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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기떨기 Jan 09. 2023

31. 일기떨기

이렇게 두서없이 쓴 일기를 정돈해야 하는 날이 올 걸 알면서도




 어디까지 가느냐는 역무원의 물음에 ‘시라오이’에 간다고 답했다. 우리는 같은 기차칸에서 저마다 다른 자리를 잡고 앉아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시라오이라고 말했다. 어떤 지명을 발음하는 것만으로도 그곳이 종착점이 될 거라 예감하는 것. 시라오이에서는 고개를 오른쪽으로 살짝 틀어 옆을 보는 것만으로도 오리온자리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날은 노보리베츠 온천에 다녀오는 길이었고 동네에 하나 있는 중국집에서 야끼소바와 아사히 병맥주 두 병을 나눠 먹은 날이었다. 중국집에서 나와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는 헐렁한 가방을 멘 채 땅을 보며 걷는 학생 한 명을 스치기도 했다. 저 애는 지루하고 답답한 마을에서 벗어나 분명 삿포로 같은 큰 도시에 가고 싶을 거야. 아니, 어쩌면 홋카이도도 너무 작다고 느낄지도 몰라. 도쿄나 오사카처럼 크고 번잡한 곳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길 바랄지도 몰라. 우리는 소년을 보았단 이유만으로 한동안 잊고 지냈던 심심한 유년 시절에 관해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천천히 걷다가 육교에 다다랐을 때, 고등학교 때까지 줄곧 모범생이었다가 작년에 겨우 건축학과를 졸업했다는 오빠와 공부에는 그다지 흥미가 없고 밤마다 라디오를 듣는 게 일상이었던 나. 그리고 그 모든 얘기를 가만가만 듣다가 혼자 생각에 잠기는 또 다른 사람은 또 가만히 말없이 걷기만 했다.

 길쭉한 기차역을 중심으로 집과 상점이 마주한 채 늘어선 마을은 한참을 걷다가 길을 잃게 되더라도 청록색 지붕이 있는 기차역으로 돌아오면 된다는 점에서 안심이 되었다. 첫날밤에는 중국 음식을 다음 날 아침에는 네팔 커리를 먹었다. 일본에 와서 수프커리를 한 번도 못 먹은 게 말이 되냐고 툴툴대면서도 별다른 고집 없이 이어지는 여행이 좋았다. 민족박물관을 다녀오는 길에 들른 중고상점에서 100원짜리 에스프레소 잔을 사기도 하고 동네 다방 같은 곳에서 올해 최악의 커피를 마시기도 했다. 우리가 묵었던 게스트하우스의 일 층 발코니에서 말보로 레드를 피우기도 했다. 여행을 다니다가 마음이 가는 곳이 있으면 담배를 한 대 피워야겠다고 다짐했고 그 결심은 생각보다 선선히 이루어졌다. 내 인생 두 번째 담배 스승은 이번 여행에서도 캐리어 대신 백팩 하나만 덜렁 메고 온 웅희였다. 여기 와서 산 거라고는 담배 한 갑과 성냥 묶음밖에 없는 스승은 내게 겉담배 태우는 방법을 알려줬다. 네 앞에 커다란 커피잔이 있어. 거기 들어 있는 음료를 조금씩 마신다고 생각하면 돼. 우리는 커피를 마실 때 입으로 음미하지 코로 마시지는 않잖아. 담배도 마찬가지야. 담배 연기를 애써 콧구멍으로 넘길 필요 없어. 천천히 커피를 마신다고 생각해 봐. 탁월한 스승의 가르침 아래 담배 한 대를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그 필터가 눅눅해져서 다 녹을 때까지 피웠다. 다 피운 담배의 필터를 살살 벗겨내 고명재 시인의 시집 『우리가 키스할 때 눈을 감는 건』에 수록된 시 「소보로」 오른쪽에 붙이고 나니 마음이 후련했다. 그날도 여느 날과 다름없이 편의점에서 과하다 싶을 만큼 다디단 유부 우동을 사고, 꾸덕한 까망베르 치즈와 딸기 롤케이크를 샀다. 여섯 개 한 묶음으로 된 올해의 한정 맥주를 사서 두 캔씩 나눠 먹으면서 그날 그날 쓴 돈을 계산하기도 했다. 나는 웅희에게 파란색 니트를 그 사람은 자기보다 훨씬 마른 웅희에게 여행 와서 한 번도 입지 않은 코르덴 바지를 건넸다. 우리가 담배를 나눠 피우고 옷을 바꿔 입는 동안 열흘이 훌쩍 지났다.

 시라오이에서는 홋카이도와 러시아 사할린, 쿠릴 열도에 터를 분포한 소수민족 아이누족의 삶을 엿보기도 했다. 그들의 흔적이 미국, 독일, 영국, 러시아 곳곳의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는 것과 일본어를 사용하는 아이누족의 노래를 듣는 일. 그 사람이 쓰는 일본어를 듣는 내내 기분이 이상했다는 내 말에 삿포로에 돌아가서 헤어지자던 사람은 내가 공항으로 돌아가는 날까지 내 옆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천천히 따랐다. 이번 여행에서도 나는 비효율적인 사람이었다. 마지막 이틀을 제외하면 목적지 근처에 숙소를 잡지 않았다. 기차역에서 최소 10분에서 20분 정도 걸어야 하는 한적한 곳에 터를 잡고 하루에 2만 보 조금 안 되게 걸어 다니면서 맛없는 커피와 맛있는 커피를 번갈아 마셨다. 끼니마다 맥주를 부지런히 마시고 내내 기침을 하면서도 어디 더 걸을 곳이 없나 두리번대기도 했다. 평소보다 더 많은 노래를 듣고 불렀으며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이렇게 두서없이 쓴 일기를 정돈해야 하는 날이 올 걸 알면서도 또 하나의 겨울이 생겼단 생각에 다시 또 좋았다.          




화 주제

Q. 여행지에서 자기만의 습관 혹은 의식적으로 행하는 일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Q. 본인이 여행지에서 절대 참을 수 없는 건 무엇이고 관련 에피소드가 있나요?

Q. 올해 꼭 가고 싶은 여행지가 있다면 어디인가요?

Q. 어떤 사람과 여행을 했을 때 마음이 채워지는 걸 느끼나요?

Q. 올해 이루고 싶은 일들에 대해 두서없이 얘기해 봐요.     



더 자세한 이야기는: https://podbbang.page.link/N3KgWN9A42RCnsLw6


일기떨기 03. 소진

낮에는 책을 만들고, 밤에는 글을 씁니다.

그 사이에는 주짓수를 하고요.

  일기떨기 인스타: https://www.instagram.com/illki_ddeol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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