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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기떨기 Oct 25. 2021

04. 일기떨기

언덕에서 빠르게 굴러가는 빈 깡통처럼 살고 있다.




케이팝을 들어도 신이 나지 않을 때, 나는 인생이 뭔가 잘못 굴러가고 있다고 깨닫는다. 며칠 전에는 200번 버스에서 BTS의 다이나마이트를 반복재생 해놓고 얼굴에 아무 표정도 짓지 않은 채로 집에 왔다. 보통 바깥에서 음악을 들을 땐 누구나 그렇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조금 다르다고 말하고 싶다. 보통의 나였다면 마스크 뒤에서 연신 입을 벙긋거리며 가사를 따라 부르거나 눈앞의 풍경에 초점을 맞추고 내적 댄스를 추며 음악을 들었을 테니까.


  그런데 그날은, 동공이 풀린 채 무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하는 나를 확인하지 않아도 느낄 수가 있었다. 생각이 멈추고, 마음도 멈추고. 오직 음악만 하염없이 흘러가는 시공간에 갇힌 것만 같은 외딴 기분. 요즘 나는 자주 그런 상태에 빠진다. 의도적으로 현실과 거리를 두는 자의적 멍 때리기가 아닌, 갑자기 퓨즈가 나간 느낌이랄까. 이런 순간이 찾아올 때 비로소 나는 내가 힘들구나... 깨닫는다. 자신의 노력이나 힘듦을 대체로 부정하고 축소시키는 경향이 있는 나도 이때만큼은 백기를 든다. 인정, 그래 나 너무 힘들어... 이리저리 플레이리스트를 바꿔가며 기분을 띄울 기력도 없이 그냥 버스에 몸을 맡긴다.


  언덕에서 빠르게 굴러가는 빈 깡통처럼 살고 있다. 쓰고 나니 조금 과한가 싶기도 한데 이렇게라도 뱉고 나니 좀 후련한 기분이 든다. 가족은 물론이고 가까운 이들에게도 힘든 이야기를 잘 못하는 성격이라 부정적인 감정은 대체로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글로 해소하며 지냈다. 그런 방법에는 정확히 한 가지의 장점과 한 가지의 단점이 있다. 장점은, 실제보다 감정적으로 쓰인 글을 읽고 나면 곧장 이런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에이, 뭘 이렇게까지... 나 사실 이정도로 힘들지는 않은 것 같은데. 좀 버틸 만 한 것도 같은데’ 하며 내가 빨리 툭툭 털고 일어날 수 있게 독려한다는 것. 그리고 단점은 이런 순간들만 쌓이고 쌓이는 탓에 내가 얼마나 힘든지를 제때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의 노동 감별사가 케이팝이라는 것이 이 일기의 유일한 웃픈 구석이다. 마감시간이 한참이나 지난 책방에 앉아 일기를 썼다. 곧 막차의 막차가 끊기기 전에 집에 가야 하는데 이럴 수가... 아직 서점일기를 쓰지 못했다. 서점일기에는 징징거리고 싶지 않으니 아마 전혀 다른 내가 쓰이겠지. 오늘은 집에 가는 길엔 마스크 뒤로 미소 지으며 케이팝을 듣고 싶다. 


일기떨기 01. 혜은

『아무튼, 아이돌』 『일기 쓰고 앉아 있네, 혜은』을 썼습니다.

  망원동 '작업책방 씀'에서 다음 이야기를 쓰고 있습니다.

  일기떨기 인스타: https://www.instagram.com/illki_ddeol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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