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그리움에서 그리움으로 넘어가는 과정이라는 것
다시 이 섬에 오기까지 꼬박 오 년이 걸렸다. 수원에서 완도까지 7시간, 다시 배를 타고 입도하기까지는 50분. 대기 시간까지 합치면 집에서 나와 섬에 도착하기까지 10시간이 걸리는 셈이다. 지난 오 년간 아주 조금이라도 마음이 가는 사람을 만나면 어김없이 청산도 얘기를 꺼냈다. “내 마음에 품고 사는 섬이 하나 있어요. 완도에서 1시간가량 배를 타고 들어가면 나오는 곳인데, 봄에는 유채꽃이 가을에는 코스모스가 유명해요. 저는 늘 그 시기를 피해서 가지만.” 섬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리운 이름을 소리 내어 마음껏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사람, 애인, 오빠, 내가 만났던 사람처럼 3인칭으로 에둘러 말하는 게 아니라 서서히 낯설게 느껴지는 이름을 꾹꾹 눌러 부르는 것. 오 년 전, 스물셋의 나는 어떤 마음으로 세상에서 가장 느린 섬으로 도망쳤던 걸까. 그때는 막연히 나를 아는 이도, 그를 아는 이도 없는 곳에 가서 그 이름을 실컷 부르고 오려했다. 날이 좋으면 바다 건너 제주가 보이는 범바위 위에서, 200년 된 소나무가 있는 지리해수욕장에서, 영화 <서편제>에서 유봉과 송화 그리고 동호 이렇게 세 사람이 진도 아리랑을 부르던 돌담길에서도. 나는 지독하게 한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그날 이후, 누군가 그리운 날이면 섬 하나를 떠올리게 되었고, 더는 내 마음을 아무렇게나 팽개치지 않았다.
오 년 전 나는, 가을과 겨울 각각 2박 3일 동안 청산도에 머물렀다. 처음에는 친구와의 가을 여행이었고, 그다음은 잡지 취재차 섬에 입도했다. 주간지 대학내일 인턴 마지막 기획 아이템이 바로 여기, 청산도였다. 그때 취재했던 곳 중 하나가 신흥해수욕장이 바로 보이는 작고 예쁜 카페 마르였다. 가구를 만드는 딸이 엄마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득한 그곳은 서울에서는 절대 마주할 수 없는 풍경과 고요가 있었다. 이번 추석 연휴에 나와 친구들은 카페 사장님이 운영하는 ‘섬이랑 나랑’ 게스트하우스의 청향이라는 독채에서 3일 4일을 보냈다. 첫날 아침, 나는 카푸치노를 주문하고 사장님께 오 년 전에 취재 왔던 대학 내일 기자인데 기억하시냐고 물었다. 사장님은 가게 벽 한쪽에 붙여놓은 그때 그 기사를 보여주시면서. 카페에서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붙여놓고 틈이 날 때마다 읽는다고 하셨다. 그때 그 이쁜이가 이렇게 예뻐졌냐고, 그때는 긴 머리였던 것 같은데 머리는 언제 또 잘랐냐고 하시면서. 그러면서 그때 그 작은 손주 녀석, 리코더로 에델바이스를 구슬프게 연주하던 그 아이가 추석을 맞아 와 있다며 소개해주셨다. 고작 오 년이 지났을 뿐인데, 키가 내 허리춤에 오던 아이는 중학교 2학년이 되었고 소년의 키는 1m 80이 넘는다고 했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렸는지 모르겠어요. 여기 오려면 바다를 건너긴 해야 하지만 이국의 땅도 아니고, 생활을 뒤로할 만큼 돈이 많이 드는 것도 아닌데 말이에요.”
“다, 마음이 문제지. 마음이 가장 어려운 일이니까.”
이곳을 찾는 데 너무 오래 걸려 속상했단 내 말에 사장님은 다 안다는 얼굴로 다음에도 또 놀러 오라고, 그때는 밑반찬을 더 챙겨주겠다고 하셨다. 그날 밤, 영영 그리워할 거라 여겼던 사람이 아닌, 다른 이의 얼굴과 이름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얄궂은 마음이 더는 가련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섬은, 누군가를 그리워하기에 알맞은 곳이구나. 그러다 다른 사람을 그리워하면서 다시 살아가는 곳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어쩌면 인생은 그리움에서 그리움으로 넘어가는 과정이라는 것까지도.
일기떨기 03. 소진
낮에는 책을 만들고, 밤에는 글을 씁니다.
그 사이에는 주짓수를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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