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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기떨기 Sep 27. 2021

03.일기떨기

인생은 그리움에서 그리움으로 넘어가는 과정이라는 것


  다시 이 섬에 오기까지 꼬박 오 년이 걸렸다. 수원에서 완도까지 7시간, 다시 배를 타고 입도하기까지는 50분. 대기 시간까지 합치면 집에서 나와 섬에 도착하기까지 10시간이 걸리는 셈이다. 지난 오 년간 아주 조금이라도 마음이 가는 사람을 만나면 어김없이 청산도 얘기를 꺼냈다. 내 마음에 품고 사는 섬이 하나 있어요완도에서 1시간가량 배를 타고 들어가면 나오는 곳인데봄에는 유채꽃이 가을에는 코스모스가 유명해요저는 늘 그 시기를 피해서 가지만.” 섬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리운 이름을 소리 내어 마음껏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사람, 애인, 오빠, 내가 만났던 사람처럼 3인칭으로 에둘러 말하는 게 아니라 서서히 낯설게 느껴지는 이름을 꾹꾹 눌러 부르는 것. 오 년 전, 스물셋의 나는 어떤 마음으로 세상에서 가장 느린 섬으로 도망쳤던 걸까. 그때는 막연히 나를 아는 이도, 그를 아는 이도 없는 곳에 가서 그 이름을 실컷 부르고 오려했다. 날이 좋으면 바다 건너 제주가 보이는 범바위 위에서, 200년 된 소나무가 있는 지리해수욕장에서, 영화 <서편제>에서 유봉과 송화 그리고 동호 이렇게 세 사람이 진도 아리랑을 부르던 돌담길에서도. 나는 지독하게 한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그날 이후, 누군가 그리운 날이면 섬 하나를 떠올리게 되었고, 더는 내 마음을 아무렇게나 팽개치지 않았다.



오 년 전 나는, 가을과 겨울 각각 2박 3일 동안 청산도에 머물렀다. 처음에는 친구와의 가을 여행이었고, 그다음은 잡지 취재차 섬에 입도했다. 주간지 대학내일 인턴 마지막 기획 아이템이 바로 여기, 청산도였다. 그때 취재했던 곳 중 하나가 신흥해수욕장이 바로 보이는 작고 예쁜 카페 마르였다. 가구를 만드는 딸이 엄마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득한 그곳은 서울에서는 절대 마주할 수 없는 풍경과 고요가 있었다. 이번 추석 연휴에 나와 친구들은 카페 사장님이 운영하는 ‘섬이랑 나랑’ 게스트하우스의 청향이라는 독채에서 3일 4일을 보냈다. 첫날 아침, 나는 카푸치노를 주문하고 사장님께 오 년 전에 취재 왔던 대학 내일 기자인데 기억하시냐고 물었다. 사장님은 가게 벽 한쪽에 붙여놓은 그때 그 기사를 보여주시면서. 카페에서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붙여놓고 틈이 날 때마다 읽는다고 하셨다. 그때 그 이쁜이가 이렇게 예뻐졌냐고, 그때는 긴 머리였던 것 같은데 머리는 언제 또 잘랐냐고 하시면서. 그러면서 그때 그 작은 손주 녀석, 리코더로 에델바이스를 구슬프게 연주하던 그 아이가 추석을 맞아 와 있다며 소개해주셨다. 고작 오 년이 지났을 뿐인데, 키가 내 허리춤에 오던 아이는 중학교 2학년이 되었고 소년의 키는 1m 80이 넘는다고 했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렸는지 모르겠어요여기 오려면 바다를 건너긴 해야 하지만 이국의 땅도 아니고생활을 뒤로할 만큼 돈이 많이 드는 것도 아닌데 말이에요.”

마음이 문제지마음이 가장 어려운 일이니까.”


이곳을 찾는 데 너무 오래 걸려 속상했단 내 말에 사장님은 다 안다는 얼굴로 다음에도 또 놀러 오라고, 그때는 밑반찬을 더 챙겨주겠다고 하셨다. 그날 밤, 영영 그리워할 거라 여겼던 사람이 아닌, 다른 이의 얼굴과 이름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얄궂은 마음이 더는 가련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섬은, 누군가를 그리워하기에 알맞은 곳이구나. 그러다 다른 사람을 그리워하면서 다시 살아가는 곳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어쩌면 인생은 그리움에서 그리움으로 넘어가는 과정이라는 것까지도.



일기떨기 03. 소진

낮에는 책을 만들고, 밤에는 글을 씁니다.

그 사이에는 주짓수를 하고요.

  일기떨기 인스타: https://www.instagram.com/illki_ddeol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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