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오던 그 길이 흐릿해졌다. 다시 돌아갈 생각은 없었지만 사라지는 그 길을 보는 것 만으로도 가슴이 아득해진다. 글은 쓰기 위해 존재하는 것, 글자는 읽기 위해 숨 쉬는 것, 종이는 펼쳐달라 아우성 친다. 자박 자박, 찰박 거리는 물 방울 소리가 곳곳 물 웅덩이에 차고 넘칠때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서서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를 듣는다. 그 곳에 섞인 그대의 목소리, 밥 먹다 문득 마주치는 눈빛이나 시니컬한 한숨소리를. 빙긋 웃을때 마다 내 오른쪽 팔에는 소름이 돋는다고, 앞서 걷는 큰 걸음에 가슴이 무너진다고 나는 비밀스럽게 속삭인다.
모든 것을 선택했다 믿었는데 사실은 탕진하고 있었다. 소비하고 또 소비하며 뭔가를 만들고 있다고 주장했다. 아닌데, 혹은 그럴리가. 의심하고 주저한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고쳐 쓴다. 그러다 엎어져 잠이 든다. 다시 일어나 쓰기가 두려워 눈을 감은채 컴퓨터를 끈다. 어기적 어기적 소파에 누워 창문에 흐르는 빗물을 센다. 이만 이십 일 방울, 이만 이십 이 방울, 그리고..... 또, 그리고.
식탁에 음식을 차려놓고 그대가 좋아한다던 냉이 된장국을 한 그릇 담는다. 허영이다. 사치다. 그대와 함께 마주 앉아 수저를 들고 도란도란 예전 그날처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면, 소원처럼 빌어보면 비가 그치려나. 궁금해도 무척이나 궁금한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