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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기떨기 Oct 24. 2022

28. 일기떨기

아…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일기를 써야 하는데, 할 말이 없다… 할 말이 없다기보다는 할 수 있는 말이 없다는 게 맞겠다. 물리적인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그리고 내 마음 안에서 충분히 지나갔다고 생각되는 일들이 여전히 그 한가운데를 통과하고 있다는 기분이다. 아니 기분이 아니라, 변함 없이 내 곁을 맴돌거나 고여 있는 그 실체를 확인하곤 한다.     

엄마를 간병하는 일이 점차 엄마의 롤러코스터 같고 고집스런 감정을 고스란히 받아내는 일로 옮겨가는 와중에, 사귀던 애인이 한국에 왔다. 사귀던 애인이라니, 주술호응이 어색한 말을 썼네. 꼭 지금 내 마음 같다. 분명히 헤어졌는데… 3년이나 되어가는데, 톡톡 책방 통유리창을 두드리는 그 애를 보니 그냥 한때 사귀던 사람과 오랜만에 만난 것만 같았다.     

그리고 며칠 전엔 그 애와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걸으면서 긴 이야기를 나눴다. 안 그래도 어설픈 영어를 오랜만에 하느라 자꾸 버벅거려서 답답했다. 그럴 때마다 걔가 내가 할 말을 재빠르게 캐치하고는 대신 돌려줘서 나는 예스 예스, 땡큐 땡큐, 바보 같은 말을 되풀이 했다.     

오랫동안 우리가 헤어진 이유에 대해 납득하지 못했던 그 애는 마침내 인정한 듯했고, 미안하다고 했다. 미안함에 대해서는 나도 할 말이 없지 않아서 눈물이 좀 났다. 연애 기간이 긴 우리 사이에는 서로의 안위만큼이나 안부가 궁금한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가족들의 안부까지 꼼꼼히 묻고 났을 땐 마치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웃었다. 어딘가 쓸쓸한 웃음이었지만, 이 자리로 인해 각자의 어떤 공허가 채워졌으리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날 새벽엔 고통으로 잠들지 못하는 엄마의 전화를 받았고, 눈을 뜬 아침엔 그 애가 한국의 배달어플을 이용하는 데 애를 먹는다는 이야기에 답장을 하면서 간밤에 헤어지기 전 그 애의 휴대폰에 게스트하우스 주고 같은 것을 세팅을 해주지 못한 것을 조금 아쉬워했다. 만나는 동안 주로 한국의 혹독한 겨울을 겪은 탓에 그 애는 가을에도 두꺼운 재킷을 챙겨 왔는데, 타이밍 좋게 온화해진 날씨에 이번에는 아무래도 가벼운 재킷을 사야겠다고 했다. 그 애가 한국에 머물 땐 거의 모든 것이 내 도움이 필요했으므로, 나는 조금 고민하다 혹시 쇼핑할 때 내 도움이 필요하면 말하라고 했다. 걔는 그 말엔 답장하지 않았다. 책방 일로 바쁜 주말이었으므로, 나는 연락이 끊긴 것을 잊었다.     

하지만 집에 돌아갈 때까지 여전히 그대로인 메시지 창을 보는 기분은 유쾌하지 않았다. 따끔거리지 않았다는 것을 그나마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그 애가 한국에 온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았는데 아무런 기대 않던 마음에도 서운함이 들 수 있다는 걸 느낀다는 게 놀랍다.     

그 애가 한국을 떠나기 전, 우리는 두어 번을 더 만나기로 했다. 10월… 너무 바쁜 일정을 떠안고 있는 탓에 자꾸만 우선순위에서 밀린-그러나 실은 지금 나에게 가장 중요한-소설 작업에만 집중하기 위해 간신히 사수한 날을, 언제 또 볼 수 있냐는 그 애의 질문에 결국 아껴둔 요일을 꺼내 놓고 말았다.     

아…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가뜩이나 일과 일의 연속으로만 보내는 날들 속에서 이런 식으로 나를 책임지는 게 맞는 걸까, 의심스러운 요즘인데 일이 아닌 감정에 지는 날까지 더해지니 마음이 어렵다. 일과 잘 지내기 위해서라면 세간의 방법을 따라해보기라도 할 수 있는데, 내 마음을 잘 다루는 방법은 늘 마땅한 가이드랄 게 없어서 참 힘이 든다.     

막막한 채로 나아가는 나를 어쩔 줄 모르고 바라보는 내가 느껴진다.     

그렇지만 물을 마시고 다시 할 일을 한다. 감정에 우선적으로 시간을 내어주느라 결국 계획보다 늦은 시간에 글을 쓰게 되더라도, 수면이 줄어들고 피로가 쌓이고, 후회하고 짜증이 나고 그럼에도 걱정할 거리는 계속 쌓이고, 할 일도 변함없이 나를 기다리고, 왜 이렇게 사방이 온통 나를 기다리는 것들 투성인지 몰라 머리가 터질 것 같겠지만. 그래도 나는 표면적으로는 누수 없는 일상을 보내겠지. 당분간은 어쩔 수 없을 것이다.



대화 주제     

■ 오랜만에 긴 일기를 쓰고 또 읽었습니다. 너무 긴 거 아닐까, 천천히 읽어 보니 5분이 조금 안 되더라고요. 청취자들께 너른 양해를 구하는 마음으로 일기를 가져와봤어요. 방송 전에 일기를 읽어본 것은 처음인데 기분이 좀 이상했어요. 타인의 일기를 읽는 내가 낭독하는 것을 좋아하는구나, 싶은 이상한 생각도 들었고요. 요즘 저는 살짝 제정신이 아닌 기분으로 살고 있으니까 질문이 뜬금 없어도 괜찮겠죠. 선란은 평소 많은 행사에 참여하고 있으니까 낭독할 기회도 잦을 것 같은데요. 낭독 타임을 즐기시는지(ㅎㅎ) 궁금합니다.    

■ 우리 두 사람의 만병통치약 같은 산책. 그 산책에 잠깐의 시간조차 할애하지 못할 만큼 바쁠 때, 그럼에도 답답한 마음을 해소해야 할 때 임시방편으로 쓰는 해소 방법이 있나요?     

■ 저는 뜻밖의 재회로 홀로 환승 없는 환승연애를 찍고 있는 기분인데요. 헤어진 후에야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는 것 같아요. 그것은 꼭 알아야만 했던 것 같기도, 몰랐어도 괜찮았을 것 같은 사실처럼 느껴집니다. 어쨌든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시간이 지나서 알게 되는 것들이 있죠. 그런 경험에 대해 들려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 선란의 인생에서 기억에 남는 타이밍들이 있다면 말해주세요. ‘타이밍이 좋았다’, ‘안 좋았다’ 두 가지 경우 모두에 대해 말해주셔도 좋아요.



더 자세한 이야기는: https://podbbang.page.link/N3KgWN9A42RCnsLw6


일기떨기 01. 혜은

『아무튼, 아이돌』 『일기 쓰고 앉아 있네, 혜은』을 썼습니다.

  망원동 '작업책방 씀'에서 다음 이야기를 쓰고 있습니다.

  일기떨기 인스타: https://www.instagram.com/illki_ddeol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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