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일기떨기: 소진의 밀린일기

직장인에게 오후 반차란 무엇인가.

by 일기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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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5월 25일, 오후 반차를 내고 쓴 일기.


직장인에게 오후 반차란 무엇인가. 어디론가 이동해서 새로운 경험을 하거나 평소와 달리 보다 의미 있게 보내야만 할 것 같은 연차와 달리 반차는 나 스스로에게 주는 보상의 성격이 강하다. 특히 병원 방문이나 은행 업무 내지는 집에 일이 있어서 부득이하게 내고서 다시 회사로 돌아와야만 하는 오전 반차와 달리 오후 반차는 그 자체로 해방이요, 기쁨이다. 날이 맑고 쾌청하면 당연히 기분이 좋고 비가 오면 운치가 있어 좋다. 나는 오후 반차 예찬론자이고 그걸 별다른 사유 없이 냅다 쓰는 걸 더 좋아한다. 아직 일과가 남은 동료들을 뒤로하고 회사 밖으로 나갈 때는 오늘 치 퇴사를 하는 것만 같은 기분에 휩싸이기도 한다. (다른 이의 고통 앞에서 기쁨을 얻는 인간이란 얼마나 얄궂은가.) 비록 오늘은 집에서 해야 하는 일이 있어서 오후 반차를 내게 되었지만 그 일이란 게 약간의 수고와 그에 상응하는 기쁨이 있는지라 가벼운 걸음으로 나섰다. 집으로 도착하기 20분 전, 닥터주스 배달이 완료되었다는 문자를 받았을 때는 이걸 위해 반차를 냈구나 싶을 정도로 기뻤다. 꽝꽝 얼어 있는 주스를 녹기 전에 냉동실에 넣을 수 있다는 게 왜 그렇게 기뻤을까.


급여일 하루 전날, 경영관리 팀에서 메시지가 왔다.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만,으로 시작하는 그 말은 내가 전혀 생각지도 못한 비보였으니. 그것은 바로 중소기업 취업자 소득세 감면 기간이 만료되어 5월부터는 소득세 감면이 적용되지 않는 급여를 받게 된다는 것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지만 그건 상대가 알아야 하는 정보는 아니기에 알려줘서 고맙다고 짤막하게 답을 한 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걱정에 휩싸였다. (새로운 월급으로, 새로운 마음으로 지낸 지 고작 한 달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아뿔싸. 나는 월급도 들어오기 전에 큰마음을 먹고 주스를 한 달치나 주문했는걸요. 그걸 왜 이제 알려주시나요. (물론 미리 알았다 해도 주문했을 테지만.) 그 이후로도 나는 쉽사리 잠에 들지 못했다. 그냥 인터넷에 내 급여를 대충 넣어서 소득세가 얼마나 부과되는지를 검색만 해도 되었을 텐데, 나는 그 돈이 얼마일까, 정말 어마어마하게 큰 엄청난 액수이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에 휩싸였다. (지금 와 생각해 보면 월급이 어마어마하게 많지 않은데 그런 상상을 했다는 게 놀랍다.) 다음 날 회사에 와서 확인한 급여 명세서를 보고 지난달에 받은 월급과 비교해 보니 지난달보다 66,040원이 덜 입금되었다. 동료에게는 대충 6만 원이 적게 들어온다고 했는데 알고 보니 거의 7만 원이었던 셈인데. 돈 계산도 제대로 못 하면서 잠을 못 자고 걱정했던 게 너무도 우습다. 나의 비보를 들은 동료는 직장인에게 그런 슬픈 소식이 또 어디 있느냐면서 그 돈은...... 그 돈은 국립현대미술관 론 뮤익전을 열두 번도 더 볼 수 있는 금액이 아니냐고 했다. (우리는 다음 주에 오후 반차를 내고 론 뮤익 전을 보러 가기로 했다......) 나는 국현미는 매주 수요일 무료 관람이니까 수요일마다 가서 열두 번 보면 되는 거 아니냐는 바보 같은 소리를 했다.


동료들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내가 2020년 4월부터 2025년 4월까지 약 5년간 출판사 두 곳에서 근무했다는 사실. 중소기업에 취직해 이탈하지 않고 5년을 일하고 그사이 내일 채움공제 2년짜리도 수령했다는 것이 조금 뿌듯했다. 여행을 가려고 오래전에 가입한 청약을 깼던 내가 은행 언니에게 "손님, 청약은 절대 깨는 게 아니에요"(하지만 그 직원도 이제 청약이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닫지 않았을까......)라는 말을 듣고 4년 9개월 동안 한 번도 빠짐없이 10만 원을 66번 입금했다는 것도 뿌듯했다. 당장에 6만 6천40원을 덜 받는 것보다 내가 일을 하고 있다는 것. 그 일에 조금의 흥미도 잃지 않고 해내고 있다는 게 좋았다. 물론 이건 손바닥 뒤집는 것처럼 쉽게 바뀔 수 있는 생각이겠지만.


지난 1년간 친구의 집에서 지내면서 배달시켜 먹은 맛집을 올린다는 게 말이 길어졌다. 5년 동안 나는 무엇이 달라졌을까, 생각하다 그런 게 있기는 할까 싶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나는 매일매일 달라진다. 배달만 해도 그랬다. 서울에서 지내기 전까지 나는 배달은 1년에 5번 이하로 그마저도 잘 시키지 않았다. 우선 배달 음식은 퀄리티가 낮다는 편견이 있었고, 내 눈앞에서 확인할 수 없는 과정을 거쳐 음식을 받는 것도 어쩐지 이상하게 느껴졌다. 코로나 시국을 보내면서 나처럼 배달을 안 시키는 사람도 없겠다, 싶을 정도로 웬만하면 배달을 삼갔다. 하지만 서울에서 잠시 지내면서 모든 것이 배달 가능한 시대에 배달 맛집이란 정말 무궁무진하다는 것. 나의 한 끼 식사를 위해 많은 사람의 손을 거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요즘은 일주일에 한 번, 한 달에 네 번 정도 배달을 애용한다. 지금 있는 곳 신림과 봉천 사이 관악구에는 1인 가구가 많아 맛집이 꽤 밀집해 있는데 그중에서 맛있었던 곳들을 꼽아보았다. 오늘 줌으로 후배분들과 일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나누는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스치듯 어떤 글을 쓸 때 가장 즐겁냐는 이야기가 나왔다. 거기에서 길게 할 얘기는 아니어서 말하지 않았지만 난 우선 보도자료 쓰는 게 제일 싫고...... 배달의 민족에 리뷰 남길 때가 가장 좋다. 보도자료가 제일 싫은 건 내가 작가를 제대로 소개하지 못할 거라는 게 갑갑하고 이 글이 작가에게 도움이 1도 안 되면 어떡하나 싶은 생각에 더 갑갑하기 때문이고 배달은...... 나의 작은 리뷰가 사장님한테 응원과 힘이 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 오랜만에 일의 기쁨과 슬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요. 저는 지난 5월, 중소기업 소득세 감면이 끝나고 실급여가 지난해와 크게 다르지 않은 한 해를 보냈는데요. 직장인에게 고정 수입 그리고 변동 지출은 너무도 잔인한 일인지라 이런 일기를 집에 오자마자 쓴 날이 지금도 선명합니다. 여러분은 일에서 어떤 보상이 주어졌을 때 보람을 느끼시나요?

■ 어떤 집단에 소속되어 첫 월급을 받았을 때가 있나요? 그때의 기분, 그때 그 돈을 어떻게 지출했나요?

■ 우리는 다 각자만의 글을 쓰고 있는데요. 소설, 에세이, 동화, 보도자료, SNS에 이르기까지. 어떤 글을 쓸 때 가장 즐거움을 느끼는지, 그 즐거움이 어디서부터 비롯되는지 이야기를 해볼까요?

■ 돈 얘기로 시작했으니 돈 얘기로 마무리를 해보면 어떨까 싶어요. 최근 혹은 올해 구입한 것들 중에 가장 만족하는 게 있다면 무엇인지 마구마구 추천해 주세요.




더 자세한 이야기는: https://podbbang.page.link/N3KgWN9A42RCnsLw6


일기떨기 03. 소진

낮에는 책을 만들고, 밤에는 일기를 씁니다.

그 사이에는 요가를 하고요.

일기떨기 인스타: https://www.instagram.com/illki_ddeol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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