부품은 더 이상 구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더니  아마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카페 자리에 앉은 그가 양손을 가볍게 비볐다.  빨갛게 얼어버린 손이 카메라 렌즈에 어른거린다.  장갑을 끼고 다녔어도  손이 얼어붙을 만큼 추웠던 그날,  그는 사진을 찍을 때마다 장갑을 벗고 카메라를 들었다.   렌즈에 담기는 풍경도,  사람도, 건물도 마음에 들 때까지 여러 번 찍는다.  한 번 찍기 시작하면 보통 이십여분씩 한 곳에 머무른다.

     

출근하는 아침이면 그는 정장을 입는다.  가죽 가방을 짊어지고 머리도 깔끔하게 빗어 넘긴다. 그러나 주말이 되면 청바지에 니트티를 입는다. 느슨한 재킷을 걸치고  모자를 쓴다.  그리고 카메라 가방을 짊어진다. 빠르게 낡아지는 스니커즈와 그의 긴 그림자는 길어진 보폭으로 세상 밖으로 나간다.  마음에 드는 사진을 건질 때까지 식사하는 것을 잊어버린다.  게다가 좋은 사진을 찍었으므로 기분 좋아 배도 고프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오늘 두 끼를 겨우 먹었다.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 아침, 점심, 저녁을 제시간에 꼬박꼬박 먹는 ‘회사원 그’와 주말에 카메라를 들고 걷는 ‘보헤미안 그’는 마치 전혀 다른 두 사람 같다

회사원일 때 그는 생각을 자주 멈춘다.  숨쉬기 위해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출근하기 위해 생각할 필요가 없다.  지구의 자전 속도만큼이나 빨리 돌아가는 세상에서 그의 생각은 쓸모없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열정 위를 둥둥 떠다니는 보헤미안 그의 머릿속은 온통 질주하는 생각들로 가득하다. 생각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 없는 생명체가 드디어 그 가치를 증명한다.  


카메라를 처음 샀던 예전 어느 날,  그는 새로운 세계를 마주한다.  그림과는 달리 무엇도 생략되지 않는 세상, 모든 것이 지나치게 선명한 그곳에 매혹되어 버렸다.  카메라는 거짓을 모른다.    사진은 잔상을 보여주기만 할 뿐이다.  보는 사람에게 설명 해달 라거나 이해해 달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무음의 세상에서 색채는 현실보다 더한 현실을 담는다. 피는 더 잔인하게 핏빛이고  노을은 평소보다 더 슬펐다.  변하기 쉬운, 상하기 쉬운 마음을 가진 인간들보다 백배는 더 진심을 가진 녀석이다.



카메라와 함께라면 언제든 그는 떠날 준비가 되어있다.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는 곳에는 손때 묻은 카메라가 있다.


그는 살아있고 떠나고 돌아오고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의미 없어질 순간들을 기록한다.  카메라를 둘러맬 때마다 그는 여행을 떠난다.  존재하기 위해 존재하는 회사원의 세계에서   그만의 세상으로,  빛과 색채로 이루어진 기록의 세상을 향해  순간을 잡아두는 마법의 기계와 함께.

    


     

     

작가의 이전글 차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