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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일기떨기: 소진의 밀린일기

"이건 말할 수 없는 비밀이야."

by 일기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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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여행 직전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을 봤다. 공항에 도착하기 6시간 전쯤이었고, 그는 이미 공항에 도착해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아주 작고 사소한 일도 사과를 받아야만 직성이 풀리고 상대가 미안하다는 말만 하면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편이다. 약속 시간에 아주 늦거나 아니면 약속을 했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었거나 그것도 아니면 아예 장소를 착각해서 엉뚱한 곳에 있다거나 하는 일들. 이런 일은 가벼운 사과만으로 금세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 되어버린다. 그럼 나는 언제 화가 나는가. 대체로 나 자신이 이해가 되지 않을 때, 내가 말도 안 되는 고집을 부리고 이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돌변해 있을 때 화가 난다. 이미 화가 잔뜩 났는데 해소할 수 없을 때 대체로 옆에 있는 사람에게 불똥이 튀어버린다. 대체로 이런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여동생 아니면 가끔 엄마 정도였던 것 같은데 보통 아무런 잘못을 하지 않는 그 역시 피해자가 되곤 한다. 푹신한 침구와 빛이 들지 않는 캄캄한 실내 그리고 아주 고요한 정적까지. 잠에 들 수 있는 최적화된 장소였음에도 나는 채 두 시간도 잠들지 못했고 결국 폭발했다. 한 번씩 어릴 때도 부리지 않던 투정을 부리고 나면 너무도 민망해서 도망치고 싶어지는데(이마저 최악이다), 대만에서의 마지막 날이 꼭 그랬다. 첫날 조식이 아주 마음에 들었음에도 양껏 먹지 못했고 어떤 게 왜 맛있는지조차 말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싱싱하다 못해 아주 빳빳하기까지 한 채소들과 평소 즐겨 먹는 낫토와 좋아하지만 자주 찾진 못했던 아사이볼. 버섯인 줄 알고 집었는데 흑임자가 가득 들어 있었던 빵까지. 다음에 타이베이에 와도 이곳을 찾아야겠다고 다짐(마음먹기) 혹은 결심(돈 벌기)하게 만드는 식사였다. 그런데도 나는 못난 내 마음을 제대로 알고선 물러서지 않는 그에게 화가 났고 혼자 단수이로 떠나버렸다. 떠났다고 하기에는 타이베이에서 지하철로 40분가량 걸리는 곳이었지만 내 마음은 호텔을 나와 처음으로 현금을 인출하고 지하철 역사에 이어지는 서점을 도는 내내 멀리멀리 떠나버렸다. 혼자서 오로지 내가 태어난 1994년도에 개점했다는 이유만으로 맛없는 밀크티를 먹고, 어디 들어가서 밥이라도 먹을까 궁리하다 결국 대왕 카스텔라만 사서 호텔로 돌아왔다.


 단수이에서는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의 배경이었던 진리 대학과 홍마오청을 둘러보았는데 처음 든 생각은 무척이나 작구나였고, 나올 때까지도 정말 작구나,라는 생각이었다. 작고 붉은 곳. 작아서 시공간의 이동이 가능하고 붉어서 목숨을 걸고 사랑할 수 있는 곳. 바다를 끼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지나올 때까지 온갖 생각을 하면서도 말끝마다 '이건 말할 수 없는 비밀이야'하고 되뇌었다. 대체로 나만을 위한 생각이었고, 대체로 나는 나만을 위하며 산다. 호텔에 돌아오기 직전에서야 그가 타이베이에서 하고 싶었던 유일한 일이 시티 버스 타는 것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도 나와 비슷한 구석이 있어서 본인이 아무리 원하던 것이라도 상대의 비난이 침입하는 순간 마음이 짜게 식어버린다. 말이 헛나오는 순간부터 아, 이번 여행에서 시티 버스는 절대 탈 수 없는 것이겠구나,라고 깨달았으니.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각자 본 산책 풍경을 공유하고 야시장으로 갔다. 가오슝에서부터 타이베이까지 명절에도 문을 연 곳은 야시장뿐이었고, 복잡하면 복잡하게 한가하면 한가롭게 야시장을 누볐다. 그가 가고 싶다고 한 굴전집에 가서 1시간 정도 기다리는데 비가 쏟아졌다. 귀신과 비의 나라라더니 아무리 건기여도 그렇지 비가 참 지독하게도 안 내린다. 나는 비 내리는 걸 좋아하고, 궂은 날에 오히려 기분이 좋아지는 걸 평생의 훈장처럼 여기고 살아온 사람인데. 이렇게 건조하니 괜히 성질만 더 나는 거지,라는 말도 안 되는 사고 회로에 이르렀을 때. 비가 미친 듯이 쏟아지면서 야시장 통로를 꽉 메우던 인파가 순식간에 흩어졌다. 우리는 각자 구비해온 비옷을 입고 비가 오네, 정말 오네,라는 식의 대화를 하면서 각자 굴전을 먹고, 굴국과 굴 무침을 나눠 먹었다. 내가 노로바이러스에 걸린 후에도 끊지 못한 음식, 발자크의 재산을 탕진하게 만든 음식. 대만에서 먹은 것 중에 나도 그도 굴전이 가장 맛있었다고 말하는 게 마음에 들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편의점에서는 좀처럼 보지 못한 18일 맥주를 한 캔 샀다. 갤러리아 명품관 지하로 이어지는 호텔의 입구. 이런 곳에 살면 말할 수 없이 외롭겠지, 싶으면서도 세상 귀하고 아늑한 기운을 가득 품은 곳. 악기 연주를 들으며 호텔로 올라갈 때는 단수이에 혼자 가서 금세 까먹어버릴 비밀들을 혼자서 잔뜩 안고 돌아온 게 미안했다.


 다음 날에는 아침 비행기 시간에 맞춰 가장 먼저 조식을 먹고 공항으로 갔다. 아직 사람들의 손이 닿지 않은 음식과 처음으로 내린 커피. 아무래도 공항 가는 시간이 빠듯해서 조식 신청을 하는 게 아까울 것 같다는 말에 그는 "그래도 먹자, 같이 먹으면 좋을 것 같아"라고 말했지. 공항에 도착해서는 그냥 수화물을 추가하자는 그에게 캐리어를 그것도 큰 캐리어를 두 개나 각자 들고 왔고, 각자 배낭도 있는데 수화물 추가는 말이 안 된다며 나는 짐가방을 세 번 정도 풀었고 결국 전날 산 캔맥주를 아주 미지근하게 공항 내부에서 마셨다. 그가 나에게 준 건 다 좋은 것들인데 나는 그에게 무엇을 주었지?




더 자세한 이야기는: https://podbbang.page.link/N3KgWN9A42RCnsLw6


일기떨기 03. 소진

낮에는 책을 만들고, 밤에는 글을 씁니다.

그 사이에는 요가를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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