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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기떨기 Sep 27. 2021

01. 일기떨기

그건 내가 아직 나에게 완전히 질려버리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일기인간 윤혜은의 10년 일기장




나는 나로 사는 것이 너무 지겹다고 하면서도 스스로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멈추지 못하는 사람이다. 달리 말하면 그건 내가 아직 나에게 완전히 질려버리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어차피 이번 생엔 나로밖에 살 수 없지만, 그것을 완전한 체념으로 견디는 것이 아니라 기대하며 바라볼 수 있는 구석이 한 톨 쯤은 남아 있으리란 희망이기도 하다. 십오 년 째, 매일 일기를 쓰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 같다. 한심하고 실망스럽고 가끔은 아예 갖다 버리고 싶기까지 한 ‘나’들의 끄트머리에, 친한 척을 하고 싶은 ‘나’가 등장할지도 모른다는 기대로 오늘을 쓴다. 



김금희 작가의 소설, <너무 한낮의 연애>에는 이런 대화가 등장한다.

“지금 사랑하는 것 같아서 그렇게 말했는데, 내일은 또 어떨지 모르니까요.”  

“사랑한다며?”

“네, 사랑하죠.”

“그런데 내일은 어떨지 몰라?”

“네. 내일은 모르겠어요.”     



나는 이 대화가 일기를 쓰는 내 마음과 꼭 닮아 있다고 생각한다. 소설 속 주인공이 ‘오늘은 사랑하지만 내일 어떨지는 모른다’는 스탠스로 심드렁한 연애를 한다면, 나는 ‘어제도 오늘도 별로였지만 내일이나 모레쯤엔 또 모르지’라는 막연한 낙관으로 일기를 쓴다. 기다리던 내일과 모레가 한참 늦게 와도 어쩔 수 없다는 심정으로. 우선은 별로인 오늘에 최선을 다한다. 일기장 앞에선 최선을 다해 하루를 미워하되, 아침이 밝으면 뒤끝 없이 하루를 시작한다.


그러다 보면 필연적으로, 다른 일기를 쓰게 되는 날이 온다. 마침내 구체화된 희망이 끼어든 하루, 순진하게 호들갑을 떠는 나에게 일기장이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야, 지겹다며? 별로라며?”


머쓱해도 어쩔 수 없다. 일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아무튼, 어제와 전혀 다른 일기가 쓰이는 날에는 다른 사람이 끼어들었다는 뜻이다. 나로부터 살짝 멀어지고 타인의 아름다움이나 슬픔에 대해 쓰는 순간을 누리다보면 조금 다른 내가 되어 있는 기분이다.

  

다행히 최근 내 일기장엔 새로운 이름이 연달아 등장했다. 선란과 소진. 이들은 예전에도 한번 등장한 적 있으나 빠르게 퇴장한 이름이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우리는 <일기떨기>라는 무형의 일기장에 묶여 당분간은 일기 운명 공동체가 되어 버렸으니. 지겨움 대신 희망을 꺼내는 밤이 길어질 것 같다.



일기떨기 01. 혜은

『아무튼, 아이돌』 『일기 쓰고 앉아 있네, 혜은』을 썼습니다.

  망원동 '작업책방 씀'에서 다음 이야기를 쓰고 있습니다.

  일기떨기 인스타: https://www.instagram.com/illki_ddeol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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