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그 이야기를 들은 것은 며칠 전 이었다. 함께 저녁을 먹은 후 마르코는 차 한잔 하겠냐고 물었고 나는 그러자고 대답했다. 밤이 깊어 가게 문을 내린 양복점 안에서, 남은 차를 마시며 그가 아주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미 끝난 일을 확인하듯, 혹은 누군가에게 맡겨두어야만 할 물건을 건네듯이.
그는 자신을 변명하지 않았다. 특별한 후회도 없어 보였다. 낡아진 옷에서 고쳐야 할 부분을 설명하듯 그때 경성에 있었던 일들, 사라진 사람들, 남아버린 것들에 대해 차례로 말했다.
그의 말은 군더더기가 없었고, 감정은 절제되어 있었다. 그러나 듣는 동안 나는 알 수 있었다. 이것은 복수담도, 고백도 아니라는 것을. 한 사람이 어떤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라는 것을. 그는 자신의 삶에서 넘어야 했던 선들에 대해 말했고, 그 일을 해내기 위해 치러야 했던 시간에 대해 말했을 뿐이다.
이야기가 끝났을 때, 가게 안에는 잠시 침묵이 남았다. 밖에서는 물소리가 들렸고, 나는 그 소리가 이 이야기의 마지막 문장처럼 느껴졌다. 마르코는 더 말하지 않았고, 나는 그 이야기를 어떻게 기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분명한 것은 하나였다. 이 이야기는 누군가에게 들려짐으로써 끝나야 했다는 것, 그리고 그 역할을 우연히 내가 맡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글은 그날 밤, 마르코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가능한 한 그대로 옮긴 것이다. 덧붙인 것도, 덜어낸 것도 없다. 다만 듣는 사람이 바뀌었을 뿐이다. 이제 이 이야기는, 나를 거쳐 당신에게로 흘러간다. 홍제천이 늘 그랬듯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1)
1938년 비 오는 밤, 이탈리아인 마르코는 양복을 맞추러 온 순사 한 명을 홍제천 아래로 유인하며, 이 순간을 위해 이미 오래전부터 시간을 쌓아왔음을 떠올린다. 빗물은 천천히 하천의 수위를 불리고 있었고, 돌에 부딪힌 물소리는 일정한 박자로 이어졌다. 마르코는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경성의 시간이 언제나 그렇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흘러간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순사는 새로 맞춘 양복의 소매를 만지작거리며 걸었다. 젖은 구두가 자갈을 밟을 때마다 짧은 소리가 났고, 그는 그 소리를 신경 쓰지 않는 척했다. 마르코는 한 발 앞서 걸으며 길이 미끄럽지 않은지, 비가 더 세지지는 않는지를 무심한 말투로 확인했다. 이 대화는 이미 여러 번 연습된 것이었고, 그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차분했다.
홍제천 아래로 내려가는 길은 어둡고 좁았다. 비에 젖은 흙 냄새가 진했다. 마르코는 그 냄새 속에서 지난 시간들을 겹겹이 떠올렸다. 양복점에서 순사를 처음 만났던 날, 순사와 다시, 또 다시 만나면서 전해 들었던 선자에 대한 소식들. 그 모든 선택은 이 밤을 향해 정리되어 있었다.
그는 이 일을 충동으로 시작하지 않았다. 누군가의 죽음 이후 바로 이어지는 분노도 아니었다. 대신 기다렸고, 계산했고, 아무 일도 없는 얼굴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순사가 일본으로 떠난 뒤의 사 년은 그렇게 흘러갔다. 낮에는 양복을 지었고, 밤에는 홍제천 가의 오두막에서 땅을 파내려갔다. 흙의 질감과 무게, 무너지는 지점을 몸으로 익히는 시간은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이제 순사는 그의 바로 뒤에 있었다. 마르코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더 아래로 내려가자고 말했다. 빗소리가 커지면서 말은 거의 들리지 않았지만, 순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짧은 동작을 보며 마르코는 알았다. 이 밤이 지나면, 이 도시는 다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흘러가리라는 것을. 그리고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는 것도.
그는 일본 순사와 독립운동가 모두의 옷을 지어주던 경성의 이태리양복점 주인이었다. 양복점은 홍제천과 아주 가까웠기 때문에 그는 점심시간마다 홍제천 주위를 천천히 산책했다. 그로 말할 것 같으면, 옷 만드는 데 있어서만큼은 지나칠 정도로 완벽주의자였다. 몇 번 조수를 썼던 적이 있었지만, 그들은 마르코의 방식을 견디지 못했다. 결국, 그는 혼자 일하게 되었다. 손님의 치수를 재고, 재단과 바느질과 모든 공정을 스스로 진행했다.
가게 안에는 늘 비슷한 냄새가 머물렀다. 다림질한 천에서 올라오는 열기, 새 실과 오래된 나무 진열장에서 배어나는 냄새가 섞여 있었다. 마르코는 그 냄새 속에서 사람들을 상대했다. 제복을 입은 순사는 거울 앞에서 자세를 바로 세웠고, 밤에만 찾아오는 남자들은 모자를 벗지 않은 채 치수를 불렀다. 그는 누구에게도 묻지 않았다. 옷은 몸에 맞으면 되는 것이었고, 그 이상은 그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경성에서 이탈리아인은 애매한 위치에 있었다. 사람들은 마르코가 이탈리아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순간, 그 앞에서 말을 가리지 않았다. 외국인인 그가 한국어도, 일본어도 모를 것이라는 확신 속에서 그들은 낮은 목소리로 해야 할 이야기들을 굳이 낮추지 않았고, 사적인 속내와 비밀스러운 거래를 그의 작업대 옆에서 흘리듯 주고받았다. 마르코는 그 말들 대부분을 알아들었다. 단어와 단어 사이에 숨겨진 뜻까지도. 그러나 그는 고개를 조금 숙인 채, 바늘에 실을 꿰거나 천의 결을 더듬으며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숨을 골랐다. 웃어야 할 때는 늦게 웃었고, 침묵해야 할 때는 더욱 깊이 침묵했다. 그들은 그 침묵을 무지로 착각했고, 마르코는 그 오해 속에서 누구보다 많은 것을 들었다.
순사들은 그의 가게에서 외투와 양복을 맞추며 사적인 이야기를 흘렸고, 독립운동가들은 밤늦게 찾아와 주머니 안쪽에 무기를 숨길 수 있는 재킷을 주문했다. 마르코는 그 말을 듣고도 고개를 끄덕일 뿐, 기억하지 않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마르코는 한 달에 한 번, 양복점이 문을 닫는 날이면 서소문동의 카페로 향했다. 간판이 낡아 글자가 반쯤 지워진 곳이었다. 그는 늘 같은 자리에 앉아 창밖을 보며 커피를 시켰다.
잠시 뒤에는, 이태리 영사가 보낸 깡마른 소년이 문을 밀고 들어왔다. 아직 어른이라 부르기엔 이른 얼굴에 코트는 몸보다 조금 컸다. 소년은 마르코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 마르코는 아무 말 없이 맞은편 의자를 당겨준다. 그들은 빵을 나눠 먹고, 커피를 식히며 마주 앉아 오래 시간을 보낸다. 대화는 거의 없다. 마르코는 안주머니에서 얇은 노트를 꺼낸다. 종이 사이사이에 모아둔 이름들, 시간들, 장소들이 빽빽하게 적혀 있다. 소년은 노트를 넘기며 고개를 끄덕인다. 두 사람의 눈빛이 처음으로 마주친다. 마르코는 그 순간에만, 이 도시에서 자신이 완전히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노트가 소년의 코트 안으로 사라지면, 두 사람은 각자의 옷에 묻은 빵 부스러기를 털어낸다. 카페를 나설 때까지도, 그들은 끝내 서로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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