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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기떨기 Oct 18. 2022

27. 일기떨기

“화는 항상 나 있는걸요.”


하동에 가서도 자꾸만 지난밤이 생각났다. 그날 밤, 여동생은 집에 오는 길에 컵라면을 사다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엄마랑 둘이서 떡볶이를 시작으로 마트에서 파는 치킨, 과일향이 들어간 탄산음료까지 먹고 나니까 속이 더부룩하다고 했다. 집 앞 버스 정류장 맞은편에 있는 편의점으로 가 매운 컵라면을 두 개 샀다. 자정을 십오 분쯤 앞두고 있을 때였고, 먹기만 하고 치운 사람은 없는 건지 식탁은 이것저것 먹다 만 음식들이 식은 채로 남아있었다. 저녁을 안 먹은 건 아니었지만 여동생과 마주 보고 라면에 뜨거운 물을 부었다. 내친김에 냉장고 안쪽 깊숙이 넣어둔 캔맥주도 꺼내어 마셨다. 평생 춤만 보고 살아왔다는 남자들이 나오는 프로그램을 보면서 둘이서 맥주 한 캔을 금세 비웠다. 그렇게 먹어대면서 도대체 언제 자려고 그러느냐는 엄마의 말에도 둘이서 낄낄대며 웃었다. 양껏 먹고 그만 잘 준비를 하려는데 탁상용 의자에 앉은 예진이가 팔다리가 안 움직인다고 했다. 처음에는 장난치지 말라고 했다가도 식은땀이 흐르지 않고 이마 위에 맺힌 모습을 보자 불안이 엄습했다. 종이리를 살짝만 건드려도 온몸이 아프다며 부르르 떠는 걸 보고 바로 구급차를 불렀다.     


그 후로 구급차가 오기까지 다시 십오 분이 지났을 때였을까. 그 애의 몸을 살짝 들어 후리스를 걸치고 타탄체크로 된 목도리를 여러 번 감아주었다. 검은 장화를 신은 구급 대원 두 명이 나와 여동생이 쓰는 방으로 들어왔다. 그중 한 명이 몸이 아픈 건지 아니면 아예 전혀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지에 대해 물었다. 아픈 것과 아픔을 느낄 수 없는 것, 그 차이에 대해 생각하는 와중에 동생은 구급용 들것에 실린 채로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었다. 그때 구급대원 한 명이 최근에 혹시 크게 힘들었던 일이나 화가 나는 일이 있었는지에 묻자, 그 애가 이렇게 말했다. “화는 항상 나 있는걸요.” 처음에는 그 말에 기가 차기도 하고 웃기기도 해서 뭐 이런 애가 다 있나 싶었다. 엄마와 나는 집 근처 대학병원 응급실로 가줄 것을 부탁했다. 그 애가 한 달에 한 번 가는 병원이라 관련 차트 기록이 남아있을 거라 생각했다. 구급차 안에서도 여동생은 아프기보단 화가 난 사람처럼 보였다. 발가락을 쥐었다 폈다 몸의 감각을 느낄 때도 엄마와 나를 번갈아 보며 쳐다볼 때도 마찬가지였다. 꼭 20년 전 여름과도 비슷했다.     


우리 자매가 다리가 짧고 손바닥이 통통했을 시절. 우리는 식탁이 아닌 캐릭터가 그려진 유아용 책상에 앉아 밥을 먹고 있었다. 볕이 뜨거운 한여름이었고 엄마는 다른 반찬을 챙기러 부엌으로 가고 있었다. 그때 간장 양념으로 불에 볶은 불고기를 여동생의 왼쪽 허벅지에 쏟았다. 순식간에 엄마가 달려왔지만 이미 화상 자국은 깊숙이 살을 파고 들어갔고, 내 등 뒤로 목청이 찢어지도록 우는 그 애를 보며 마음이 쿵쿵댔다. 여동생이 그 후에도 입원을 하고, 계속해서 치료를 받아야 했으므로 나는 둘째 이모 네서 한 달을 보내게 되었다. 그때는 막연히 누가 나한테 뭐라고 한 것도 아닌데 이게 내가 벌을 받는 거란 생각이 들었다. 동생을 아프게 했으니 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 아빠랑 엄마랑 동생이 나를 용서하기 전까지는 이모네에서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자야 하는 것. 그 이후로도 나는 엄마 손을 잡고 동생의 병원을 여러 번 가야 했다.     


너무 어린 살가죽에 넓고 깊은 상처가 생긴 탓에 새살이 금세 차오르지 않았고 동생은 그 자리에 여러 번 인조 살가죽을 덧대어야 했다. 유명하다는 화상 치료 병원들을 돌아야 했고, 그때마다 몸에 붕대를 감은 사람들을 봐야만 했다. 그래서일까, 나는 여동생에게 늘 마음에 빚을 진 기분으로 지낸다. 하동에서의 첫날 밤, 혜은 언니와 선민이와 함께 서로의 장점을 할 때였다. 그때, 선민이는 내게 여동생에게만은 무조건적인 언니가 새삼 대단하게 여겨진다고 했다. 처음 만났을 때는 분명 헌신적인 타입의 언니가 아니었는데, 어느 순간 동생에게만은 한없이 베푸는 사람이 된 것 같다며. 그 말에 동생이니까 그렇지, 라는 심심한 답을 하면서도 화는 항상 나 있다는 동생의 말이 생각났다. 너는 왜 계속 화가 나 있을까. 그건 나한테 화를 내는 것일까, 하면서.



화 주제

Q. 최근 일기떨기 혜은과 소진은 하동 여행에 다녀왔죠. 어땠는지 간단하게 말해 주세요.

Q. 가족에게 미안했던 순간이 있다면 언제였고 그때 마음은 어땠나요.

Q. 가족이 한 말 중에 계속 마음 속에 남는 게 있나요?

Q. 내년에 가족들과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더 자세한 이야기는: https://podbbang.page.link/N3KgWN9A42RCnsLw6


일기떨기 03. 소진

낮에는 책을 만들고, 밤에는 글을 씁니다.

그 사이에는 주짓수를 하고요.

  일기떨기 인스타: https://www.instagram.com/illki_ddeol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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