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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일기떨기: 혜은의 밀린일기

그냥 거기에서 해실대고 있는 나를 내가 좀 봐주고 있는 게 좋았다.

by 일기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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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박 7일로 도쿄에 놀러 갔다 왔다. 홍콩에서 보낸 지난 신년 이후로 1년 만에 간 해외여행인데, 이번엔 어쩐지 여행이란 말보다 실컷 놀고 왔단 말이 더 잘 어울려서 그렇게 쓴다. 친구들과 2박 3일을 함께 하고 뒤에 4일을 혼자 더 도쿄에 남기로 한 여정이었다. 참 많이 애쓴 작년에 스스로에게 주기로 한 얼마간의 휴가를 계속 미루고 있었는데, 마침 친구들이 좋은 핑계가 돼 준 것이다. 우정도 보상도 한 번에 해결해버리자, 하고.

한편으론 친구들의 일정과 목적에 맞춰 정해진 일본이 아니었다면 4일보다는 더 머무르려 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으로 발권을 했다. 난 해외여행을 자주 즐기진 않지만, 어차피 일상을 멈추고 떠날 거라면 짧은 여행은 오히려 성가시게 느껴지니까. 아예 무리해버리는 게 낫다는 주의다. (그리고 이런 마음은 나를 더 쉽사리 떠나지 못하게 만든다)

그래서 마침내 도착한 도쿄, 첫 일본 여행이 어땠냐면.. 요약하자면 나는 이 여행에 욕심을 더 냈어야 했다. 하늘이 일주일 내내 쾌청하고, 이따금 몰아치는 바람소리는 매서워도 살결에 스치는 공기의 질감만은 부드러운, 그러니까 내 기준에선 봄이나 다름없는 날씨 덕분이었을까? 기분도, 체력도 모든 텐션의 게이지가 최상이었다. 신년 내내 은은한 무기력으로 다소 가라앉아 있는 상태였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뭔가에 몰두하고자 하는 마음이 좀처럼 하나로 모이지 않고 자꾸만 흩어지는 게 못마땅하면서도 그런 스스로를 다잡는 것조차 왠지 귀찮은… 전에 없이 부유하는 겨울이었는데 분명.

도쿄에서 모든 의욕을 찾았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앞선 상태를 모두 잊을 수 있을 만큼 즐거웠다. 아니다, 잊었기 때문에 즐거웠는지도 모르겠다. 일주일간 나의 내부도, 나와 가까운 외부도 몽땅 개의치 않은 채 지냈다. 이런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마음이 그렇게 됐다. 유난히 명랑한 자신이 좋긴 한데,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나사 하나 빠진 채로 다니겠지 싶었다. 그러니 도합 일주일 정도로 마무리된 여행이 결과적으로 다행이긴 한 것이다.

친구들이 도핑 테스트 해봐야 하는 거 아니냐고 놀렸을 때도 그게 다 걔네들 때문인 줄만 알았다.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는데 얘네들이랑 있으면 헛소리를 더 잘하게 되고, 한없이 우스꽝스러워지니까. 그런데 남은 일정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허투루 입을 열 일만 없을 뿐, 조용한 광기로 벅차오르는 내가 느껴졌다. 그저 친구들이 함께 있을 땐 즐겁고, 혼자서는 행복하구나. 이미 짐작하고 있던 정도의 차이만 발견하고 말았다. 마찬가지로 두고 온 일상은 조금도 생각나지 않고 매일매일을 누렸다. 평소의 내가 만끽하는 것들은 아주 작은 것들인데, 이번에는 누가 봐도 누리는 것들을 누리며 다녔다. 그런데도 부대끼거나 물리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런 거다. 이번 도쿄 여행용으로 나 자신을 대여한 것 느낌. 반납할 필요 없이, 거기에 두고 오면 되는. 괜히 아껴 쓰거나 중간중간 상태를 점검하지 않아도 된다. 그래서 ‘아, 그냥 이렇게만 살고 싶다’는 말이 맴돌 땐 스스로에게 조금 실망했다. 아닌가, 이건 좀 오번가? 지금 한국에 오자마자 짐 정리를 하고 씻고 일기를 쓰느라 다소 과장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나에게 서운했다, 정도로 정정한다.

도쿄의 어떤 것들이 좋았다기보단 그냥 거기에서 해실대고 있는 나를 내가 좀 봐주고 있는 게 좋았다. 이다음 같은 건 생각하지 않고, 여행의 끝을 조금도 기다리지 않고.




더 자세한 이야기는: https://podbbang.page.link/N3KgWN9A42RCnsLw6


일기떨기 01. 혜은

『아무튼, 아이돌』 『일기 쓰고 앉아 있네, 혜은』『매일을 쌓는 마음』『우리들의 플레이리스트』를 썼습니다.

망원동 '작업책방 씀'에서 다음 이야기를 쓰고 있습니다.

일기떨기 인스타: https://www.instagram.com/illki_ddeol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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