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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기떨기 Sep 27. 2021

02. 일기떨기

아무래도 좆됐다.





아무래도 좆됐다.



이 문장은 앤디 위어 <마션>의 첫 문장이자 요즘 내 입버릇이다. 정말이지, 아무래도 좆된 것 같다. 앤디 위어도 이런 마음 아니었을까. 계약서에 도장은 찍었는데 막상 쓸 이야기가 생각나지 않는다거나 너무 바쁜 거야. 시간이 없어. 잠자고 먹는 시간 빼고 일하느라 바빠 죽겠는데 장편소설 마감은 계속 닥쳐오는 거지. 그래서 일단 책상에 앉아서 노트북을 켜고 이렇게 중얼거렸을 거야.


첫 문장에 압도되지 말자, 시작이 반이다, 일단 생각나는 거 다 쓰자. 그래서 이 문장.


아무래도 좆됐다.     


사람은 왜 바쁠까. 아니, 사람은 예측이 가능하면서도 왜 항상 그 예측을 빗겨나가거나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분명 올해 초의 나는 이런 식으로 일을 받다가 하반기에 죽을 거라는 걸 알았는데. 아마 미래의 내가 잘 해줄 거라는, 항상 그래 왔듯이 모든 걸 다 잘 끝낼 거라는 믿음이 있었겠지. 일이 증식된다는 법칙은 몰랐던 거고.


나는 요즘 하루에 세 번씩 과거의 나를 욕하며 현재의 나를 달달 볶고 미래의 나에게 소원을 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할게, 내일의 내가 더 많이 해줄 거지? 하고. 하지만 삶의 법칙이 그렇듯 내일은 내일이다. 내일. 그러니까 나의 일. 내일은 곧 나의 일이란 뜻이다. 결국 내가 할 일이라는 거지.


완벽주의는 아닌데 일단 빈틈이 있는 건 못 보겠고, 그렇게 성실한 성격은 아닌데 마감은 다 지키고, 끝내고 나면 뿌듯하다. 이러니까 자꾸 잊는다. 그 지옥 같은 마감의 시간을. 차라리 스토리 만드는 게 힘들었다면 일을 안 받았을 텐데 나는 그냥 시간이 부족한 사람이다.


내 뒤에는 자기 순서가 오기를 기다리는 주인공들이 있고, 나는 그 주인공들의 세계를 얼른 만들어주고 싶은 욕심 많은 대장장이다. 하루가 48시간이었으면 좋겠다. 좌뇌와 우뇌가 따로 움직이거나 오른손과 왼손이 각자 다른 키보드를 쳤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들을 한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하루에 8시간 동안 글을 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우다가 조금 더 쓴다.


가끔 사람들이 내가 글만 쓰고 사는 줄 알까 봐 무섭다. 세계를 책임지지 않고 무책임하게 글만 싼다고 생각할까 봐도 무섭다. 뭐, 물론 누군가가 내 소설을 읽고 그렇게 느낀다면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조금 항변을 하자면 나는 주인공을 만나면 종일 그 주인공 생각만 한다. 밥 먹을 때도, 자기 전에도, 버스를 탈 때도 나는 내 주인공이 어떤 애고, 어떤 세계에 살고, 욕망은 무엇이고,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지에만 관심이 있다. 베스트프랜드이거나 자식 같은 느낌인가. 모르겠다.


그냥 그 순간 그 애는 내가 되고, 나는 내 세계를 만드느라 정신없다. 자료를 조사하고, 밑그림을 그리고, 세상에 필요한 것들을 하나하나 만든다. 그 과정의 재미를 뭐라 표현할 수 있을까. 오토바이는 안 타지만 자유로를 달리는 폭주족의 짜릿함이려나. 수학 천재가 막힘 없이 공식을 풀 때의 오르가즘일까. 아무튼 그렇다. 나는 세계를 만드는 게 너무 재미있어서 멈추고 싶지 않다.


요즘 개인 원고랑 프로젝트 1, 프로젝트 2, 프로젝트 3을 동시에 진행 중이다. 프로젝트의 진행 속도와 방향은 다 달라서 전부 재미있다. 역시 문제는 시간이다. 하루가 48시간이었으면 좋겠다. 회의하고, 미팅하고, 공부하고, 원고 하면 하루가 끝나 있다. 반복되는 하루는 아니다. 나는 날마다 세계를 만들고 있으므로 내가 보내는 하루는 어제와 다른 세계다. 그러니까 투정은 아니고, 그냥 하루가 더 길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첫 일기는 좀 더 신중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는데 지금 내 머릿속에는 이 문장밖에 없다. 내년에는 이렇게 살지 말아야지. 정말로, 내년에는 이렇게 안 살 거다. 정말 꼭 기억해. 올해처럼 살지 않기로.     


나의 첫 일기, 정말 내 하루처럼 정신없다.

         


일기떨기 02. 선란

『무너진 다리』 『어떤 물질의 사랑』『천 개의 파랑』『밤에 찾아오는 구원자』를 썼습니다.

  환경파괴, 동물멸종, 바이러스를 중심으로 SF소설을 씁니다.

  일기떨기 인스타: https://www.instagram.com/illki_ddeol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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