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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일기떨기: 선란의 밀린일기

타인과 한 공간을 공유하며 살아가는 게 가능한가?

by 일기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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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겨울, 언니가 결혼을 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그다음 순서는 나라는 듯이, 올 설에 만난 모든 친척들이 언제쯤 갈 것이냐고 물었다. 그게 내가 정하면 갈 수 있는 거였나? 만나는 사람 없다고 너스레를 떨며 웃었다. 마냥 타인의 문제라 여겼던 질문들이 나한테 쏟아지니 이거... 만만치 않게 아찔하다.

그렇다고 아무 생각이 없는 건 아니다. 언니가 좋은 짝을 만나, 삶의 고민을 이제는 나나 아빠가 아닌 형부와 하는 걸 보면 사람들이 결혼을 하는 여러 이유 중 나란히 걷는 사람을 만나서라는 말이 이제 이해가 된다. 결혼이라는 제도보다 마라톤을 같이 뛸 파트너를 만나는 거라고 말해준다면, 너무 혹하는 걸! 나 역시도 그런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근본적인 문제로 향한다. 나, 정말 다른 사람과 살 수 있을까? 타인과 한 공간을 공유하며 살아가는 게 가능한가? 일단 상상의 결말부터 이야기하자면, 끔찍하다. 정말로...

본격적으로 혼자 살기 시작한 지 언 3년이 지났다. 하지만 그전에도 자취 아닌 자취였는데, 내가 아닌 가족들이 나가 살아서 어영부영 집에 혼자 살게 된 시간도 길었다. 그렇다 보니 이제 가족도 남이라는 감각이 있다. 지금 내 집에 오는 언니와 아빠는 손님이다. 가족이 아니라, 내가 대접하고 신경 써야 하는 손님말이다. 본가나 언니의 집도 내 집이 아니다. 우리의 집도 아니다. 공간이 달라진다는 건 이토록 여파가 크다. 우리는 이제 한 공간을 공유하지 않기에 서로 말하지 않으면 언제 잤고, 무얼 먹었는지조차 알 수 없다. 모르는 영역이 많아진다. 그렇게 남에 가까워진다.

내가 사는 집은 오로지 나의 취향과 나의 일상, 동선의 편의로 만들어졌다. 그 공간에 어떤 형태든 타인이 들어오는 건 내 몸 하나를 던져준 것처럼 신경 쓰인다. 한 마디로 불편하다. 방문객이 간 후에야 오는 안정과 평화가 있다. 공간을 되찾았다는 이상한 승리감도 있다. 지난해에는 불쑥 나와 결혼을 꿈꾸던 사람이 스쳐 지나갔는데, 그때 불현듯 ‘결혼을 하면 이 사람과 같은 공간에 있어야 하는 거야?’라는 생각이 들며 헐레벌떡 도망갔다. 언니는 사랑하지 않아서 그런 거라 했는데, 무슨. 언니랑 아빠를 사랑해도 난 같이 살고 싶지 않은 걸.

그러니 근본적인 질문을 자꾸 던진다. 나, 정말 타인과 살 수 있나? 모두가 다 그것이 행복하기에 기꺼이 살림을 합치는 게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가족이라는 건 한 공간에 있다는, 일종의 상징이니까. 세상에 사람이 너무 많고, 이제 각자 다른 형태를 꿈꿔도 좋은 시대 아닌가. 같이 안 살고 싶다. 사랑은 좋은데.




더 자세한 이야기는: https://podbbang.page.link/N3KgWN9A42RCnsLw6


일기떨기 02. 선란

『무너진 다리』 『어떤 물질의 사랑』『천 개의 파랑』『밤에 찾아오는 구원자』『나인』『노랜드』『아무튼 디지몬』『모우어』를 썼습니다.

환경파괴, 동물멸종, 바이러스를 중심으로 SF소설을 씁니다.

일기떨기 인스타: https://www.instagram.com/illki_ddeol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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