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72. 일기떨기: 소진의 밀린일기

"네가 할머니가 되면 나는 할아버지가 될 거야"

by 일기떨기
IMG_5071.jpg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당신은 사랑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별과 무지개 중에서 어느 것을 더 좋아합니까?


 몽골의 소년들을 다시 만났고 우리는 헤어지지 않고 밤새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난여름과 달리 눈앞에는 드넓은 초원도 자유롭게 풀을 뜯는 야생마도 없었다. 겨울이면 석탄으로 난방을 가동하는 울란바토르 시내는 매연으로 가득했고 여름에 만난 소년들의 얼굴은 초원에서와 달리 한층 환해 보였다. 한 해에 같은 나라를, 그것도 여름과 겨울에 각각 나눠 방문하는 것은 내게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여행지에서 만나 언제고 다시 보자던 약속을 이렇게 빨리 지키게 될 거라고는 감히 상상하지도 못했다. 나와 친구는 크리스마스 이틀 전에 한국에서 출발해 꼬박 3일 동안 홉스골에 있었다. 영하 30도에도 얼어붙지 않은 호수 위를 조심스럽게 걷거나 그럼에도 투명한 어둠 속을 들여다보며 서로의 끼니를 챙기고 설산을 오르고 이제 정말 끝나도 괜찮을 것 같은 2024년 돌아보았다.


 홉스골에서 므릉 다시 불강주를 지나 도시로 돌아오는 길, 다시 만날 거라 예상하지 못해서일까. 처음에는 나에게 일주일 내내 말 타는 법을 알려준 이들의 얼굴이 낯설게 느껴졌다. 어쩐지 여름과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들. 내 남동생 또래의 그들은 아이라고 하기에는 하나같이 눈빛이 진지했고 어른이라고 하기에는 천진난만했다. 무슨 말을 어디서부터 꺼내야 할지 모르고 있을 때, 누군가 한 명이 구글 번역기로 질문을 이어나갔다. 이후에는 몇몇이 머리를 맞댄 채 번역기를 사용해 비밀스러운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밤하늘의 별을 보며 누구의 얼굴을 떠올리는지,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슬픈 순간에는 어떻게 하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지에 대해서. 초원에서 말의 고삐를 나무에 묶은 채로 담배를 피우던 소년들은 보기 좋게 그을린 얼굴 뒤로 이런 표정들을 숨기고 있었던 걸까. 수도 울란바토르에 인구가 집중 포화된 탓에 나아지지 않는 대기 오염부터 도시에 살기에 턱없이 부족한 낮은 임금과 취업난, 정치인과 고위직의 부정부패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자신들의 고민을 가감 없이 털어놓았다. 그러면서도 나와 내 친구에게는 인생의 최종 목표에 대해 묻기도 했다. 우리는 그 질문에 마치 서로 짜기라고 한 것처럼 ‘자유’를 말했지만 머지않아 한국에서 들려온 소식에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과연 자유가 있기는 했던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죄를 지은 사람은 스스로 무엇이 잘못했는지도 모르는 채 버티고 있고 그사이 무고한 시민들이 너무도 많은 소중한 사람들이 사랑하는 이들의 곁을 떠났다. 이러한 참담한 순간 앞에서는 어떠한 말이 필요한 걸까. 사람이 사람을 위로할 수 있긴 한 걸까. 그런 의문을 품기도 전에 한 친구가 내게 사랑이 무어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쉽사리 대답할 수 없었다. 그게 무엇인지, 내게 있기나 한 것인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내가 답을 망설이고 있을 때면 또 다른 친구가 씩 웃으면서 근사한 답을 꺼내놓았고 우리의 대화는 다시 이어졌다.


 이십 대 중후반이면 결혼을 해 자신의 가정을 책임져야만 한다는 이들은 몽골 남자는 절대 울지 않는다고, 아주 슬픈 날이면 마음으로만 운다고 말하면서도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우리에게 사랑에 대해, 삶에 대해, 인생에 관해 묻곤 했다. 나흘 동안 하루는 시장에 갔다가 장을 봐서 밥을 지어먹고, 하루는 캄캄한 도시를 이곳저곳 걸어 다니고, 한 해의 마지막에는 영화관으로 가 영화 <하얼빈>을 보았지만 내게 가장 짙게 남은 건 밤새 번역기로 나눈 대화였다. 서로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다가 해석할 수 없는 말이 나오면 잠시 침묵. 그리고 상대에게 가장 필요한, 필요했던 질문을 건네는 일. 자기 인생의 모든 승리를 위해 기꺼이 울 준비가 되어 있다는 나의 승마 스승은 지금의 나이가 젊다는 것을 알면서도 왜인지 많게만 느껴진다는 내 말에 “네가 할머니가 되면 나는 할아버지가 될 거야”라고 대답했다. 한 해의 마지막 날, 우리는 옷을 단단하게 입고 광장으로 가 사람들 속에서 새해를 맞이했다. 5, 4, 3, 2, 1! 해피 뉴 이어! 저녁을 먹고 나서 국영백화점에서 산 샴페인을 터뜨린 후 종이컵에 나눠 마시며 서로의 행복을 기원했다.


 곧이어 쏟아지는 폭죽 속에서 나는 이들에게 한 말들, 지금보다 더 소박하고 간명하게 나 자신을 속이지 않고 내 삶에 충실하고 싶단 말과 타인의 기쁨과 슬픔에 깊이 공감하며 살아가고 싶다는 말을 지켜낼 거라 다짐했다. 여름에 이들에게 말을 타는 법을 배웠다면 겨울에는 나 자신으로 살아가는 법에 대해 배웠다. 내내 수줍은 얼굴로 망설이다가도 자신에게 주어진 질문 앞에서는 더없이 진지해지는 친구들은 내가 타인으로부터 가장 받고 싶었던, 내내 원했지만 원한다고 말하지 않았던 ‘시간’을 통째로 나에게 주었다. 한 해의 마지막 날 아침, 몽골 친구 세 명 중에서 두 명이 각자 볼 일을 보기 위해 집을 비운 날이었다. 나의 한국인 친구는 커피를 내리고 바이아르 혼자 그가 차려준 아침을 먹고 있었다. 밤새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어쩐지 어색해 보이는 그에게 다가가 친구들이 다 가서 어색할 것 같다고, 편하게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휴대폰을 집어 들더니 번역기로 “너도 내 친구야”라고 답했다. 어떤 말은 애를 쓰지 않아도 너무도 분명하게 번역이 되고 때때로 말이 아예 필요치 않은 순간도 있다. 번역이 필요치 않은 세상에서 나는 얼마나 많은 말들을 아꼈던 건지. 몽골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난생처음 여동생과 남동생에게 짧은 엽서를 썼다. 너희도 이곳에서 꼭 친구를 만났으면 좋겠다는 추신과 함께.




대화 주제

■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 당신은 사랑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 별과 무지개 중에서 어느 것을 더 좋아합니까?


더 자세한 이야기는: https://podbbang.page.link/N3KgWN9A42RCnsLw6


일기떨기 03. 소진

낮에는 책을 만들고, 밤에는 글을 씁니다.

그 사이에는 요가를 하고요.

일기떨기 인스타: https://www.instagram.com/illki_ddeolki/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71. 일기떨기: 혜은의 밀린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