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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일기떨기: 혜은의 밀린일기

by 일기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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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과 휴무에는 내내 고베에 있었다. 책방 동업자인 미화언니와 함께 일본 영화 <해피엔드> 속 촬영지를 방문하는 영화여행을 떠났기 때문이다. "Moved by Movie". 줄여서 '무바무'라고 부르는 이 여행은 미화언니가 좋아하는 영화의 촬영지를 직접 찾아가 사진과 글로 기록하는 작업으로, 그녀와 평생을 함께 할 프로젝트다.


 이 프로젝트의 유럽 편이 담긴 책을 독자로 읽으면서, 일본 편이 담긴 책의 보도자료를 쓰면서, 그리고 또 몇 번의 영화여행을 설레며 떠났다 뿌듯하게 돌아오는 언니를 신기하게 지켜보면서도 이 여행에 함께 하는 나는 좀처럼 그려지지 않았다. 영화도 여행도, 어쨌든 내 취향의 바운더리에서 가장 바깥에 있는 것들이니까.

물론 한 번은 함께 하지 않을까, 막연히 짐작은 했지만 그 시간이 이렇게 빨리(?) 그리고 갑자기 올 줄은 몰랐다.


 그렇다. 내가 여름을 앞두고 영화 <해피엔드>를 너무 재미있게 본 탓이다. 그 영화가 마침 또 이웃나라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지금 당장 이 영화여행을 떠날 수밖에 없게 만든 몇 가지의 조건과 행운들이 따라오면서 마침내 나도 영화 속을 걸어보는 여행을 해보게 되었다.


 영화에는 유년을, 10대를 함께 하며 스물을 목전에 앞둔 친구들이 등장한다. 운명처럼 하나라고 느꼈다가 필연적으로 달라지고 마는 우정의 균열, 말하자면 성장의 한 과정을 아련하면서도 섬세하게 비추다가 종래에는 서늘한 구석까지 끌고 가는 이 영화에 내가 반하지 않을 도리는 없었다.


 여행은 어땠냐고? 여행은 다행히 영화처럼 다면적이지도, 복잡하지도 않았다. 그저 내내 즐겁기만 했다. 여느 여행과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좀... 실없이 즐겁다는 것?


 평범한 육교 앞에서 엔딩 장면을 따라 한답시고 허공에 주먹을 내지르며 웃고, 평범한 나무 앞에서 오프닝 장면을 따라 한답시고 냅다 한 밤의 달리기를 하다 웃고, 평범한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잠복근무를 하듯 영화 속 촬영 자리가 나기를 기다리며 숨죽여 낄낄거리고. 평범한 학교를 바라보며 작은 화단 하나에, 짧은 구름다리 하나에도 지나치게 감탄하며 팔자 눈썹이 되는 여행은... 아무래도 난생처음 해본 것이니까. 나는 이 여행을 다른 모든 것들과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모든 것을 위한 여행으로 기억하겠지.


 한 발은 영화 속에, 한 발은 일상에 걸쳐 둔 채 우리에게만 보이는 경계를 유유히 넘나들며 하루에 2만 보는 거뜬히 걸어 다닌 6월의 첫 주. 이젠 영화 없이 여행하는 법을 잊은 것 같다는 언니의 말을 다 이해할 순 없었지만, 여행하기 좋은 장소는 의외로 영화 속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놀라우리만치 쉽게도, 그게 가능했다.


 그러니까 올해 내가 처음 만난 여름이 영화라니. 지난 생엔 관심이 없고, 다음 생은 알 수가 없고, 지금은 늘 아리송할 따름인데 삶이 가끔 생각지도 않은 멋진 순간을 보여줄 때마다 나는 이번 생이 제법 내 편인 것 같다고 믿게 된다.


 나만 사는 걸 좋아하는 게 아니라 삶도 내가 사는 것을 응원하는구나.

 이런 자아도취 궤변을 계속 늘어놓는 계절이 되면 좋겠다.




Q. 이번 영화여행에 대해 궁금한 것은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Q. 최근에 가장 많이 걸은 날은 언제인가요? 그날의 즐거움을 공유해주세요.

Q. 6월을 본격 여름 시작으로 본다면 여러분들의 첫 여름 풍경을 공유해주세요.




더 자세한 이야기는: https://podbbang.page.link/N3KgWN9A42RCnsLw6


일기떨기 01. 혜은

『아무튼, 아이돌』 『일기 쓰고 앉아 있네, 혜은』『매일을 쌓는 마음』『우리들의 플레이리스트』를 썼습니다.

망원동 '작업책방 씀'에서 다음 이야기를 쓰고 있습니다.

일기떨기 인스타: https://www.instagram.com/illki_ddeol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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