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일기떨기 Dec 07. 2022

30. 일기떨기

음악은 가끔 나를 예정보다 더 멀리 가게 한다.



나는 오래 걸을 수 있고, 걷기라는 행위를 좋아하며, 그보다 음악을 들으며 걷는 것을 더 좋아한다. 바로 앞선 문장을 ‘걸으면서 음악을 듣는 것을 좋아한다’라고 썼다가 수정했다. 걷기 다음에 듣는 행위가 따라오는 것이 아쉬웠기 때문이다. 실상은 듣기가 나로 하여금 더 오래 걷게 만들고 있으므로. 그러니까 나는 음악을 듣기 위해 걷는 사람이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서 어딘가로 이동할 때 음악을 든든한 동행자로 삼곤 한다. 그런 음악들엔 정확한 목적지가 있다. 도착할 곳을 알고서 재생되는 음악들.     

반면, 나의 이동에 동행하는 음악은 가끔 나를 예정보다 더 멀리 가게 한다. 어떤 음악을 듣느냐에 따라 최종 목적지는 변경되거나 아니면 여러 경유지들을 거치게 만든다. 예컨대 평소와 다름없는 퇴근길, 망원동에서 불광천의 오리가족들을 지나 디지털미디어시티역까지만 걸어가서 지하철을 타야지 했던 마음은 결국 응암동에 다다르게 한다. 돌고 돌아 원래의 목적지가 가까워지면 초조해진다. 일부러 몇 정거장을 먼저 내리거나 더 후에 내리거나 하는 식으로 걷기와 함께 하는 음악 감상의 시간을 늘린다. ‘기분이 태도가 되게 하지 말자’라는 명언을 가슴에 품고 살면서도, 음악은 자주 나의 걷는 기분을 좌우한다. 들으면서, 걸으면서 나는 종종 생각한다. ‘이런 기분이라면 끝까지 걸어갈 수 있겠다…’ 그 끝이란 그 날의 내가 걸을 수 있는 세상의 끝이다.     

물론 집에서도 음악을 들을 수야 있지만 그럴 때 음악은 내게 BGM, 배경음에 가깝다. 내 안에서 음악이 축소된다는 뜻이다. 음악을 들으며 걸을 때마다 나는 영화 <비긴 어게인>의 대사를 자연히 곱씹게 된다. “난 이래서 음악이 좋아. 지극히 따분한 일상의 순간까지도 의미를 갖게 되잖아. 이런 평범함도 어느 순간 갑자기 진주처럼 아름답게 빛나거든. 그게 음악이야.”      

그날도 그런 날들 중 하나였을까. 퇴근 후 홍대에 볼 일이 있던 나는 연희동과 홍제동, 독립문과 경복궁을 도보로 지나 마침내 광화문에 도착했다. 가을을 목전에 둔 8월 말, 축축한 공기가 은근히 쾌적하게 느껴지던 보기 드문 저녁이었다. 그날의 플레이리스트를 세세하게 기억할 순 없으나, 한 곡을 유독 여러 번 반복 재생했던 것만은 기억이 난다. 몬스타엑스 멤버 기현의 솔로곡 <,(comma)>였다. 곡 설명을 보니 ‘도시의 어두운 밤을 연상시키는 기타 리프와 점점 고조되는 드럼 비트가 귀를 사로잡는 곡’이라고 되어 있다. 지난 여름밤의 장거리 산책을 회상할 때 이 노래만 살아남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 같다. 기현의 허스키하면서도 청량한 목소리는 여름 내내 무력함에 시달린 내 몸과 마음에 상쾌하게 스며들었다. 아직 오지 않은 가을이 그 목소리에 있었다.     

한참 사직터널의 보행자 통로를 건너고 있는데 ‘오렌지빛 터널 속 나는 어디쯤일까 / 지치지 않는다면 난 널 볼 수 있을 테니까’라는 가사가 헤드셋에서 흘러나왔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 그때 나는 터널이 아니라 이 노래로 여름을 통과하고 있구나, 생각했다. 영원히 내게 달라붙어 있을 것만 같던 여름이 매섭게 달아나는 버스와 자동차처럼 내게서 떨어져나가고 있음을 체감했다. 그건 역시 내가 음악을, 다름 아닌 걸으면서 들었기 때문이라고 다시금 말할 수밖에. 음악은 이렇게 내게 마음의 지도를 남긴다.     

그렇게 음악을 들을 때, 나는 나를 스쳐가는 풍경들을 허투루 지나치지 않게 된다. 모른 척 하거나 곡해하고 싶은 마음을 달랜 뒤 보다 성실하고 유심히 이 삶에 임하게 된다. 시끄럽고 복잡하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 차라리 음소거를 해버리고 싶은 세상은 내가 선택한 음악 덕분에 전혀 다른 방향의 생명을 갖게 되는 것 같다고, 조금 과장된 심정을 고백해본다. 




대화 주제     

나에게 익숙한 즐거움, 오랫동안 좋아해온 마음들에 ‘구체적인 언어’를 만드는 일의 즐거움과 기쁨을 만나고 있는 요즘입니다. 그 과정이 혼자서는 시도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이뤄진다는 게 무엇보다 큰 성취이기도 한데요.      

■ 여러분이 가장 오랫동안 좋아하고 즐거워해온 것은 무엇이 있을까요?

 혹시 지금, 무언가를 배우거나 익히고 있나요? 그렇다면 요즘 여러분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주는 것은 무엇인가요?

 올해 가장 오래 걸었던 산책이 있나요? 여러분들 마음에 남은 올해의 지도를 뽑아본다면요?

 음악 일지를 써본 만큼, 겨울 플레이리스트를 공유해볼까요? (지금 각자의 음악 어플을 켜서 가장 최근에 즐겨 들었던 음악 공유하기!)



더 자세한 이야기는: https://podbbang.page.link/N3KgWN9A42RCnsLw6


일기떨기 01. 혜은

『아무튼, 아이돌』 『일기 쓰고 앉아 있네, 혜은』을 썼습니다.

  망원동 '작업책방 씀'에서 다음 이야기를 쓰고 있습니다.

  일기떨기 인스타: https://www.instagram.com/illki_ddeolki/

매거진의 이전글 29. 일기떨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