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오카에서 나는 더는 귀여운 할머니가 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일본에 머물 때면 노년기에 접어든 이들을 유심히 살피게 된다. 내가 있는 곳이 지명이 낯선 시골이나 도심의 외곽이 아닌 내 일상과 다를 바 없는 도시일수록 노인들의 모습을 더 꼼꼼하게 본다. 우리나라보다 훨씬 더 빨리 초고령사회에 접어든 일본에서는 나이가 지긋한 이들을 만나는 일이 어렵지 않고 그들은 언제 어디에나 있다. 인적이 드문 사이토자키에서 마주치는 이들도 젊은 사람들보단 하나같이 이곳에 오래전부터 터를 잡고 사는 듯한 노인이었다. 인도에서 차도로 바뀌는 모퉁이마다 신호등을 건너는 어린아이 캐릭터가 표지판처럼 곳곳에 세워져 있고 멀리서 아이들의 울음소리와 웃음소리가 섞여 들리기도 했지만 막상 거리에 나가 보면 개와 산책하는 할머니나 바퀴가 크고 얇은 자전거를 타고 천천히 지나가는 할아버지들만이 눈에 띄었다.
이번 후쿠오카 여행에서는 아침마다 혼자 산책을 했고 그럴 때마다 마주친 것도 전부 노인이었다. 자신의 집 대문 앞에서 팔을 쭉 뻗고 스트레칭을 하거나 이른 아침부터 정원 손질을 하는 이들을 지나치다 보면 깨끗하게 정돈된 이 나라의 도로와 나무들이 저절로 이루어진 게 아니라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하루는 아침 산책을 가기 전에 세븐에서 커피와 슈크림빵을 사 들고 나오다가 자전거를 탄 할아버지와 부딪힐 뻔한 적이 있다. 한 손에는 뜨거운 커피를 반대쪽 손에는 빵을 들고 있는 내가 깜짝 놀라 뒤로 주춤한 것과 달리 그는 아주 여유로운 얼굴로 자전거를 멈춰 세우더니 ‘스미마셍’이라고 짧게 사과한 뒤 내가 먼저 지나갈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아! 아리가또 고자이마스’라고 뒤늦은 인사를 건네기까지 정말 짧았던 찰나의 순간이었다. 지금에 와서는 그 편의점의 위치를 제외하고는 그의 표정이나 자전거의 색깔 주변에 있었던 사람들 그 누구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나는 여행 중간중간 낯선 이에게 산뜻한 사과를 건넨 후 자신의 길을 가던 그에 대해 떠올리곤 했다.
그날 오후에는 아일랜드시티 그린그린에서 박제된 나비 표본을 설명하는 도슨트 할아버지를 만났다. 공원 안쪽 전시실에는 양쪽에 각각 두 명의 할아버지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화려한 날개를 활짝 편 채로 금방이라도 날아갈 것만 같은 나비가 끝도 없이 이어지는 장내를 보며 으스스한 기분을 억누르고 다가서자 할아버지 한 명이 내게 다가와 희미한 푸른빛이 반사되는 손전등으로 나비 이곳저곳을 비추며 날개의 모양을 찬찬히 볼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가 나비에 관해 무어라 설명을 하는 동안 일본어를 하지 못하는 내가 대답 대신 고개만 주억대는데도 그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그 모습이 고집스럽게 느껴지기보단 자기 일에 충실할 뿐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이제껏 자기 삶의 주인이었고 그 사실이 단 한 번도 변함이 없었던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어떤 기개와도 같았다. 실제로 내가 만난 노인들은 모두 일을 하는 적극적인 이들이었고 일상에서 소외되지 않는 모습이었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아쉬운 점은 후쿠오카에 많다는 할머니 바리스타, 할아버지 바리스타가 하는 카페에 가지 못한 것이다. 하루 이틀 미루다 보니 가려던 곳은 모두 휴무였다. 유일하게 할머니 바리스타가 있는 드립커피 전문점 ‘코히비미’를 다녀온 친구는 그곳 바리스타의 위엄에 대해 드물고도 값진 경험에 대해 몇 번이고 얘기했다. 입구에는 주문을 받고 안내를 하고 또 치우는 이들까지 서너 명의 서버가 있는데 그중에서 커피를 내리는 사람은 단 한 명, 할머니 바리스타였다고. 융드립 커피를 아주 천천히 내려주었고 그 커피가 정말이지 너무 맛있어서 잊을 수가 없다고 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후쿠오카에는 커피를 마시러 오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 커피를 놓친 대신에 친구들이 쇼핑몰에 있을 때 나는 그 지역에서 꽤 유명한 소바집에 가 난데없이 새우텐동을 먹었다. 나를 안내한 주인도, 내게 따뜻한 튀김덮밥을 가져다준 이도 그리고 주방에서 요리하는 이들까지 모두 얼핏 봐도 60대쯤으로 보이는 이들이었다. 친구를 따라 미나 페르호넨 매장에 갔을 때도 눈에 들어온 건 단정한 옷차림의 중년 부부였다. 미나 페르호넨 특유의 도트무늬 재킷을 입고 조각보와 천으로 된 가방을 한참이나 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녀에게는 자신의 하루하루가 매일 다르다는 감각이 있었다.
후쿠오카에서 나는 더는 귀여운 할머니가 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누군가에게 보살핌을 받기를 기대하거나 미움을 받지 않기 위해 애를 쓰고 싶진 않다는 생각. 그렇다고 고집스럽게 살고 싶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대상 앞에서는 입장표명이 분명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리고 나와 스치는 타인에게 친절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유일하게 두 번 방문한 굿업커피에서 나의 부모의 노후와 나의 미래에 대해 걱정하다가도 내게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고 물어봐주고, 내가 동전을 잘 챙길 수 있도록 크기가 큰 동전부터 차례대로 한눈에 볼 수 있게 놓아주던 바리스타의 친절 덕분에 새로운 결심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행이 끝날 즈음에는 결국에는 선한 마음과 타인에게 대가를 바라지 않는 친절만이 내 삶과 나를 구원하겠구나,라는 결론에까지 이르렀다. 서울에서 지친 마음으로 떠난 여행이었고 그곳의 모습은 서울과 다르지 않았음에도 무척이나 산뜻하기만 했다. 여행자의 넉넉한 마음 탓일 수도 있고, 평소보다 많이 걸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있는 곳에서 친절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쉬운 일이지. 그렇게 매일이 쌓이다 보면 나도 어딘가에서 다른 이를 위해 커피를 내리고 있지는 않을지. 이번 여행에서 친구들은 나를 보며 산뜻함을 느꼈다고 말해주었는데 그건 나에게 커피를 내려준 이들, 밥을 차려준 이들 때문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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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떨기 03. 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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