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이 불가능한 시대에 필요한 것은 ‘사랑과 시간’이다. 평론가 김영찬은 자신의 네 번째 비평집 서문에 최인훈의 장편소설 『회색인』에 나오는 ‘사랑과 시간’의 의미를 이제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했다. 혁명을 경험하지 못한 나는 사랑이 혁명이 되어도 되는 걸까, 시간이 모든 것을 지체해버리는 건 아닐까,라고 생각하며 그 말을 곱씹었다.
오후에는 김영찬 선생님을 만나 우리가 함께 건너야 했던 시간과 애도가 불가능한 시대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슬픔을 나누는 일의 어려움에 대해 털어놓다 보니 아직 내게는 사랑보단 시간이 필요하단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과 새 책에 관한 소회를 나눈 나는 올해 첫 야근을 하기로 했다. 되도록 야근을 하지 않으려 하지만 오늘만큼은 아직 내게 오지 않은 사랑과 혁명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하고 싶었다. 하은 씨와 요가원 옆에 있는 샐러드 가게에서 포장을 하러 가는 길에는 누군가가 2천 원을 내고 버린 어린이용 트램펄린 위에 올라가 방방 뛰기도 했다.
자리로 돌아와 업무를 시작하려는데 퇴근한 선배가 다시 돌아와서는 주차장에 있는 고양이가 좀 이상한 것 같다고 했다. 주차장에 차를 대려는데 자주 보던 고양이가 꿈쩍도 않는다고. 주차장 방지턱에 몸을 기댄 채 길게 누워 있는 고양이는 지성이었다. 아무런 미동도 없는 몸에 손바닥을 가져다 대니 부드럽고 따뜻한 기운이 느껴졌다. 조금 더 가까이서 보니 눈동자가 뒤집힌 채로 왼쪽 송곳니가 쭉 삐져나와 있었다. 본능적으로 고양이의 눈에 손가락을 댔다. 검지로 눈두덩을 지그시 눌렀지만 어떻게 해도 지성이의 눈은 감기지 않았다. 지성이가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자기가 적을 두고 지내던 곳, 친구들이 있는 곳, 사료와 물을 챙겨주는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와 겨우 몸을 뉘었을 고양이를 생각하자 눈물이 났다.
여전히 여름날의 후덥지근한 공기가 남아 있었고 고양이는 죽었다. 고양이를 키우는 살롱 매니저님과 직원분이 와서 고양이의 몸이 점점 굳을 거라고 했다. 선배들이 종이 상자를 찾으러 간 사이, 담요로 지성이를 두른 다음 꼭 안았다. 여전히 따뜻하고 말랑말랑했다. 더는 숨을 쉬지 않는 짐승이 이렇게 따뜻할 수 있다니. 이렇게 따뜻한데 죽을 수 있다니. 평소 길고양이들을 돌보던 선배가 집에서 회사로 오는 동안 지성이는 작은 종이 상자 안에 담겼다. 그사이 다른 고양이들이 그 주변을 맴돌았다. 회사 입구, 환풍기 위, 도로변을 떠나지 못하는 고양이들을 보니 고양이 장례식에 조문을 온 기분이 들었다.
지성이의 소식에 각각의 시간을 보내며 사랑을 쌓아간 이들이 하나둘 모였다. 차마 바로 지성이의 얼굴을 보지 못하는 이들이 앞장을 서고 나는 상자를 통째로 들고서 근처 동물 병원으로 갔다. 출발 전에 인문팀 선배와 통화를 했던 간호사는 지금 당장 취할 수 있는 방법들에 대해 알려주었다. 구청에 연결을 하면 종량제봉투에 담기게 될 것이고 동물 병원에 맡기면 다른 동물들과 한꺼번에 소각을 한다고 했다. 서울에는 반려동물을 화장할 수 있는 장소가 없어 개별 장례를 치르기 위해서는 다른 지역으로 이동해야 한다고도 덧붙였다. 여름에는 사체가 금세 부패할 수 있기 때문에 아이스팩으로 두르고 체온을 차갑게 유지해야 한다는 말에 지성이를 처음 발견했을 때보다 더 눈물이 났다. 사는 건 누구에게도 쉽지 않은 일인데 죽음은 이렇게까지 단순할 일인가. 선배들이 지성이와의 마지막 인사를 나누자 동물 병원 간호사는 고양이의 마지막 길이 외롭지 않을 것 같다고, 최대한 잘 보내주겠다고 했다.
모두가 지성이에 잘 가라고 인사를 하는데 나는 끝까지 아무런 말도 건네지 못했다. 눈앞에서 누군가를 떠나보낸 건 외할머니 이후로 두 번째였다. 손주 중에 유일하게 염습 과정을 지켜본 나는 그때도 할머니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마지막 인사를 하라는 어른들의 말에도 입을 꾹 닫은 채로 수의를 입은 할머니를 보기만 했다. 잘 가라는 말이 도무지 입 밖으로 안 나왔다. 당신이 왜 가야 하는지 나는 납득이 가지 않아서 그 말을 할 수 없었다. 지성이의 사인을 밝히진 못했지만 이번 주 내내 한낮이면 살벌하게 더웠다는 생각만 자꾸 들었다. 날이 이렇게 더워서 아침에 살아 있던 고양이가 죽은 거라면 나는 더더욱 그 어떤 인사도 건넬 수 없었다. 집에서 급하게 연락을 받고 온 선배는 주말이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고양이의 마지막을 지켜줘서 고맙다고 했다. 깊이 사랑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안도에 기대다가도 나는 아무런 사랑도 책임지지 못하는 사람이란 생각에 갑갑하기도 했다.
돌아오는 길에는 선배들과 우리가 키우는 반려동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미카가 쓰레기통을 뒤지고 닭뼈를 다 삼킨 날. 작은 몸속에 쓰레기처럼 뼈가 우수수 쌓여 있었던 그날. 간신히 고비를 넘기고서 밤늦게 강아지 전문 장례 업체를 알아본 적이 있다. 그 애가 나를 떠날 때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아보면서 울었던 기억. 그래서인지 지성이를 품에 안았을 때, 안고 있으면서도 더 안아주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7월 10일 목요일, 문지 빌딩 주차장을 거점으로 서교동에 살던 고양이, 우리가 지성이라고 부르던 고양이가 세상을 떠났다. 오후 6시 50분쯤 발견되어 사람들과 함께 있다가 9시에 동물 병원에 도착해서 묘생을 정리했다. 고양이를 오랫동안 돌본 선배들은 지성이를 추억하기 위해 자리를 옮겼고 나와 하은 씨는 퇴근길에 오늘따라 달아나지 않는 검은 고양이 까미와 마주쳤다. 그리고 평소 이 시간이면 회사에 없을 우리가 우연히 지성이의 마지막을 이렇게나마 지킬 수 있어 다행이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늘의 마음을 어떻게든 정돈하고 그를 기억해주고 싶단 말과 함께.
더 자세한 이야기는: https://podbbang.page.link/N3KgWN9A42RCnsLw6
일기떨기 03. 소진
낮에는 책을 만들고, 밤에는 일기를 씁니다.
그 사이에는 요가를 하고요.
일기떨기 인스타: https://www.instagram.com/illki_ddeolk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