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카오 여행

역사적 유적을 돌아보며

by 영인

2019년 12월 24일 아침, 생각보다 일찍 잠에서 깨어났다. 지난밤에 피곤한 상태로 밤늦게 잠들었는데도 컨디션이 좋다. 낯선 여행지에서 맞는 아침은 새로운 곳을 탐험하고 싶은 열정과 함께 시작하는 모양이다. 마카오 여행은 겨우 4박 5일. 마음이 급하다. 여행정보는 인터넷에 가득하고 발길은 가볍다. 우리는 그 전날 시장에서 사 온 바나나로 아침을 때우고 숙소에서 나와 새로운 아침을 걷기 시작했다.

아침 일찍이라 상가는 아직 닫혀있다. 오토바이나 자전거가 많이 눈에 띄는데 다들 출근하러 가는 듯 바빠 보인다. 세계 어디에서나 출근하는 사람들은 비슷한 기분인 모양이다. 아침 기온은 19도, 약간 흐린 하늘과 70- 80% 습도. 겨울에도 낮에는 덥고 오래 걸으면 등에 땀이 흐른다. 한겨울 추위에 떨다 온 우리에게는 이곳의 날씨가 그 숫자보다 훨씬 따뜻하게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습도가 이만큼 높으면 눅눅한 기분이 들 것 같지만 바람이 시원해 오히려 서늘하다. 길을 걷다 보면 한국에서 온 관광객을 많이 볼 수 있다. 대부분 여행지에 온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셀카를 찍느라 분주하다.


하루가 지나니 한문 표지판도 눈에 익기 시작했다. 어릴 때 배웠던 한자들을 기억해 내며 이리저리 뜻을 조합해 본다. 벌써 이곳 여행이 익숙해지고 있는 기분이다. 세상 모든 도시가 대부분 그렇듯 마카오도 밤과 낮의 인상이 다르다. 지난밤 현란한 황금빛으로 빛나던 카지노의 도시는 이른 아침이 되니 분주한 관광객의 도시로 바뀌었다. 분주한 아침 공기를 마시며 숙소에서 가까운 곳부터 역사적 유적지를 하나씩 둘러보며 북쪽으로 향해 걷기로 했다.

길을 걷다 보면 어디선가 독특한 향 냄새가 풍긴다. 마카오에서 길을 걸을 때 음식점 사이에서도 오래된 성당 골목에서도, 관공서 근처 큰 길가에서도 고즈넉한 시골길에서도 흔히 마주쳤던 것은 '사원'이었다. 문 밖에서 봐도 붉은 벽과 화려한 장식들, 수많은 종류의 향이 눈길을 끈다. 우리나라에서는 흔하지 않은 풍경이라 나도 모르게 발길을 멈추고 기웃거렸다. 대문을 활짝 열어둔 사원 앞에서 얌전해 보이는 아주머니 한 분이 자신의 키만 한 빗자루로 앞길을 쓸고 계시다가 구경하고 있는 나를 보자 '이리 들어오라'는 듯 손짓을 하신다. 머뭇거리면서도 그녀의 호의에 이끌려 사원에 들어가 보았다. 붉은빛으로 가득한 실내에 아침 햇살이 비쳐 든다. 짙은 향냄새 속에서 낯선 신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당 안에 몇 발자국 들어섰을 뿐인데 바로 문 밖에서 시끄럽던 자동차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대신 어느 종교나 그렇듯 진심으로 믿으면 신과 닿을 수 있다는 희망과 믿음, 경건함이 느껴져 내 마음도 숙연해졌다.


마카오 반도가 포르투갈인의 특별 거주지역으로 조차 된 것은 1557년이었다. (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보다도 35년이나 앞선 일이다. ) 1680년에 총독이 파견되었고 1849년에 포르투갈은 마카오를 자유무역항으로 선포하고 마카오 전체 영토를 점령했으며 1887년 중국- 포르투갈 우호통상조약이 체결되어 정식으로 포르투갈에 영구 할양되었다. 1999년에 다시 중국으로 반환되기 전까지 포르투갈령이었기 때문에 곳곳에 그때의 유적이 남아있다. 유적들은 한 눈에도 현대식 건물과 구별된다. 화사한 파스텔 톤에 신고전주의 양식 건축물들은 화려한 돌바닥 위에 서서 아름다움을 뽐낸다. 건물에 쓰면 촌스럽지 않을까 싶었던 파스텔 핑크, 노랑, 민트가 기막히게 조화를 이루고 있어 눈을 즐겁게 한다. 크리스마스이브라서 그런 것인지 유적지가 몰려있는 세나두 광장 주위는 관광객들로 넘쳐났다. 크리스마스 때 명동에 나가면 그렇듯 사람들에게 쓸려갔다가 쓸려오는 기분이다. 그 사이사이에 서서 기념사진을 찍는 이들을 보면서 유명한 관광지에 왔다는 실감이 들었다. 세나두 광장에서 이어진 길을 걷다 만난 것은 아마 사원 (A-MA)이다. 아마는 뱃사람을 지켜주는 바다의 수호신 틴 하우를 뜻한다는데 마카오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자 가장 오래된 사원이라고 한다. 말 그대로 소원을 빌러 온 이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사원에 걸린 소용돌이 모양의 향이 눈길을 끈다.)


향냄새로 푹 젖어있는 경내를 돌아 큰길로 나가니 버스가 지나간다. 그런데 버스 번호가 'MT4' 다. 낯익은 번호라 어디서 봤는지 한참 생각하다 '아하, 그랬구나' 하며 나도 모르게 무릎을 쳤다. 마카오 공항에 막 도착했을 때 숙소 호텔로 가는 셔틀버스를 찾지 못해 공항에서 근무하는 아주머니 한 분께 여쭤봤던 일이 있었다. 그때 아주머니가 써주신 것, 'MT4'는 바로 버스 노선 이름이었던 것이다. 그때는 무슨 의미인 줄 몰라 감사하다는 말씀도 제대로 못 드렸구나 싶다.


크리스마스를 맞은 세나두 광장

여행책에 적힌 대로 유적지를 하나씩 둘러보며 걷다 보니 재래시장에 도착했다. 이곳도 역시 사람들로 북적인다. 어느새 점심 먹을 시간이 지난 탓에 근처 식당을 둘러보는데 그중 한 곳에만 사람이 많다. 아마도 맛집인가 싶어 우리는 그곳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가게 입구에 여러 가지 음식이 쌓여있는데 주인아주머니가 커다란 접시에 밥을 산만큼 퍼주시고 수많은 반찬 중에서 손님이 원하는 것들을 골라 담아주신다. 우리도 엉겁결에 줄에 서서 차례를 기다린다. 나는 음식을 가려먹는 편이라 식당에 가기 전부터 걱정이 앞섰다. 오리고기와 양고기, 향신료가 많은 음식은 먹지 못한다. 내 걱정에 L은 "못 먹겠으면 무조건 나에게 줘. 나는 다 먹을 수 있어." 하고 큰소리를 쳤다. 내 차례가 되자 나는 음식 중 닭고기처럼 보이는 것을 가리켰다. 그것만으로는 불안해서 말로 "치킨! 치킨"을 외쳤다. 아주머니는 내 말을 알아듣는 듯 삶은 닭고기 요리와 튀긴 닭고기 요리를 푸짐하게 올려 주셨다. 정작 신이 난 것은 내 바로 뒤에 서 있던 L이었다. 먹고 싶은 요리를 가리키며

"This one, this one, this one" 하고 하나씩 세었다는데 너무 많은 종류를 골랐던 것인지 담아주시던 아주머니가 손을 멈추고 엄격한 목소리로 "No!" 하셨다고 한다. 산처럼 음식이 담긴 접시를 받아 들고서도 L 은 다른 것도 먹어보고 싶다며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반면에 마카오 음식은 내 입에 맞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음식을 먹을때 마다 떡볶이 생각이 간절했다. 내가 마카오에서 가장 좋아했던 것은 식전에 주는 차였다. 진하게 우려낸 차를 아주 뜨겁게 내오는 것으로 그 차를 한잔만 마셔도 피곤이 풀리는 느낌이다. 뜨거운 차를 마시며 식사를 하고 나서 우리는 다음 장소로 향했다.


마카오의 명물인 에그타르트를 사기 위해 줄 선 사람들.

계단을 오르고 오르는 곳에 성 바울 성당이 있다. 언덕 위 성당에 서서 내려다보면 마카오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 옛날 포르투갈인들은 이 계단 위에 서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곳에 살던 중국인들은 그들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문화와 문화가 만나고 세계와 세계가 만났을 이곳에서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있었을지 조용히 서 있는 성 바울 성당이 속삭여 줄 것만 같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