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엔 좋아하는 걸 해야 하는 사람이 있고, 그게 나인가 보다.
이 일기는 슈뢰딩거의 고양이 같은 글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내가 오늘 저녁 7시까지 녹음실에 도착하면 내가 읽는 일기가 될 것이고, 그렇지 못한다면 아직 내가 소개받지 못한 하은 씨가 읽어주시는 일기가 될 것이다…. 어떻게 될지는 지금 자판을 치는 이 순간에도 아직, 아무도, 모른다는 점에서 오늘의 일기는 불확실성과 미지의 총체가 된다. 소진 언니는 직장 옆자리 동료인 하은 씨의 얘기를 종종 해주었는데, 하은 씨야말로 달력에 뮤지컬 스케줄을 꽉꽉 채워두는 사람이라며 나와 만나봤으면 좋겠다고 했었다. 그런고로 만약 내가 녹음실에 가지 못하게 된다면… 고대하던 순간을 놓쳐 매우 아쉬울 따름이다. 다음에 공연장에서라도 자만추하거나 다음 인만추를 노리기로 해요….
녹음에 참석하지 못하게 될지도 모르는 이유는 연뮤덕(나)의 본업이 연뮤가 되어서인데, 최근 각본 작업을 한 연극의 상견례에 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때 언젠가 막연히 이런 미래를 생각해 보았는데,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니. 밤에 자려고 누웠더니 새삼 기분이 이상해서 생활기록부 파일을 열어보았다. 인제 보니 <행동특성 및 종합의견> 란에 유독 독후감 쓰기와 공연 기획을 했다는 문장이 넘쳐난다. 1학년 때는 ‘급우 5명과 함께 뮤지컬 형식으로 독서발표대회에 참가하여 수상함’, 2학년 때는 ‘음악 분야의 재능이 뛰어나고 예술적인 창조와 표현에 관심이 많아, 교내 행사에서 각종 공연을 기획하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내놓음.’ 이 ‘각종 행사’라고 지칭된 것들은 지역 회관에서 공연하기, 학교 축제와 행사들에서 합주하기 등이었을 텐데, 세세하게 적혀있지는 않아도 하나하나 사진처럼 떠올랐다. 잠깐, 너무 많이 떠오른다. 공부를… 생각보다 많이 안 했나 본데?
아무튼 3년 동안 틈틈이도 좋아해 온 일이었다는 걸 정갈한 텍스트로 확인하니, 업이 된 지금은 앞으로 더더 좋아해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1학년 때 담임 선생님의 담당 과목이 국어였던지라, “너 매일 이렇게 기출 안 풀고 다른 것, 즉 대본 쓰기만 하면 지금은 괜찮아도 수능에서 미끄러진다”라고 걱정 어린 말씀을 해주셨었는데. 놀랍게도 나는 3년 동안 국어 1등급을 놓친 적이 없고, 지금은 어째 어째 드라마와 희곡 시나리오도 쓰고 있다. 인생은 정말 알 수 없는 것이다….
세상엔 좋아하는 걸 해야 하는 사람이 있고, 그게 나인가 보다. 그럼 어쩔 수 없지. 해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졸린 눈을 감는다. 다른 때보다는 다소 초등학생 같은 일기지만, 사람이 너무 사유하고 살면 행복과 멀어지기 마련이니까. 이번 주도 왈가닥 하게 보내며 파이팅! 하은 씨도 파이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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