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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기떨기 Nov 23. 2022

29. 일기떨기

네가 나 대신 다 읽어주겠지


 회사 일이 내 마음 같지 않을 때, 나는 염창으로 간다. 서교동에서 버스를 타고 아무 노래나 몇 곡 듣고 나면 금세 양화대교다. 영등포 아리수 센터에서 멈추기를 한 번, 운이 좋으면 신호가 걸릴 틈도 없이 역 앞에 도착한다. 최근에 골목 상권 되살기리 사업에 선정되었다는 목2동은 비포장도로가 몰라보게끔 정돈되어 있었고 이모 횟집, 노가리 가게, 닭갈비집 등 이곳에 오래전부터 터를 잡고 있었던 가게들의 간판도 동일한 서체로 일렬로 늘어서 있다. 눈에 익은 가게들을 지나 갈림길 중앙에 있는 청과물 가게로 죽 걸어 내려오면 그곳에는 늘 그랬듯이 자주 가는 국수 가게가 투박한 간판을 번쩍이고 있다. 본래는 열무냉칼국수로 특허까지 받았다는 동네 맛집이지만 언제부턴가 나는 이곳에 오면 꼭 부추국수를 먹는다. 참기름과 들기름도 구분하지 못하고, 라멘과 우동을 두고 고루한 취향 따위 따지지도 않지만 이곳의 부추국수는 한 입 넣는 순간 그간의 국수와는 차원이 다름을 증명한다.

 나를 이곳으로 안내한 친구는 여기서 뭘 먹어보지도 않았으면서 대뜸 부추국수를 주문하는 나에게 “언니 그거 맛있어요?” 하고 물었다. 맛이야 나도 나와봐야 아는 것이고, 모름지기 봄 부추는 인삼과도 바꾸지 않는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이제는 계절 구분도 하지 않고 무조건 부추국수를 외치게 되었지만 말이다. 시원한 국물에 구불구불한 칼국수 면발이 보기 좋게 가득 채워져 있고, 그 위에 듬뿍 올라간 부추를 보자마자 이거다 싶었다. 들기름을 몇 바퀴나 두른 것인지 부추는 말 그대로 윤기가 좔좔 흘렀고, 그 사이사이로 붉고 푸르스름한 청양고추가 톡톡 박혀 있었다. 한 입 크게 넣자마자 입안 가득 퍼지는 고소함은 말할 것도 없다. 가끔은 이 집에 손님이 나밖에 없으면 이거 이래도 되는 건가, 목2동 사람들은 먹을 게 많아서 여길 안 오나 혼자 의문에 빠지기도 한다.

 여느 날과 다르지 않았던 월요일. 그날도 나와 선민이는 국숫집으로 가 자리에 앉기도 전에 부추국수를 두 그릇 주문했다. 잠깐, 면 추가를 고민하기도 했으나 주인이 생각한 정량에는 또 그 나름의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어 그만두었다. 주인아저씨는 자기네 가게에 와서 부추국수를 먹은 사람은 꼭 부추국수만 먹는다며 흘리듯이 말했다. 국수가 나오자마자 둘 다 대화를 삼간 채 머리를 박고 면발을 넘기기 시작했다. 서로 말도 않고 국수만 먹던 도중 선민이의 국수에서 가늘고 짧은 머리카락이 나왔다. 선민이가 그걸 옆 테이블이나 주인장이 보기 전에 스을쩍 빼려고 하는데 주인아저씨가 다시 나타나 그게 뭐냐며 테이블로 고개를 슥 내밀었다. 순간, 아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지. 막연히 앞뒤 따지지 않고 괜찮다고 말해야 하는 걸까. 그것도 아니면 가만히 주인의 반응을 기다려야 할까. 어느새 당황한 내가 내 그릇은 쳐다보지도 않고 넌지시 선민이와 아저씨를 보고 있는데, 선민이가 덤덤하게. 늘 그랬듯이 그 애의 무심한 말투로 “그거 제 것일 수도 있어요.”라고 했다.

 곧이어 아무렇지 않게 머리카락 한 올을 휴지 사이로 넣고 다시 국수를 먹는 선민이를 가만히 보았다. 천천히, 국수를 한 번 먹고, 또 선민이를 보았다. 내가 울적하다고 할 때마다 아무 말 없이 회사 근처니까 볼 일 보고 나오라던 그 애를 보았다. 우리가 다시 면발을 휘젓고 있을 때, 주인아저씨가 잘 깎은 감을 가져와서는 마음이 참 고운 아가씨라고 했다. 그러자 선민이는 올해의 첫 번째 감이라며 좋아했다. 우리는 국수 값을 내고 동네를 반바퀴 돌아 캔맥주 작은 거 두 개를 사서 선민이네로 돌아왔다. 맞아, 선민이네는 놀러 가는 곳이 아니라 돌아가는 곳이었지. 올해도 작년과 다를 거 없이 몸이 힘들고 마음이 지칠 때마다 선민이네 있었다. 우리가 염창 집에 갈 때면 저녁이면 비가 온다는 예보에도 하늘에서는 아무것도 내리지 않았고, 술안주는 프랜차이즈 햄버거집의 치즈스틱이나 편의점에서 파는 옥수수 쫀드기면 족했다. 그럼 나는 아직 펼쳐보지도 않은 책을 잔뜩 짊어지고 가 선민이네 두고 온다. 네가 나 대신 다 읽어주겠지. 나 대신 다 해독해 주겠지. 오늘의 나도 다 기억해 주겠지,라고 생각하면서.     


화 주제

Q. 나를 위로하는 소울 푸드

Q. 최근에 마음이 가장 훈훈헀던 날은 언제인가요?

Q. 올해 가장 고마웠던 사람


더 자세한 이야기는: https://podbbang.page.link/N3KgWN9A42RCnsLw6


일기떨기 03. 소진

낮에는 책을 만들고, 밤에는 글을 씁니다.

그 사이에는 주짓수를 하고요.

  일기떨기 인스타: https://www.instagram.com/illki_ddeol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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